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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와 모과 Oct 07. 2023

21. 사브레


여행을 좋아하고, 많이 다니기도 한다. 일주일 혹은 한 달간 머무르는 정도의 시간이라면 어느 도시든 환영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 년을 살아야 한다면 고민을 좀 해봐야 할 것 같다. 이미 생각해 둔 도시들이 있다. 그 중 한 곳이 프랑스 파리다. 


루브르 박물관은 유럽의 어느 미술관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소장품을 가지고 있다. 하루 종일 박물관을 돌아다녔지만, 그 중 몇 작품이나 제대로 봤는지 모르겠다. 나는 루브르의 거대함에 할 말을 잃었다(대영 박물관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오르세 미술관과 퐁피두 센터 역시 나중에 파리에 살면 매일 오리라 다짐했던 장소 중 하나였다. 골목마다 아름다움과 운치가 있었고 건축물마다 이야기가 있었다. 센 강을 따라 하염없이 걷는 것도 좋았고, 가판대를 기웃거리며 중고 서적을 구경하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음식이 있었다. 파리의 음식은 여러모로 놀라웠다. 민박집에서 친해진 친구 두 명과 남편과 나, 넷이서 꼬꼬뱅을 먹으러 간 적이 있다. 프랑스 가정식 요리 꼬꼬뱅은 생닭과 야채 위에 와인을 붓고 오랜 시간 졸인 음식이다. 전통 음식을 파는 유서 깊은 레스토랑을 방문했는데 들어서자마자 귀족이 된 기분이었다. 메뉴판은 프랑스어였고 괄호 안에 영어가 적혀 있었다. 


꼬꼬뱅 가격이 꽤 나갔기에 다른 음식은 저렴한 걸 골라야 했다. 카프 헤드(calf head)라 적힌 음식이 그나마 저렴했다. 우리는 송아지 머리가 편육 같은 종류일 거라 추정했다. 살짝 꺼림칙한 마음이 들었지만 다른 메뉴는 너무 비쌌다. 물도 공짜가 아니었다. 잠시 후 음식이 나왔다. 

넓은 그릇에 순대처럼 생긴 물컹한 무언가가 둘둘 감겨 있었다. 젤리처럼 투명하고 흐물흐물한 형태가 대뇌와 비슷했다. 잠시 침묵, 남편이 용감하게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카프 헤드를 한 점 잘라 입에 넣었다. 잠시 침묵, 그 날 카프 헤드를 몇 점이라도 먹은 건 남편뿐이었다. 


 다음날부터 나와 남편은 확실히 아는 음식만 먹기로 했다. 예를 들면 홍합, 리조토, 양파 스프, 오리 구이, 스테이크 같은 음식. 외국 사람이 청국장 맛보는 걸 왜 두려워하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감사하게도 파리는 빵과 디저트의 도시였다. 어디를 가건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빵과 쿠키가 넘쳐났다. 


크레페, 마카롱, 에클레르, 크로와상, 뺑 오 쇼콜라, 브리오슈, 깜빠뉴, 밀푀유, 까눌레, 다쿠아즈, 마들렌, 갈레트, 타르트. 그리고 바게트가 있었다. 종이봉투 사이로 삐죽 나온 바게트를 장바구니에 넣고 걸어가는 사람을 발견할 때마다 남편에게 속삭였다. 


“저기 좀 봐. 파리지앵 느낌 나지?” 


길거리에서 먹은 바게트 샌드위치는 그동안 바게트에게 품고 있던 편견을 모조리 깨뜨려 줬다. 바게트를 반으로 갈라 큼직한 치즈 한 장을 넣고 뜨거운 무쇠 팬에 올린 후 꾹 누르기만 했을 뿐인데 놀라운 맛이 났다. 


 1975년 해태에서 만든 사브레는 이름부터가 프랑스 느낌이 솔솔 난다. 포장지에도 파리 에펠탑이 그려져 있다. 올바른 표기는 프랑스어인 ‘사블레’로, ‘모래가 뿌려진’ 이라는 뜻이다. 설탕이 모래알처럼 반짝이는 쿠키 혹은 모래알처럼 부드럽게 녹는 쿠키가 떠오른다. 


이전에는 흰색 골판지 안에 사브레가 촘촘히 들어있었는데, 언제부턴가 골판지 대신 분할 포장으로 변경되었다. 맛도 살짝 달라졌다. 사브레가 탄생한 1975년은 이민, 유학, 출장, 친지방문 등을 제외하고는 개인이 단순 관광 목적으로는 해외에 나가기 어려운 시기였다(해외여행이 전면 자유화된 해는 대한민국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던 1989년이었다). 

국민 대다수가 비행기 한 번 타 볼 엄두를 내지 못하던 시절, 버터향이 가득한 사브레 과자는 꽤 이국적인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입천장에 한없이 달라붙는 사브레를 녹여 먹으며 외국을 상상했던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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