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가 바닥났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몸을 움직일 수 없다. 부모님 이사 준비와 이사 후 정리를 돕느라 몇 주 동안 철인처럼 일을 했더니 몸 안에 있던 기운이 몽땅 빠져나가 버렸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래도 오래 버텼다고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결혼 후 나의 ‘에너지 고갈’ 상태를 여러 번 경험한 남편은 능숙하게 혼자 아침을 차려 먹고 잎이 쳐져 보이는 화분에 물을 주고 옷을 챙겨 입은 후 출근한다. 자다가 일어나 점심은 꼭 먹고 다시 자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하루 종일 자다 깨어 바나나를 하나 까먹고 또 잠들고를 반복하며 휴식을 취했지만 여전히 힘이 나지 않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귀찮다. ‘저녁에 라면 먹자.’ 회사에 있는 남편에게 문자를 보낸다. ‘앗싸. 그럼 이따 내가 끓일께.’ 남편에게서 답장이 온다.
라면과 김치는 파전과 동동주처럼 사이좋은 한 쌍이다. 둘 중 하나만 있으면 왠지 허전하고 섭섭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라면에 김치를 썰어 넣거나 라면과 김치를 따로 따로 먹는 것조차 피곤한 날에는 라면과 김치를 결합한 김치라면이 대안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지금 남편이 끓이고 있는 라면은 김치라면이다. 오뚜기에서 나온 김치라면은 건더기 후레이크 없이 면과 스프가 전부다. 스프에 중국산 건조 김치가 포함되었는데 8.3%가 들어 있다. 상당한 양이다. 포장지는 전체가 빨간 김치색이고 하얀 도자기 그릇에는 라면이 담겨있다. 라면 위엔 대파, 느타리 버섯, 홍고추, 청고추, 생김치가 올려져 있다. 군침이 돈다. 라면이 다 끓었다. 국물을 한 입 떠먹어본다. 포장지에 적힌 대로 ‘시원 칼칼’한 김치 맛이 물씬 느껴진다. 라면을 한 입 먹어본다. 김치 맛이 느껴진다. 평범하지만 평범해서 좋은 김치라면.
김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여전히 수많은 한국인에게 김치의 존재는 너무 막강해 냉장고에 당연히 혹은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식재료이다. 잘 익은 신 김치만 있으면 냉장고에 반찬이 다 떨어져도 괜찮다. 김치찌개, 김치 볶음밥, 김치전을 해 먹으면 되니까. 어느 날인가 냉장고가 텅 비어 저녁식사로 갱죽(갱시기죽)을 끓이고 있었다.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주로 먹는 갱죽은 찬밥에 김치와 콩나물 등의 야채를 넣고 물 혹은 육수를 부어 쌀알이 풀어질 때까지 푹 끓이는 음식이다. 잘 익은 김치 냄새가 부엌을 가득 채우기 시작할 무렵 딩동 가스 점검원께서 방문하셨다. 가스 점검을 마치신 그분은 보글보글 끓고 있는 갱죽을 보시더니 ‘맛있겠어요. 남편 분은 좋으시겠네요.’ 하시며 돌아가셨다(사실 남편은 갱죽이 약간 멍멍이밥 같아 보인다며 썩 좋아하지 않는다. 같은 충청도 사람끼리 왜 이래!). 그렇다. 김치는 찬밥과 육수만 있더라도 그들과 결합하여 맛있는 음식으로 탈바꿈 할 수 있는 존재이다.
김치가 한국인의 밥상에 올라온 건 언제부터일까? 김치는 배추를 소금에 절인 것이다. 채소 절임 같은 장아찌는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나 오늘날과 같이 통배추에 마늘, 파, 부추 등 각종 양념을 넣어 절인 형태는 조선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김치는 배추김치도 있지만 무김치도 빼놓을 수 없다. 지방과 가정에 따라 담그는 방법이 워낙 다양하여 맛의 우열 또한 가릴 수가 없다. ‘김치는 써는 소리마저 모두 다를 수밖에’(임경섭 ‘처음의 맛’) 없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먹어왔던 김치가 가장 익숙하면서도 맛있는 김치일 것이다. 김치는 그 종류도 많고 맛도 다채로운데다 영양학 적으로도 매우 우수하다, 발효된 김치는 항산화 효과가 높기 때문에 나쁜 바이러스가 인간의 몸 안에 침투하는 것을 막아준다고 한다. 또한 채소에 있는 식이섬유, 비타민, 무기질 등을 그대로 섭취할 수 있기에 우리 몸을 튼튼하게 한다.
천하무적 김치를 넣어 라면을 만들었으니 대충 만들어도 기본은 한다. 김치 국물 맛이 나는 따뜻한 김치라면을 먹으니 힘이 쪼금 나는 것 같다. 힘을 내서 다시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