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지지 말라고 유성으로 썼다
책장에 꽂힌 서류봉투 안에
할아버지가 쓴 글씨가 자고 있다
서서 자야 하는 기분을
내게 말해줘야 하기에
봉투를 눕혀도 글씨는 눕지 않는다
호락호락하지 말라고 할아버지는
볼펜심을 짓눌러가며 썼다
짓무른 가슴은 필체에 담기고
우묵히 들어간 종이 위에
포개진 영혼의 발자국
할아버지가 걷던 자리
내 꿈으로 오던 거리
별이 반짝이는 우주에서
할아버지가 논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소리가 들리는 날도 있다
세상이 우는 날에도
지워지지 말라고
유성으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