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자와 모과 Jun 18. 2023

05. 꼬깔콘


명동이었다. 붐비는 사람들 틈을 스쳐 지나가는데 달콤한 향이 코끝에 닿았다. 아, 이 향기. 마크 제이콥스의 데이지 향수였다. 그 즉시 머릿속으로 시드니 도심이 펼쳐졌다. 20대 후반 시드니 센트럴역 근처에서 세 달을 머무르며 데이지 향수를 뿌렸다. 시드니에서 쇼핑을 하다 꽃이 달린 병이 예뻐 충동적으로 구매했고 시드니에서만 썼던 향수였다. 10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우연히 이 향을 맡을 때마다 시드니 풍경이 떠오른다.  


후각은 기억을 소환한다. 마른 빨래 냄새, 빵 굽는 냄새, 봄비 냄새, 잔디 깎은 냄새, 연인의 체취를 맡으며 우리는 문득 잊고 있던 옛 순간들을 떠올린다. 그러므로 영화 <퍼펙트 센스>에서 사람들이 후각을 잃어버리기 전 느꼈던 감정이 슬픔인 것은 당연하다. 자신만의 추억이 모조리 사라져 버리는 셈이니까.


 이완 맥그리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영화는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인류가 감각을 하나씩 잃어가는 상황을 보여준다. 처음은 후각이다. 처음에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몰려온다. 흐느껴 울고 나면 더 이상 냄새를 맡을 수 없다.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 절망하지만 결국 다시 일어선다. 


다음은 미각. 미각이 사라지기 전 사람들은 미칠 듯한 허기에 사로잡힌다. 사랑을 잃거나, 낙심했을 때 허전한 마음을 음식으로 가득 채우려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날 생선을 뜯어먹고, 소스를 들이마시고, 립스틱과 로션까지 닥치는 대로 먹어치운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미각은 사라져 있다.


 이제 청각을 잃을 차례다. 우리는 시각은 소중히 여기는데 반해 청각에게 소홀한 경향이 있다. 데이비드 오언의 책 <볼륨을 낮춰라>에는 청각을 상실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말한다. 다 같이 식당에 가도 친구와 가족의 대화를 들을 수 없고, 들리지 않으니 참여할 수 없어 고립되는 기분이 든다고. 레스토랑에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옆 테이블은 시끌벅적한 웃음소리로 가득하며, 앞에서는 친구들이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다, 그 모습을 모두 볼 수 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면? 화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 


영화에서도 청각을 잃기 전 사람들이 보이는 행위는 분노다. 책상을 뒤집어 없고, 지나가던 사람을 두들겨 패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폭언을 퍼붓는다. 그러다 찾아오는 고요함. 청각이 사라진다.


 후각, 미각, 청각이 사라져도 사람들은 다시 살아간다. 그들은 서로를 격려한다. ‘삶은 계속된다’(life goes on)고, 힘을 내자고, 어깨를 두드리며 포옹을 한다. 사람들은 수화를 배워 대화를 나누고, 와인을 마시며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직 시각과 촉각이라는 감각이 남아 있다. 인류는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서로에게 친절을 베푼다. 그러나 아직 영화는 끝나지 않았고, 이 영화를 즐길 분들을 위해 스포일러는 여기까지만 하겠다.


 1983년 롯데에서 만든 꼬깔콘은 촉각과 청각을 일깨우는 과자다. 우선 꼬깔꼰을 하나씩 손가락에 끼워 보자. 손가락에 끼워 먹게끔 만든 과자이니 꼭 따라해야 한다. 다섯 손가락에 하나씩 끼우면 나쁜 마녀 손 완성. 손가락 끝이 과자에 꼭 죄여 막혀있는 감각을 느껴보라. 또한 손가락을 구부려 과자가 땅에 떨어지는지도 확인해 보자. 모두 제자리에 있는 걸 확인했다면 이제 하나씩 빼먹으면 된다. 먹을 땐 손가락을 깨물지 않도록 조심해라. 


고깔콘 하나를 입안으로 가져가 씹어보자. 귓가에 경쾌하고도 강렬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와자작, 바사삭, 쿵쾅쾅. 과자 부서지는 소리는 사람마다 다르게 들리겠지만 생각보다 큰 소리에 깜짝 놀랄 것이다. 아, 고깔꼰은 이런 소리가 나는구나. 그 당시에는 무의식으로 넘겨 버리겠지.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길을 걷다 저 멀리서 누군가 꼬깔콘을 먹으며 걸어오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당신 귀에서는 와자작, 바사삭, 쿵쾅쾅 소리가 울려 퍼지는 착각에 빠질 것이다. 나도 하나 사먹을까 생각하며 입맛을 다시는 ‘그 순간’을 감사해라. 당신의 후각, 미각, 청각, 시각, 촉각이 모두 살아있다는 증거이니.

이전 04화 04. 버터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