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hum Aug 26. 2023

그럼 결국 태어난 게 잘못이네?

극단적 우울 끝에 내린 결정


 정점을 찍고 다시 천천히 줄어드는 프리랜서 일, 좋지 않은 회사 사정. 불안과 스트레스는 점점 스스로를 비정상적인 생각으로까지 치닫게 만들었다. 급기야 외모, 학력, 출신, 가정환경까지 나의 모든 것들이 콤플렉스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비뚤어진 시야로 나름의 근원을 찾아 질문을 해나가다 보니 종국에는 '결국 세상에 태어난 게 잘못이네?' 하는 지점까지 다다랐다. 한 때 입에 달고 살았던 꿈이나 희망과 같은 낭만적인 단어들도 내 안에서 천천히 지워지고 있었다. 많은 것들 중에서도 바로 그 사실이 내게 가장 큰 슬픔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전부였던 삶의 신념이 무너지는 순간 인간은 얼마나 피폐 해지는가. 나는 스스로를 통해 절감했다. 꿈이 사라져 버린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내세울 수 없는 사람처럼 여겨졌다.


 전부터 내 감정과 생각을 창작으로 표현하는 일이 가치 있는 천직이라 믿고 살아왔는데, 바로 그 예민한 감수성을 이유로 정신이 온전치 못한 나는 약 반년 간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개인 작업이 멈춰지니 내 커리어도 전부 스톱되었다. 악순환이 계속됐다. 차라리 누군가 원하는 그림을 똑같이 묘사하는 일을 했거나 레시피나 설계도에 맞춰 일을 진행하는 직업을 갖고 있었더라면 적어도 이런 이유로 곤란을 겪지는 않을 텐데. 자부심과 애정을 가졌던 이 일의 특성이 반대로 원망스럽게 여겨졌다. 과거, 여러 감정들이 뛰놀던 머릿속엔 이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건 정상적인 직업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다.




 우선 사장님께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다. 항상 나를 응원해 주시던 사장님은 평소에도 '좋은 기회가 있으면 언제든 회사를 그만두고 꿈을 좇으라'라고 이야기해 주셨다. 이런 어두운 얼굴로 퇴사를 이야기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가슴이 아팠다. 사장님은 내 다음 계획에 대해 물으셨고, 나는 우선 쉬고 싶다고, 또 그림 그리는 일도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수년간 이 꿈만 좇으며 달려온 나를 가장 잘 아는 분이셨기에 사장님은 어두운 표정으로 그 이상 무엇도 묻지 않으셨다.


 회사생활과 그림 그리는 일을 모두 그만두면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제 높이 올라가고 싶다는 야망은 사라졌다. 그저 불안하지 않은 삶 속에서 적당히 굶어 죽지 않고만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문득 몇몇 친구들의 얼굴과 그들을 대하던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불평만 하고 꿈을 꾸지 않는다며 주제넘게 답을 내리지 않았던가. 그들에게 야망, 모험심을 갖고 꿈을 꾸라며 충고나 조언을 해대지 않았던가. 내 코가 석자인 줄도 모르고... 창피함에 자조 섞인 헛웃음이 나왔다. 고단한 일상 속 스트레스를 견디며 현실적인 삶을 사는 다수의 사람들. 그들이 결국 승리자였고 나는 철없이 살아왔다고 속으로 인정했다.


 당시 회사는 대부분 나 혼자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휴가를 3일 이상 갖기란 어려웠고, 때문에 유럽과 같은 지구 반대편으로 여행이나 휴가를 떠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우선 이 나라를 떠나 지구반대편으로 달아나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면서 먹고살기 위해 새로운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전과 같은 정신적, 지적 노동이 아닌 손이 기억하고 꾸준히 해나갈 수 있는 전문, 숙련직 같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독일의 직업교육 제도였다. 매체를 통해 고용이 안정되고 숙련직이 존중받는 나라로 독일이 손꼽힌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경쟁과 비교로 가득 찬 한국 사회와는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나라였다. 독일엔 아우스빌둥이라는 직업교육 제도가 있었는데, 2-3년간 각 분야의 회사에서 기술을 배우며 최소생활비 수준의 급여를 제공받는 제도였다. 그 기회는 외국인들에게도 열려있었다. '어떤 기술이든 다시 처음부터 배워보는 거다. 뭐든 괜찮다. 그림만 아니면...' 하고 생각했다.



