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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와 모과 Sep 10. 2024

9월


* 가을 초입  


가을이 문턱에서 서성인다. 할아버지는 어린 우리들이 문지방을 밟을 때마다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복 날아간다. 밟지 말라.” 

문지방을 떡하니 밟고 있는 가을을 보니 심기가 불편해진다. “복 날아간다. 다음에 오거라.” 

9월은 대기가 따뜻한 공기에서 차가운 공기로 바뀌는 시기다. 북쪽에서 한랭 건조한 공기가 내려와 고온 다습한 공기를 남쪽으로 밀어내기 시작한다. 공기 맛이 달라지고 있다. 

여름 끝자락을 잡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떠나는 마음 잡을 수 없다.           



* 알밤  


부모님과 맑은숲속공원에 갔다. 늦더위라 한낮에는 30도까지 기온이 오르지만 숲속은 시원하다. 

알밤이 무르익는 계절이다. 떨어진 알밤은 이미 누군가 쏙 빼어갔다. 도토리도 마찬가지. 도토리 껍질만 뒹군다. 

이 많은 도토리와 알밤은 누가 가져갈까? 엄마가 알려준다. 

“성균관대 언덕에 밤나무 많잖니. 알밤 떨어질 때 되면 할머니들이 새벽 2시에 나오셔서 싹 주워 간다더라.” 아하. 부지런한 사람이 알밤 줍는 법. 

밤은 오독오독 생으로 먹어도 맛있지만 껍질 벗기는 게 힘들어 쪄먹는 걸 선택한다. 

올해 마음먹고 보늬밤을 만들었다. 보늬는 속껍질을 뜻한다. 알밤 겉껍질만 살짝 벗겨 불리고 삶고를 반복한 후 설탕에 조려 만드는 수고로운 디저트다. 

조리기 전 잔털과 심지를 한번 더 확인해야 한다. 남편은 2시간 동안 겉껍질을 벗겼다. 끝내고 나니 가만히 있어도 손이 떨린다고 했다. 그에 비하면 나머지 과정은 수월했다.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보늬밤은 한번으로 만족하련다. 남편 손이 더 소중하다.   

    


   

* 무화과  


석류를 닮은 무화과 한 박스를 샀다. 이란에서 온 말린 무화과도 좋아하지만 한국의 생 무화과를 따라올 수는 없다. 

한국 무화과의 60% 이상은 전남 영암군에서 생산한다. 가을 한 철 잠시 나오는 귀한 과일이다. 

섬세하고 연약한 아이라 한 알 한 알 조심히 다뤄야 한다. 흐르는 물에 살살 씻은 후 꼭지 부분을 손에 들고 한 입씩 베어 먹는다. 

은은하면서도 깊은 단맛. 오묘한 빛깔. 겉모습은 소박하다. 단면을 자르면 꽃이 내부에서 피어난 듯 화려한 모양새다. 

무화과는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유실수이자 축복의 선물로 종종 비유된다.  

반전 매력을 가진 무화과는 요리의 세계에서 조연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올해는 호텔이나 디저트 가게에서 무화과가 그간의 설움을 딛고 주연으로 활동하고 있다.          


 

* 빨래  


햇살이 들이친다. 가을 햇살이다. 바람이 분다. 습도가 낮고 볕이 좋은 날엔 어김없이 빨래 생각이 난다. 빨래하기 좋은 날이네. 

아침 일찍 엄마가 전화를 했다. “햇살이 너무 좋아서 이불 빨래하려고.” 

문득 궁금해진다. 남자들도 같은 생각을 할까? 

남편에게 카톡으로 물어본다. 답장이 온다. ‘그런 생각은 안 해 봤는데.’ 

빨래하기 좋은 날이니 빨래를 하기로 한다. 겨울잠을 자게 될 여름옷을 1차 선별해 손빨래를 시작한다. 

과탄산수소와 빨래비누를 따뜻한 물에 풀고 옷을 잠시 담가 둔 후 손으로 주무른다. 빨래한 옷을 세탁기에 넣고 헹굼 1회, 탈수를 세게 돌리면 끝이다. 

목욕을 끝내고 뽀송뽀송해진 옷들을 하나씩 옷걸이에 걸어 베란다로 보낸다. 여름옷은 눈부신 햇살을 맞으며 꾸벅꾸벅 졸기 시작할 거다. 햇빛 냄새가 베일 것이다.      


     

* 홍로  


오아시스에서 햇사과인 홍로를 주문했다. 사과 모양이 울퉁불퉁 짱구같다. 

사과를 반으로 가르니 꿀이 점점이 박혀있다. 얼마 만에 보는 꿀사과인지. 하얀 과육에 멜론색 꿀이 듬뿍 들어있는 사과가 사랑스럽다. 

