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외
노오란 참외를 찬물에 쓱쓱 씻어 한 입 깨문다. 결혼 전까지는 참외 껍질을 벗겨 먹었다. 바나나 껍질 까듯 그게 당연한 줄만 알았다.
참외를 통째로 베어 먹는 남편을 보며 충격을 받았다. 사과도 참외도 껍질 채 먹는 게 더 맛있다.
참외의 준말은 참오이다. 같은 박과라 맛도 식감도 비슷하다.
옛날에는 참외가 초록색이었다고 한다. 1957년 일본에서 은천 참외가 들어오며 노란색으로 바뀌게 된다.
초록보다는 노란색이 더 먹음직스러워 보이긴 하다.
참외 씨를 안 먹는 사람도 많다. 나도 참외 씨는 안 먹고 싶지만 달콤한 과육이 참외 씨와 딱 붙어 있기에 버리기 아깝다.
아삭하고 달콤한 참외는 사과를 대신해 여름 내내 식탁에 올라온다.
* 여름
여름을 좋아한다. 봄도 좋고 가을도 좋지만 여름을 이길 순 없다.
그중에서도 7월. 컴컴한 밤이 좀처럼 오지 않아 공짜 시간 쿠폰을 몇 장 받은 기분이다.
더 놀고 싶다고? 그래, 나가보자. 저녁 8시에도 밖은 환하다.
백야가 있는 도시는 하루가 이틀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가벼운 옷을 걸치고 어디든 갈 수 있다.
가디건도 머플러도 필요없다. 해수욕장도 슬슬 기지개를 핀다.
동해 바다에 왔다. 아직까지는 한적한 바닷물에 발을 담근다. 적당한 온도다.
뛰어들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해안가를 걷는다. 당장 갈아입을 옷이 없으니까.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는 어른이 되어 버렸다.
* 식물
식물이 쑥쑥 자란다. 잎사귀 커지는 게 실시간으로 눈에 보일 정도다. 새 잎이 나오고 또 나온다.
베란다가 정글이 되어간다.
대장은 애플민트다. 잡초보다 강하다. 자잘한 잎사귀를 아래 위 옆으로 거침없이 확장하고 번식하며 영토를 확보중이다.
부대장은 몬스테라. 잎사귀는 몇 개 없지만 몸집으로 대결하는 아이다. 잎사귀를 넓게 펼치며 다른 식물에게 시비를 건다.
가장 큰 잎사귀의 지름은 38cm, 우리 집 골리앗이다.
‘정글 숲을 걸어서가자. 성큼 성큼 걸어서가자. 엉금엉금 기어서가자. 악어떼가 나온다. 악어떼.’
악어떼는 없지만 꼬물거리는 벌레는 많다. 쌀알 반의 반의 반만한 벌레가 활기를 친다. 날파리도 마찬가지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 든다. 화단에 소리 없는 아우성이 가득하다.
* 에어컨
밤에 자다가 더워 계속 깬다. 선풍기 바람만으로는 잠이 오지 않는다.
에어컨을 튼다. 27도로 맞춘다. 올해는 무더위가 일찍 왔다. 한낮에 36도까지 올라간다.
에어컨이 돌아가는 도서관이 모처럼 북적인다. 사람들이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다.
카페와 식당은 시원하다 못해 서늘할 정도다. 추위를 많이 타는 엄마는 여름엔 식당가는 걸 무서워한다.
에어컨 바람이 싫은 건 나도 마찬가지다. 에어컨 없이 보낸 여름도 몇 번 있었다.
서울에서 처음 신혼 생활을 시작하고 몇 년, 경기도로 이사 하고 몇 년 동안은 에어컨을 사지 않았다.
에어컨 없이 버텨보자. 대학생 때까지는 에어컨 없이도 살았는데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에어컨 없는 한여름 밤은 괴로웠다.
카페로 피신해 늦은 밤까지 팥빙수를 먹어야 했다. 밤새 더위에 시달리면 파김치처럼 몸이 늘어졌다. 손바닥에 땀띠가 나기도 했다.
에어컨 없이 살겠다는 두 번의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겸허한 마음으로 신기술을 받아들였다.
지금 사는 집에는 안방에만 에어컨이 달려 있다.
거실에서 자연 바람과 선풍기 바람으로 더위와 싸우다 여름 막바지에 무더위가 총공격을 시작하면 에어컨을 튼다.
에어컨을 틀자마자 쾌적함이 몰려온다. 정신이 말똥말똥해진다. 뭐라도 의욕적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다음에는 무풍 에어컨을 사고 싶다.
* 수박
올해 첫 수박을 샀다. 특정 카드를 사용하면 3천원이 할인된다. 내겐 없는 카드다.
왠지 억울해서 좀 더 기다렸다. 여름이 깊어질수록 수박 가격은 내려가니까. 일주일이 지나도 특정 카드만 할인한다.
그냥 샀다. 7kg에 19700원. 수박 한 통에 2만원인 시대에 살고 있다.
어렸을 땐 트럭에서 파는 수박이 500원이었다. 크기는 작았다. 속이 말짱한 것도 있었지만 썩은 것도 있었다. 복불복. 망할 확률이 50%나 됐다. 오백원보다는 천 원짜리 수박을 사는 게 안전했다.
‘수박 수박이 나왔어요. 시원한 수박이 천원이에요. 내일은 못 사요. 빨리빨리 나오세요. 내일은 못 사요. 다 떨어집니다.’
