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차 : 여행이 즐거운 이유는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
체력이 받쳐주던 시절에는 뭐 하나라도 더 보려고 귀국하는 날까지 실컷 돌아다니다 밤늦은 비행기를 타곤 했다. 하지만 마흔 즈음이었던가 영국에서 몸살이 나 비행기에서 엄청나게 고생을 했던 사건 이후로는 호텔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귀국 편 시간을 정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번 여행에도 그러고 싶었으나 따님이 그건 좀 아쉬울 것 같다고 하여 저녁 7시 비행기로 예약을 하였다. 늦은 조식을 먹고 짐을 호텔에 맡겨두고 호텔 근처에서 놀다가 3시쯤 리무진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것으로 계획을 짰다.
조식은 그랜드프론트에 위치한 우메키타셀러 식당가에서 먹기로 했다. 깔끔하고 세련된 음식점들이 모여있는 곳이어서 한 번쯤 먹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디를 갈까 둘러보다 입구에 걸린 브런치 사진이 그럴듯해 보였던 오사카시티 베이커리로 들어갔다. 크로와상과 커피 등으로 이루어진 조식 세트를 먹었는데 생각보다 맛은 별로였다.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몇 년 전부터 느끼는 건데 요즘 한국 요식업의 퀄리티가 높아지다 보니 소위 원조라고 불리는 나라에 가서 음식을 먹어도 큰 감동이 없다. 예전에 함께 여행했던 프랑스 인이 한국의 바게트가 프랑스 바게트보다 더 맛있다고 얘기할 정도로 베이커리의 수준도 높아진 것 같다. 그 말인즉슨 모든 것이 상향 평준화된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말의 동의어이기도 하다.
여하튼, 평범한 조식을 마치고 근처를 둘러보다 보니 포스가 상당해 보이는 베이커리가 또 보였다. 검색해 보니 ‘가리게트’라고 밀푀유가 유명한 베이커리라고 한다. 빵을 먹고 나서 또 빵을 먹기도 뭐 하고 평소 밀푀유는 선호하는 식감이 아니라 패스하기로 했다. 물론 따님도 동의했다.
아이와 여행을 하면서 음식을 맛보고 맛이 어떤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평생 그 누구와도 느껴보지 못했던 즐거움 중 하나였다. 아마도 같은 DNA를 가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때문일 것이다. 초밥 하나를 먹어도, 푸딩을 먹어도 비슷한 호불호를 가진 누군가와 함께 감상을 나눈다는 것은 그야말로 새로운 경험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딸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이 이토록 즐거울 줄이야..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호기심을 통해 새로운 발견을 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더 깊이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름진 크로와상을 먹어서인지 속이 불편하고 컨디션이 안 좋아지기 시작해서 일단 숙소로 돌아갔다. 체크아웃이 12시였기에 여유를 부리며 침대에 누워 쉴 수 있었다. 교통편 좋은 곳에 숙소를 잡으면 이런 점이 매우 편리하다.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다 보니 어느새 체크아웃할 시간이 되었다.
호텔로비에 짐을 맡겨놓고 마지막 남은 3시간은 온전히 아이의 취향에 따르기로 했다. 버블밀크티를 좋아하는 따님은 춘수당이라는 샵을 찾아냈고 사진에서 가장 맛있어 보이는, 팥이 올라간 밀크티를 주문했다. 자리가 없어서 테이크아웃으로 주문하여 벤치에 자리 잡고 짠하고 오픈을 했는데 기대와 달리 달지 않고 아주 건강한 맛이었다. 한마디로 맛이 없었다. 대만에서 먹어봤던 홍두빙같은 팥빙수 맛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많이 달라서 당황스러웠다. 하나를 주문해 나눠먹었음에도 반도 못 먹고 버릴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검색해 보고 안 사실이지만 춘수당은 대만 버블티의 원조라고 한다. 아마도 메뉴를 잘못 주문해 맛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버블티를 망쳤으니 깔끔한 마무리를 위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따님은 수차례 방문해 어디에 무슨 캐릭터가 있는지 알 정도로 통달한 산리오 매장에 또 가보자고 했다. 해피엔딩을 위한 장소로는 괜찮은 곳이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굿즈 매장에 가면 30분은 금방 지나간다. 아쉽지만 이젠 출발해야 했다.
한큐 호텔에서 리무진 버스를 타고 공항에 도착하니 오후 4시였다. 서울에 도착하면 밤 9시니 이른 저녁을 먹어야 했다. 예전에 긴자에서 맛있게 먹었던 장어덮밥이 생각나서 덮밥과 소바를 시켜 먹었는데 공항음식 치고 맛이 꽤 괜찮아서 다행이었다.
4박 5일쯤 되니 아이도 슬슬 집이 그리운가 보다. 여행에 더 이상의 미련은 없어 보였다. 3박 4일은 좀 아쉽고, 가까운 일본 여행을 여유롭게 즐기기엔 딱 좋은 기간이 아닐까 싶었다.
따님을 위한 여행이었기에 아이가 지루해하면 아이가 좋아하는 코너로 자연스레 안내하곤 했다. 여행을 통하여 아빠는 딸에게 양보하고, 딸은 아빠를 배려하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익혀갔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며 가뜩이나 가깝던 부녀지간이 한층 더 가까워진 거 같아 뿌듯했다.
이번 여행은 귀여운 도쿄바나나 미니언즈를 사서 비행기에 오르던 순간까지, 하나하나가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다. 딸에게도 이 여행이 오랫동안 특별한 기억으로 남길 바라는 마음이다.
다음 회차부터는 따님의 관점으로 여행기를 연재합니다. 같은 사건, 다른 관점의 재미를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