더운 여름을 이겨내며 사과의 마음이 응축되었다. 아삭아삭한 사과 한 알을 통째로 먹으며 올해 홍옥은 또 얼마나 맛있을까 생각한다.           



* 가을비  


새벽부터 비가 올 듯 말 듯 뜸을 들이더니 마침내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가을비답게 쓸쓸하고 차분하다. 

비가 오자 기온이 뚝 떨어진다.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사람들도 긴팔 차림이다. 

어제 밤 산책할 때만 해도 더웠는데. 비가 오니 몸이 무겁다. 자도 자도 피곤하다. 

계절이 바뀌어 그런 건지 나이가 들어 그런 건지 헷갈린다. 

우산을 쓰고 산책을 나간다. 투둑 우산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가 묵직하다. 

물이 튈까 조심조심 걷는 내 옆으로 빨간 장화를 신은 아이가 저벅 저벅 지나친다. 

아직까지 나뭇잎은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다. 힘을 내어 오늘을 살아봐야겠다.          



* 재즈  


사당 근처에 약속이 있어 지하철을 타야 한다. 오랜만에 반가운 친구를 만난다. 

책을 한권 챙겨 가방에 넣으려다 생각을 바꾼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가기로 한다. 

핸드폰으로 영화 <소울> OST 중 ‘It's all right’을 검색한다. 

음악을 들으며 학의천을 따라 지하철역까지 걸어간다. 뉴욕 거리를 신나게 뛰어가는 주인공 조 가드너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Now everybody clap your hands’ 가사를 들으며 박수를 치고 ‘it's all right' 노랫말을 흥얼거린다. 

모든 게 다 잘 될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솟아난다. 재즈 듣기 좋은 날이다.   


        

* 고구마  


고구마 시즌이 돌아왔다. 고구마는 촉촉한 호박 고구마파와 뻑뻑한 밤 고구마파가 있다. 나는 밤 고구마파다. 고구마는 추위에 약하다. 따뜻한 곳에 보관하지 않으면 썩어버린다. 추위를 싫어하는 나는 고구마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고구마는 생으로도 먹는다. 텁텁하면서도 아삭한 맛이 있다. 구워 먹는 게 가장 맛있다. 

오븐에 구운 밤고구마 속살이 레몬껍질처럼 샛노랗다. 껍질 째 한입 베어 먹으니 목이 꽉 멘다. 이게 바로 밤고구마 맛이지. 

건빵에 별사탕이듯 밤고구마엔 백김치가 어울린다. 냉장고엔 깍두기밖에 없다. 깍두기라도 먹어야겠다.          


* 감기  


아침저녁으로 기온차가 나기 시작하니 남편이 콧물을 훌쩍이기 시작한다. 남편은 기관지가 약해 환절기 때마다 몸이 바로 반응한다. 

그렇게 육신이 약해 어떡하냐고 걱정하다 나만 홀랑 감기에 걸려 버렸다. 황당하다. 

목이 따끔하고 몸이 쑤신다. 소파와 침대에 누워 시간을 하염없이 흘려보낸다. 감기에 잘 안 걸리는데 올해는 방심하는 사이 된통 당했다. 

주변에도 감기 환자가 넘쳐난다. 가을 햇살이 약 올리듯 방안으로 쳐들어온다. 

가을바람도 살랑거리며 종아리와 팔뚝을 어루만지다 사라진다. 속절없이 좋은 날들을 떠나보내는 중이다. 


          

* 국화  


노란 국화 한 다발을 샀다. 매일 꽃병 물을 바꿔주고 며칠에 한번 줄기 끝을 사선으로 잘라주면 한 달은 싱싱하다. 

봄에는 프리지아 한 단, 가을에는 국화 한 단으로 계절의 바뀜을 기념한다. 

꽃 사는 건 어쩌다 한번 누리는 사치다. 비싸기도 하거니와 집에 초록 식물이 워낙 많아 그 아이들 관리도 벅차다. 

꽃가게 앞을 지나며 아름다운 꽃들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내게 꽃은 사치품이지만 과일은 필수품이다. 

며칠 전 용만이와 대화를 나누다 물가 상승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친구는 장바구니 물가가 너무 올랐다고 했다. 

나도 요즘 과일 값이 너무 올라 장 볼 때마다 돈이 많이 든다고 하니 용만이가 말했다. 

“과일은 필수품이 아니잖아. 안 먹어도 되잖아.” 

참고로 친구의 필수품은 담배였다.     


     

* 가을산책  


남편이 건강검진을 받는 날이다. 회사에서 복지차원으로 제공하는 거라 출장으로 등록된다. 

반나절이면 검진이 끝난다. 매년 가는 병원이 선릉역 근처라 끝나는 시간에 맞춰 근처 카페에서 기다린다. 

최고 온도는 25도. 걷기 좋은 날이다. 테헤란로가 한적하다. 선릉역에 왔으니 선릉에 가기로 한다. 

