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hum Aug 12. 2023

꿈의 도시 서울

곧 죽어도 서울!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 6학년 때 집안 사정으로 인해 강원도 속초로 전학을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중, 고등학교를 다니며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그때 살던 집은 뒤편으로 곧장 설악산 줄기가 뻗어있었다. 창문을 열면 멀리 호수와 바다의 풍경이 겹겹이 펼쳐져 있었다. 지금 와서는 ‘내가 참 좋은 곳에서 자랐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온갖 상상으로 미래의 꿈을 덧칠해 나가던 10대의 나에게는 이곳은 너무 좁았다. 성인의 나이에 가까워질수록 속으로 되뇌었다.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서울만이 살 길이다.’, ’곧 죽어도 서울…’



 나는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미술시간을 특히 좋아했다. 연습장에 만화를 즐겨 그렸다. 하지만 막상 진학이나 취업을 생각할 때에는 사정이 달랐다. 예체능 쪽으로 방향을 정하자니, 용기도 없었고 집안 사정도 좋지 않았다. 설령 적성을 살려 직업을 갖더라도 화가나 만화가 정도일 텐데, 그런 일로 성공하여 먹고산다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당시 나름대로 고민해서 타협을 본 것이 제과제빵 분야였다. 적당히 손재주를 부리면서 벌어먹고 살기에도 수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파티셰라는 직업도 왠지 근사해 보였다. 그렇게 나는 서울 근방의 전문대 제과제빵과에 입학했다. 그 얕은 고민의 결정은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다.



 나보다 다섯 살 많은 누나는 먼저 서울로 올라가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누나는 반지하 월세방에서 살고 있었고, 뒤늦게 상경한 나는 그 집에 얹혀 지냈다. 넉넉한 공간은 아니었지만, 돌아보면 학교생활도 사회생활도 누나의 집이 있었기에 훨씬 수월했다. 서울은 상상했던 대로 꿈의 도시였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로 붐볐고 그들은 항상 바쁘게 움직였다. 잠을 잃은 이 도시가 정말 멋지게 느껴졌다. 반지하 누나 집에 얹혀살고 있긴 해도, 그 안에서 함께 호흡하며 서울 시민으로 살아가는 나 자신이 상당히 멋져 보였다. 서울은 속초보다 볼거리도 즐길 거리도 훨씬 많았다. 조금만 지하철을 타고 가면 멋진 공간, 내가 좋아하는 유명인들을 만날 기회도 있었다. 나도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 그들처럼 빛나는 무언가가 될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좌) 당시 살던 반지하 집 / (우) 집 앞 동네 풍경



 철없던 시절은 그렇게 천천히 흘렀다. 적성 문제로 학교에서 방황하고, 몇 번의 연애에 실패하고, 힘든 군생활을 거치고, 나는 그러면서 조금씩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두루뭉술하기만 했던 내 미래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이 있게 고민하게 되었다. 가족들에게 기댈 형편이 되지 않았던 나는, 학자금 대출을 받아가며 졸업까지 했겠다, 우선 전공을 살려보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후 몇 개의 레스토랑과 베이커리에 취업을 했다. 하지만 이 일은 내 적성에 전혀 맞지 않았다. 요리 분야는 내 생각 이상으로 과학적이고 영양학적인 일이었다.  자유분방한 창작과는 거리가 있다고 여겨졌다. 데코레이션 수업 시간 때, 내 멋대로 수업 방향과 다르게 케이크를 범벅으로 만든 적이 있다. 교수님께서는 "계속 이런 식으로 할 거면 그만두는 게 어때?" 말씀하시며 내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그래. 그때 그만두었어야 했어' 생각했다. 직장에서 나는 덤벙대는 기질로 번번이 사고를 쳤고, 나 또한 일을 하는 과정에서 가치나 보람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렇게 무의미하게 살고 싶지 않았는데’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더불어 얹혀살던 누나의 눈치를 점점 더 심하게 보게 됐다. 그 과정에서 깨달았다. 그동안 나 자신의 재능이나 적성을 고려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다시 인생의 방향을 재정비할 필요를 느꼈다. 희미하지만 한 가지 마음에 피어난 생각은 '내 생각을 창작으로 풀어내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연습장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던 과거의 나를 떠올렸다. 다시 새롭게 시작해 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여전히 서울은 나에게 희망의 도시였다.



