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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매영 Jan 12. 2021

애증이라 부르지 말아 줘

대립의 역사

  칼을 든 적 있다. 아빠가 오함마라 불리는 공구를 들고 다가오던 날이었다. 엄마는 언제나처럼 어쩔 줄 몰라했다. 살겠다고 칼을 들었다. 막상 칼을 드니 살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하던 도중에 오함마의 손잡이가 이마를 찍었다. 고꾸라졌고 칼을 놓쳤다. 고함치는 아빠와 도망치라며 비명을 지르는 엄마. 뒤도 안 돌아보고 뛰었다. 현관문을 지고 무표정한 창문과 문들이 가득한 골목을 지나 대로변에 다다르자 피가 고인 손가락이 보였다. 칼을 떨어트리며 조금 베였나 보다. 다신 칼을 들지 않기로 다짐했다. 내가 나를 죽일 것 같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사람같이 보이지 않았다. 가림막이라던가 미로를 이루는 벽 같아 보였다.  이마를 만지며 왜 오함마로 내려치지 않았을까 생각할 여유 생겼다. 이마를 만지니 욱신거렸다. 피는 묻어나지 않았다. 차라리 귀가 더 아팠다. 고함과 비명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한참을 쭈그려 앉아 고개를 파묻었다. 맨발이었다. 발바닥이 따가웠다. 도망치다 가시가 박힌 것 같았다. 그제야 찌르거나 베는 선택지가 생각났다. 부전자전 이랬던가? 겁쟁이와 겁쟁이 새끼.

 그날 이후부터 무서움보다 혐오가 더 앞에 자리 잡게 되었다. 물론 더 이상 맞지도 않게 되었다.     


아무도 위로해주거나 보호해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를 마주할 때마다 눈을 잃은 것 같았다.


 내가 중 2 때 아빠는 림프종에 걸렸었다. 의사가 엄마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다 했었다. 그런데 살았다. 용했다. 항암 사이클 사이사이에 옥상에 올라가 담배도 피우고 그랬는데 살았다. 욕먹으면 오래 산다더니 진짜 그런가 보다. 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욕도 하지 말아야지 싶었다. 혐오보다 무관심이 더 앞에 자리 잡게 되었다.



 내가 투병을 했을 때 엄마는 낮에 일을 하고 밤에 병원에서 잤다. 낮에는 아빠가 있었다. 마땅히 할 일도 없었는데도 그랬다. 소변 통을 비우거나 다 먹은 밥을 배식 카에 가져다 두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대체로 문제는 밤에 일어났다. 아빠가 림프종일 때는 엄마가 종일 병원에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종일 케어 받았던 게 부끄러웠던 걸까. 그러기엔 보호자 침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 보냈다. 어느 날은 옆 환자 보호자가 나보다 아빠가 더 환자 같아 보인다고까지 했었다. 도대체 왜 있는 걸까.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더니 림프종이 힘들긴 정말 힘들었던 것 같다.



 아빠는 병원에 올 때마다 병원 앞 노상에서 파는 가래떡 구이를 사 가지고 왔었다. 꿀이나 조청도 없이 가래떡을 씹으며 원기둥의 오함마의 손잡이나 담배를 생각했다. 매연 범벅에 먼지 범벅인 걸 왜 자꾸 사 오는 걸까. 왜 또 가래떡은 맛있는 걸까. 왜 이제 화도 나지 않는 걸까. 무관심보다 원망이 더 앞에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안아 달라 손을 뻗다 허공만 허우적거리고 마는 어린 내게 미안해졌다.     


지금도 외래진료를 갈 때면 가래떡을 사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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