선릉은 조선 9대 성종과 세 번째 완비 정현왕후의 능이 있는 유적지다. 도시 한복판에 거대한 능과 푸른 숲이 선물처럼 놓여 있다. 

느긋하게 능 주위를 둘러본다. 입구에 ‘도토리를 줍지 마시오’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남편이 묻는다. “그럼 상수리는 돼?”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를 통칭해서 참나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참나무에 속하는 나무는 상수리, 굴참, 갈참, 졸참, 떡갈, 신갈나무가 있다. 이들 나무에서 나는 열매는 모양은 달라도 전부 도토리다. 

도토리는 다람쥐에게 양보하자.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일 년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환상적인 날씨다. 

좀쉬땅나무, 병아리꽃나무, 오리나무, 두층, 단풍나무. 산수유, 때죽나무. 쥐똥나무. 신나무, 소나무 곁을 지나간다. 

능 곳곳에 나무 의자가 놓여 있다. 까치 한 마리가 쪼르르 날아와 산딸나무 열매를 파먹기 시작한다. 

울퉁불퉁한 열매는 빨갛게 익어가는 중이다. 까치는 배가 부른지 금세 날아간다. 

다른 새 한마리가 와서 열매를 콕콕 찍는다. 열매 몇 알이 땅에 떨어진다. 

가만 보니 배가 고파 먹는다기보다는 심심해서 먹는 듯하다. 사과를 베어 먹듯 열매 한 알을 열심히 공략하더니 무심하게 날아간다.           



* 계절 옷 정리 


매년 4월과 9월이 되면 대대적인 옷장 정리를 한다. 우리 집엔 작은 붙박이장이 두 개 있다. 아파트가 지어질 때 기본으로 들어가는 옷장이다. 

작은 방 옷장에서 가을옷과 겨울옷을 꺼내 안방 옷장으로 옮긴다. 안방 옷장에 있던 봄옷과 여름옷은 작은 방 옷장으로 이동한다. 

더 이상 입지 않는 옷을 추리고 꺼낸 옷은 빳빳하게 다림이질을 한다. 바느질 할 곳이 없는지도 살핀다. 

매년 옷장을 정리할 때마다 옷장을 하나 더 살까 하는 유혹에 시달린다. 

지금까지 비교적 적은 옷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 공간을 늘리는 대신 옷을 옷걸이 개수에 맞춘다. 옷걸이에 옷을 걸려면 옷을 하나 살 때마다 입지 않는 옷을 하나 버려야 한다. 

옷 구매가 신중해진다. 가을 옷 정리는 하루가 꼬박 걸리는 노동이지만 그 다음날부터는 찬바람도 무섭지 않다. 

언제든 꺼내 입을 수 있는 가을 옷과 머플러가 잘 다려진 채 제자리에 놓여 있다.   


        

* 송편  


추석 전날이다. 동네 주민들이 가게 앞에 길게 줄을 섰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가까이 가보니 떡집이다. 

가게를 들여다보니 커다란 소쿠리에 보라색 노란색 연두색 분홍색 흰색 송편이 가득 담겨 있다. 크기와 모양이 동일하다. 

동네 떡집 두 군데 모두 줄을 서야 한다. 앞집도 옆집도 똑같은 맛이 나는 송편을 먹겠구나. 

어릴 적엔 할머니 댁에서 다 같이 모여 앉아 송편을 만들었다. 

밤, 깨, 콩을 넣어 가지각색으로 빚은 후 솔잎과 함께 찜기에 쪄냈다. 송편은 쫄깃했고 솔잎향이 은은히 배어있었다. 

지금은 어디서도 어릴 적 송편 맛을 찾을 수 없다.  


         

* 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밝은 연둣빛이 도는 샤인 머스캣을 볼 때마다 이육사의 시 ‘청포도’가 떠오른다. 

하얀 모시 수건 옆에 놓인 청포도 이미지가 단번에 그려진다. 

샤인 머스캣은 청포도 품종의 하나다. 청포도보다 알이 크고 껍질이 얇아 통째로 먹는다. 씨가 없고 당도도 높아 청포도계의 거봉이라 할 수 있다. 

수년 전 샤인 머스캣이 마트에 처음 등장했을 때 가격은 포도 한 알 당 500원 꼴이었다. 샤인 머스켓을 좋아하는 조카에게 몇 번 사다 바쳤다.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수요가 줄지 않자 농장마다 샤인 머스캣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올해는 바야흐로 샤인 머스캣이 풍년을 맞아 가격이 대폭 하락했다. 

고향 내려가는 자식들 손에 샤인 머스캣이 한 박스씩 들려 있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쉬운 건 맛이 예전만 못하다는 거다. 껍질은 더 두꺼워졌고 당도도 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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