연민도 미워하는 법 중 하나다.

나주 여행기 ( 完 )

by 조매영

집에 오자마자 씻지도 않고 책상 앞에 앉았다. 여행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한다. 손은 씻고 올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지 않기로 했다. 불쾌하고 찝찝한 기분까지 그대로 쓰고 싶다. 두 문장을 쓰면 한 문장을 지웠다.


창밖을 본다. 집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밝았는데 어느새 어둡다. 한 문장을 쓰면 두 문장을 지웠다.


한글창이 참 희다. 흰색도 어두워질 수 있구나. 화면에는 깜빡이는 커서만 남았다. 남겼다 생각한 문장도 온 데 간데없다. 어디 흔적이라도 없나. 미간에 힘이 들어간다. ctrl과 z를 함께 누른다. 분노를 생각하고 썼는데 짜증 섞인 문장이 되었던 것들이 나타난다. 다시 지웠다.


창밖을 본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어두운 것 같다. 여태 왜 몰랐을까. 골목에 가로등이 없었다. 골목을 밝히려고 창문들만 힘을 내고 있었다. 민원을 넣으면 설치해 주려나. 요즘 세상이 많이 흉흉해졌다는데, 가로등으로 완벽하게 위험을 예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설치한다면 가로등 밝기만큼이라도 좋아질 수 있지 않을까.


골목도 그렇고, 써야 할 글도 그렇고 깜깜하다. 골목은 이제 그렇다 치고 깜깜한 글은 어디 민원 넣을 수 있는 곳 없을까. 나도 참 마음에 안 든다고 지워놓고는 별생각을 다 하고 있다.




여행기를 쓰면서 내 안에 무언가 변할 거란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다. 글 한 편을 끝내는 마침표는 내게는 도돌이표였다. 겪었던 감정과 쓰면서 느낀 감정들이 안에서 다시 시작된다.


어릴 적 나도 지금의 나도 아빠는 미운 존재다. 의심할 가치가 없는 문제다. 세월이 지날수록 미운 감정 그 자체만 남게 되는 것 같아 무서웠던 적이 있다. 내가 겪었던 고통이 그렇게 단순했나. 아니다. 아빠는 언제나 다채롭게 미워해야 할 대상이었다.


답답해도 쓰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완벽한 도돌이표는 없다. 연주를 다시 한다고 해서 한 치의 오차가 없을 수 없다. 건반 위에 먼지가 조금이라도 앉았다면 그건 이미 다른 소리다. 단순히 반복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조금씩은 어긋나고 있었다. 어긋나는 소리로 다채로워질 수 있었다.


내 안에 연민이 커진다고 해서 여행기를 쓰지 않을 필요는 없었다. 연민도 미워하는 법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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