당시 살던 반지하 우리집 (나의 20대 시절을 여기서 보냈다)


 위에 서술한 내용만 얼핏 봐선 나름 새로운 인생을 위해 야심 찬 계획을 짠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되려 될 대로 되란 식의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사실 지칠 대로 지친 당시의 나는 누나의 권유로 정신과 상담도 받고 있었고, 그 외의 시간엔 대부분 방안에 처박혀 식음을 전폐하고 쓰러져가고 있었다.


 내 방 침대에 누워 몇 날 며칠 잠만 잤다. 암막 커튼을 치고 하루종일 방에 누워 천장 쪽 커튼 사이로 해가 보였다가 사라지는 걸 바라만 보았다. 괴롭지 않은 순간은 그저 잠깐 잠에 드는 순간뿐.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 내게 하루가 주어졌다는 사실이 괴로워 신음했다. 죽지 못해 산다는 게 딱 맞는 표현이었다. 지나고 보면 그것이 우울증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한다. 몰골은 피폐해졌고 가족들은 내 모습을 보고 놀라 걱정했다. 당시 여자친구였던 지금의 아내도 어떤 식으로 나에게 도움을 줘야 할지 몰라 무척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우리의 관계 또한 외줄 타기처럼 위태로웠다. 이래저래 그 시기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큰 마음의 짐을 안겨준 셈이었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가슴깊이 미안하고 또 감사하다.


 당시의 나는 이대로 방에 처박혀 가족들을 힘들게 하느니 먼 나라에 가서 죽든지 살든지 방법을 찾는 게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작정 독일 베를린으로 가는 비행기 편도 티켓을 끊었다. 숙소를 예약했고 출국날만을 기다렸다. 남아있는 시간은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 작별 인사를 하는 데 사용했다. 갑작스러운 결정에 당황을 하는 가족들과 여자친구에게는 '3개월 정도 유럽을 여행하고 금방 돌아오겠다'는 모호한 말로, 친한 친구들에게는 '새로운 기술이나 직업을 배워 정착을 하든 굶어 죽든... 할 계획'이라는 말을 했다. 굳이 안심을 시키거나 괜찮은 척할 필요가 없는 친구들 앞에서 한 말이 솔직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심지어 누구를 언제 만나는지에 따라 내 계획에 대한 답변은 매번 바뀌었다. 나조차 내 삶이 어느 방향으로 왜 흘러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백 프로 내가 감당하고 책임져야 할, 이 부담스럽고 피곤한 인생의 운전대를 마음 같아선 누구한테 확 떠넘겨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기력


 그렇게 출국일이 다가왔다. 한 달이 걸릴지 일 년이 걸릴지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으면서 서울의 모든 짐은 그대로 둔 채 몸만 떠날 준비를 했다. (주변 사람들은 이 부분이 가장 대책 없는 부분이었다고 지금도 혀를 찬다.) 뒷수습 같은 건 생각도 할 여력이 없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기 전, 현관문 앞에 서서 천천히 집 안을 돌아보았다. 한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만 있었던 침대, 사놓고 방치해서 죽어가는 몇 개의 화분들, 몇 년 간 내 그림 작업을 위해 고군분투해 주었던 컴퓨터, 반지하치곤 햇빛이 제법 잘 들어왔던 화장실까지 그 모든 것들이 나와 힘든 시간을 함께했던 동료들처럼 느껴졌다. 슬픈 감정이 일었다. 그들을 돌보지 않고 무책임하게 나만 달아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익숙한 동네 풍경을 바라보았다. 직장으로 향하는 사람들과 교복을 입고 등교를 하는 아이들도 보았다. 그 사이를 통과하는 지금의 내가 그 아이들보다 더 어리숙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지금의 내 한심한 모습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눈물이 났다. 오래도록 염원했던 내 인생 첫 유럽여행은 이런 기분으로 시작됐다.











이전 02화 학자금을 전부 상환한 날, 꿈의 몰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