어디서 배운 노래인지 모르겠다. 아빠와 트럭에서 수박 한 통을 들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부른 노래다.
30년이 지났지만 수박을 볼 때마다 여전히 노래를 부르게 된다.
* 여름성경학교
교회 여름성경학교가 시작되었다. 아이들에겐 신나는 날이지만 선생님들에겐 두려운 날이다.
준비해야 할 일이 많다. 공과를 연구하고, 시연하고, 특별 활동을 준비하고, 예배당을 꾸미고, 아이들을 독려하고, 자잘한 일들을 처리해야 한다.
성탄절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행사라 다들 열심을 낸다.
나는 1학년 아이들을 맡았다. 우리반은 10명이다. 여름성경학교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우리 반이 속한 2팀이 공동체 활동에서 3승 1패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각 코스 활동이 끝날 때마다 이긴 팀은 맨토스 2개를 선물로 받는다. 진 팀은 1개다. 수아가 뛰어오며 말한다.
“선생님, 저 사탕 6개나 모았어요.” 수아 눈빛이 자부심으로 반짝거린다. 온몸에서 뿜어내는 환희의 에너지가 내게도 전달된다.
그 마음 알아. 선생님도 35년 전 여름성경학교 선물로 동물 모양 지우개를 받았을 때 기쁨이 여전이 생생하거든.
* 방학
교회 오는 아이들 표정이 가볍다. 공과가 끝나고 아이들과 과자 파티를 했다.
명색은 파티지만 과자는 네 종류밖에 없다. 칸쵸, 고래밥, 초코송이. 바나나킥. 아이들 기호에 맞춰 신중하게 골랐다.
평소라면 맹렬한 속도로 과자를 집어먹을 텐데 오늘따라 느긋한 표정이다.
아이들은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다. 계곡으로, 바다로, 할머니 집으로 놀러간다고.
자랑도 하고 과자도 먹어야 하니 과자 부스러기가 사방에 흩어진다. 잠깐만 얘들아, 한명씩 말해줄래?
이제 남은 건 칸쵸 몇 알 뿐이다. 미묘한 긴장이 흐른다.
아이 한 명이 칸쵸 한 개를 집는다. 다른 아이도 한 개. 이제 두 알 남았다.
마지막 아이가 칸쵸 두 알을 집는다. 옆 친구에게 한 알을 건넨다. 친구는 고맙다고 말하며 공손히 손을 내민다.
다 방학 덕분이다. 아이들 마음이 말랑하다 못해 녹아내리고 있다.
* 냉면
여름이 깊어갈수록 냉면 유혹도 더해간다. 한 그릇에 만원이 훌쩍 넘는다. 그깟 면을 만 원이나 주고 먹는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냉면을 향한 마음은 점점 커진다. 사리와 육수를 사서 집에서 해먹기도 하지만 식당에서 먹는 맛만 못하다.
참고 참다 냉면집을 방문한다. 여름만 되면 동네 코다리 냉면집은 하루 종일 붐빈다.
저녁 시간 전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는다. 나는 비빔냉면, 남편은 물냉면을 시킨다. 매번 그렇다.
각자가 시킨 냉면을 먹다가 그릇을 바꿔 상대방 냉면을 맛본다. 마지막에 다시 그릇을 바꿔 마무리한다.
옆 테이블에선 면발 삼키기 대회라도 열린 듯하다. 후르륵 꿀꺽 후르륵 꿀꺽 소리 몇 번이면 끝이다.
내가 면을 비비고 있는 동안 다 먹은 청년도 있다.
나와 남편은 먹는 속도가 느리다. 학창 시절에도 남편은 친구들이 도시락을 다 먹고 운동장에 나가 뛰놀 때 혼자 남아 밥을 꼭꼭 씹어 먹었다.
우리는 천천히 면발을 삼키며 여름을 느끼는 중이다.
* 장마
장마가 시작되었다. 작년보다 일주일이 늦다. 땅을 향해 조준. 비가 맹렬하게 내리꽂는다. 학의천 물이 순식간에 불어난다. 양동이로 들어붓던 비가 언제 그랬냐는 듯 뚝 그치기도 한다.
비가 그쳤다고 우산 없이 나가는 순간 비는 다시 쳐들어온다. 돌격.
몇 년 전부터 비가 스콜 형태로 변했다. 동남아성 기후로 바뀌고 있다.
천변 돌다리가 물에 잠겼다. 출입을 막는 노란 테이프가 천을 내려가는 입구마다 붙어 있다.
당분간은 산책을 할 수 없다.
제습기를 돌려 빨래를 말린다. 하루 종일 비가와도 빨래는 마른다. 이 시대에 태어난 게 축복이다.
지인들은 건조기를 쓴다.
옛날에는 장마철에 어떻게 빨래를 말렸을까? 덜 마른 옷에서 나는 냄새가 끈질기게 코로 들어올텐데.
작은 천에 페퍼민트 오일을 한 방울 떨어뜨려 화장실과 방안에 놓는다.
아침인지 저녁인지 모를 날들이 이어진다. 빗소리를 들으며 먹고 또 먹는다.
설탕 과다 섭취. 뱃살 과다 증가. 유일하게 좋은 건 빗소리다.
창밖을 바라보며 빗소리를 감상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있을까.
희미한 빗소리가 새벽 잠을 깨우기도 한다. 투둑 투둑. 잠결에도 입꼬리가 올라간다.
빗소리는 아늑하고 아침은 멀리 있으니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