 고등학생 때 취득했던 그래픽 자격증 덕분에 그것을 활용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취미 삼아 그려보니 제법 재미있었다. 이게 직업이 되면 어떨까? 생각하게 됐다. 알아보니 그림을 그리면서 먹고살 수 있는 일에는 순수화가나 만화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픽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와 같이 그림으로 돈을 버는 다양한 직업이 있다는 사실을 그 시기에 알게 되었다.


 당장은 그와 관련된 학력도 경력도 없다 보니 투잡을 뛰면서 그림을 그려보기로 했다. 그리고 충무로의 한 회사에 취업을 했다. 국내 인쇄물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일이었다. 넉넉한 급여는 아니었지만 그림을 그리면서 생계를 유지하기엔 충분했다. 그렇게 낮에는 인쇄물을 다루는 일을 했고 퇴근 후에는 매일같이 그림을 그렸다. 그때 내 나이는 스물다섯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돌도 씹어먹을 젊은 나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땐 너무 늦었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조바심을 느끼며 밤늦게까지 그림을 그렸다. 사장님도 좋은 분이셨다. 바쁘게 사는 나를 늘 독려해 주셨다. "미래엔 일자리가 더 없어질 거야", "시간 쪼개서 공부해", "할 일 다 마쳤으면 얼른 퇴근하고 그림작업 해" 나는 든든한 지원군 아래에서 1,2년 정도 그런 생활을 이어갔다.


내 마음의 고향 충무로 인쇄골목



 조금씩 내 그림을 찾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첫해엔 공모전에 몇 차례 당선되었고, 두 번째 해엔 본격적인 그림 작업 의뢰가 들어왔다. 첫 작업 의뢰가 들어온 날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영화 포스터 제작 의뢰였는데, 미팅 때 건네받은 영화 CD와 계약서를 가슴에 끌어안고 충무로에서부터 종로 5가까지 가슴이 터지도록 달리고 또 달렸다. 정말 행복했다. 그렇게 3년 차가 되자 나의 프리랜서 수익이 회사 급여수익을 넘기 시작했다. 꽤 많은 기업들이 내게 협업 제안 메일을 보내왔다. 난 내 일을 즐기고 있었고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 실로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 과정에서 나의 치부처럼 여겨지던 학자금대출금도 전부 상환했다. 삼 남매를 키우느라 고생한 어머니의 빚도 조금씩 갚아드릴 수 있었다. 강남대로 한복판 커다란 어학원 건물에는 작업 의뢰로 그린 내 그림이 커다랗게 걸려있었다. 사진을 찍어 가족 단톡방에 공유했다. 모두가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성공의 냄새란 이런 것인가? 다들 이렇게 자신의 재능을 살려서 성공 궤도로 날아오르는 것인가?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지만 내 안에서는 이런 자신감이 점점 확신으로 변하고 있었다. 급기야 그림과 상관없는 텔레비전 출연, 광고 제안까지 들어왔으니 자의식과잉이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무의미한 회사생활에 지쳐있는 친구들을 보며 자신만의 꿈을 꾸고 높은 이상으로 살아보자고 주제넘은 조언을 했고, 조금 극단적인 방법으로 큰돈을 벌려고 하는 친구에게는 정신 차리라고 날카로운 말을 쏘아댔다. 그때의 나는 요샛말로 하면 젊은 꼰대가 아니었을까 싶다. 멀게만 느껴졌던 꿈의 서울이 이제는 내 앞에 더 가까이 다가왔다고 생각했다.



남산에 나 (201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