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가고 사라지고 도망가기 전에 쓴 시
돼지가 우물에 빠진 건 아닌데
여기저기 다니다 어디로 갔을까
예쁜 돼지는 아니었는데 내 눈엔
하나밖에 없는 분홍새끼돼지였어
꿀꿀거리지 않았지 유일무이한 소리였어
익히 알던 소리가 아니었지 듣기 좋은 소리였어
발등을 건드리고 엉덩이를 스치며 돌아다녔어
공기 속에 자기 흔적 남겨둔 채 어디로 갔을까
어지르지 않은 단정한 돼지였어 반려돈 삼고 싶었는데
꿈 장면 바뀌었어
세계전도가 펼쳐져있었지 그 옆엔
좋은 문장들이 적힌 종이가 잔뜩 깔려있었어
니체였을까 괴테였나 고흐였을까 릴케였나
멀리 떨어진 다탁에는 누군가 과외를 하고 있었어
차도 나르고 커피도 내리고 영어도 가르치면서
다탁 위엔 산국과 코스모스 정물화처럼 꽂혀 있었어
또 다른 꿈으로 전환됐어
창밖은 오전인데 저녁인 듯 먹구름 덮쳐서 어두웠어
연락 끊긴 친구의 영상이 보였어, 드론으로 예술가의 집을 찾는
대화 나누던 목소린 그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라 놀라웠지
다시 재생했어 형체 없이 풍경만 보이는 가운데 두 사람 목소리 생생했어
거센 비 쏟아지고 있었어 빨랫줄에 널어둔 이불 생각했어
비와 이불, 둘의 결합이 어깨 짓누르듯 무겁게 느껴졌지
바브라 스트라이젠트의 우먼인러브가 흘렀고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온 지구를 덮었고
니체는 모든 거 받아들이고 사랑하라 외치고
괴테는 젊은 시절 소망한 것 노년에 이루어진다 하고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오늘 여기 순간 살라하고
인문학에 오감 열어둔 채 꿈이라는 작품 속을 거닐고
독립된 짧은 꿈, 옴니버스라 할까 의미 있는 꿈들이야
꿈이 전하는 메시지 뭘까 무의식 세계를 의식으로 끌어올려 곰곰 사유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