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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하게 Jul 14. 2024

처음 맛본 낙오의 맛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였다.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을 한 명씩 앞으로 불러서 생활기록부를 일일이 나눠주었다. 이별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선생님과 개별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인사에 집중하지 않았다. 우리의 정신은 온통 생활기록부에 가 있었는데, 선생님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선생님은 생활기록부에 적힌 글자를 확인하느라 바빴다. 다음 차례인 아이가 앞으로 나오면 “어, 누구 왔니?”하며 바로 시선을 내려 원하는 글자를 찾았다. 그런 후에야 형식적인 대화를 한두 마디 나누면서 문제의 기록부를 건네주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한 아이의 6년 치 과거가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관심 있는 건 미래였다. 선생님에게 생활기록부를 받기까지 갖은 인내심으로 버티던 아이들은 생활기록부를 받고 돌아서자마자 글씨부터 찾았다. 선생님이 뭘 봤는지 알려주지 않고, 기록부도 뒤집어서 건네주었기 때문에 직접 확인해야 했다. 연필로 쓴 세 글자. 혹은 네 글자. 너의 미래가 저당 잡혔다는 인증 도장처럼 찍힌 그 글자에 아이들은 뒤늦게 소리를 질렀다. 환호하거나 절망하거나. 데시벨은 비슷했다. 학년 내내 같이 어울려 다닌 친구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데면데면 지내던 아이들과 어쭙잖게 친한 척 대화를 시도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중학생이 되어가는 첫걸음이었다.


내가 그 순간을 이처럼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생활기록부를 나에게 건네주던 선생님의 표정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보다 먼저 내가 배정받은 중학교를 확인한 선생님은 표정부터 달라졌다. “어머, 어떡해….” 목소리도 잊히지 않았다. 내 앞의 친구들이 모두들 화기애애하게 학교 배정을 받았던 터라 분위기가 더욱 극적으로 반전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선생님이 그렇게 말하니까 친구들도 내 옆에 옹기종기 몸을 붙이며, “어떡해, 얘 어떡해”했다. 그러니까 나는 점점 더 기분이 이상해지고, 뭔가 어떻게든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뒤집어서 확인한 내 생활기록부에는 6지망으로 적었던 중학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무리 봐도 담임선생님의 필체여서 나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떨어졌다!”


뺑뺑이 배정이라는 것이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건지는 몰라도 내가 잘하고 못하고와는 별반 관계가 없는 것만은 분명할 텐데, 친구들은 다들 떨어졌다! 고 말했다. 하기야 나도 그렇게 말했다. 나 떨어졌어! 하지만 그렇게 친구들과 맞장구를 칠 때에도 나는 여전히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왜 그런 얼굴로 나를 봤고, 친구들이 호들갑스럽게 나를 위로해주려고 했는지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나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섬처럼 외따로 떨어진 기분을 느꼈다. 교실은 어수선했고,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내가 겪은 일을 직시할 수 있게 된 건 교실을 나오고도 한참이 더 지나서였다.


예비소집일이라며 중학교에 미리 다녀와야 한다고 했다. 태어나서 살던 동네와 건너편으로 이사를 가서 살던 동네, 아버지 회사가 있던 동네 주변 밖에 모르던 나는 이름도 생소한 나의 중학교가 어디쯤에 붙어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부모님의 힘을 빌려야 했다. 나는 생활기록부를 들고 본관 1층에 있는 공중전화로 향했다. 공중전화에는 이미 사람이 많았다. 줄이 하도 길어서 건물 밖까지 나와 있었다. 그때까지도 현실에서 약간 동떨어져있는 듯한, 앞서 말한 외따로 떨어진 섬 같다던 기분이 계속되고 있었다. 뭔가를 해야 해서 하고는 있는데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실감 나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멘탈 나갔다”로 요약할 수 있을 텐데, 그 시절에 그런 말을 알리가 없었다.


먼저 통화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다들 사정이 나와 비슷한 것 같았다. 엄마 나 어디 붙었어. 아빠 나 어디 학교로 가야 한대. 비슷비슷한 얘기를 하다가 비슷한 구간에서 울컥하더니 눈물의 훔치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바로 앞에 있는 아이가 눈물을 훔치며 50원을 남겨둔 채 떠나고 나는 기뻐할 새도 없이 동전을 더 넣으며 엄마 가게 번호를 눌렀다. 엄마는 가게를 비울 수 없다며 아빠한테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나는 통화를 마치며 뒷사람의 눈치를 슬쩍 봤다. 연달아서 통화를 해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여전히 많은 아이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손가락은 이미 아빠 회사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뒷사람이 뭐라고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 사이에 통화가 연결되었고, 나는 아빠의 직책을 말하며 바꿔달라고 했다. 아빠가 무슨 일로 회사까지 전화를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중학교 예비소집일이 있다고 가라고 하는데 학교가 어디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아빠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물었다.


“학교가 어딘데?”


반사적으로 학교 이름을 말하려는데 순간 목이 꽉 막혔다. 학교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그런 발음은 소리내어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선생님과 친구들의 얼굴이 차례로 스쳐갔다. 뒤에 서 있던 아이가 옆으로 나와서 짝다리를 짚고 팔짱을 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S… S여중이라는데… 나 거기 몰라. 그게 뭐야. 어디 있는 건데….”


초연하게 잘하고 있다고, 나도 모르는 새 부지런히 나를 다독거리고 있던 나약한 마음이 보기 좋게 무너지던 순간이었다. 나는 앞선 아이들 몇몇이 그랬던 것처럼 수화기를 들고 엉엉 울었다. 다른 아이들이 쳐다볼 걸 알아서 금세 울음을 죽이고 끅, 끅 울었다. 아빠는 그런 일로 우는 거 아니라며 다정하게 꾸짖었다.


“그런 걸로 울면 나중에 어쩌려고. 괜찮아. 아빠가 알아. 아빠랑 가면 돼.”


아빠가 그 학교를 정말 알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줄곧 한 동네에서만 살았고, 이사를 가봤자 길 건너에 있는 동네였다. 초등학교는 태어날 때부터 살았던 아파트와 5분 거리에 있었다. 내가 가려고 했던 학교는 아파트와 초등학교 사이에 있는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우리 가족 중 누구도 내가 그 학교가 아닌 학교에 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게나 지척에 있는 학교를 두고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를 학교를 다녀야 한다고? 나만큼이나 부모님도 멘탈이 나갔을 걸로 추정된다. 그런 걸 티 내는 분들이 아니어서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당시 선생님의 얼굴이 왜 여전히 잊히지 않을까. 긴 시간 생각해서 내린 결론은 ‘처음이어서’였다. 그때 선생님의 얼굴은 완벽하게 “떨어졌다”를 말하고 있었다. 어머 어떡해, 너 떨어졌다. 살면서 여러 번의 낙오를 경험했지만 그처럼 생생한 지적은 처음이었다. 선생님은 의도하지 않았다. 나를 안타까워하던 표정을 보면 알았다. 그 표정을 조롱에 가깝게 읽은 것은 내 마음이었다. 처음 맛본 낙오의 맛. 그건 이상하고 외롭고 죄책감을 일으키며 멀쩡한 것도 뒤틀리게 하는 최면 같은 것이었다. 심지어 합당하지도 않았다. 그저 뺑뺑이였을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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