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
민달팽이. 잎이 무성한 계수나무. 와인빛 억새풀. 보라빛 토끼풀. 주렁주렁 감이 달린 감나무. 통통해진 수크령. 노란색 꽃삔을 꽃은 강아지. 10월 첫 날 학의천과 안양천을 산책하며 눈으로 건진 수확물.
* 감
아파트 단지에 심겨진 감나무에 감이 달렸다. 매일 지나는 길인데 언제 자란 걸까?
도시에서는 과실수가 흔치 않아 평범한 감도 특별해 보인다. 열매도 큼지막한데다
가을을 닮은 고운 주황색이라 나무 주변을 서성이게 된다.
똑같은 생선이지만 상태에 따라 명태, 생태, 동태, 황태, 북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처럼 감에게도 여러 이름이 있다. 단감, 반시, 홍시, 곶감, 감말랭이가 그것이다.
각기 개성 있는 맛이지만 그중에서도 곶감을 좋아한다.
시아버님은 매년 떫은 감을 깎아 줄줄이 엮어 현관에 매달아 놓는다. 감은 차가운 바람과 가을 햇살을 받으며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한다.
60일 정도 지나면 하얀 당분이 표면으로 올라오며 곶감으로 변하는데 둘이 먹다 한 명이 사라져도 모를 정도로 맛이 좋다.
큰형님 대봉감도 빼놓을 수 없다. 11월이 되면 베란다에 대봉시를 조로록 늘어놓는다.
아침마다 감이 익었는지 살짝 눌러본다. 기다림이 초조하다.
잘 익은 대봉감을 반으로 갈라 나눠 먹을 때의 기쁨. 그 맛을 보려면 아직 한참 기다려야 한다.
* 가을소풍
소풍 시즌이다. 부모님과 가끔 산책하는 밤밭 청개구리공원 뒷산에 유치원에서 소풍 나온 아이로 가득하다. 산길 공터마다 게임이 준비되어 있다. 도토리 나르기, 풀싸움 놀이, 자연물로 얼굴 꾸미기, 도토리 던지기로 마무리 되는 코스다.
잎새반, 열매반, 꽃잎반, 새싹반이 출동했다. 선생님들이 나무둥치 곳곳에 가랜드를 달아 놓았다.
‘열심히 올라온 너희들이 최고야.’ ‘아자아자 힘내라!’ 문장이 적혀 있다.
씩씩하고 다정한 아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산을 오른다.
뒷산은 모처럼 귀한 손님을 맞아 신이 났다. 아이들이 다치지 않게 땅을 부드럽게 풀고 날카로운 가지를 뒤로 감추었다. 햇살이 적절하게 들어오도록 빛의 양을 조절하고 잎사귀에 윤기를 더했다.
* 배
돈 주고 사기 꺼려지는 과일 중 하나가 배다. 맛있는 배를 찾기 어렵다. 친구가 올해 배는 다르다고 했다.
사실인가 싶어 하나로 마트에서 배 한 박스를 주문했다. 과연 다르다. 과즙이 많고 달콤하다.
올해는 사과 값이 배 값과 비슷하다. 사과는 흉년이고 배는 풍년이다. 사과 대신 배를 실컷 먹어야겠다.
맛있는 배가 없다고 투덜대긴 했지만 한국 배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 해외로 가장 많이 수출하는 과일이 바로 배다.
서양 배는 조롱박처럼 작고 길쭉한데 깜찍한 생김새와는 달리 맛이 없다. 배는 요리할 때도 유용하다.
불고기나 LA 갈비를 재울 때 주로 넣는다. 고기를 부드럽게 하고 당도를 더해주는 역할을 한다.
배가 가장 빛날 때는 냉면과 함께 할 때다. 면발 위에 얇게 채 썰린 배 조각이 살포시 올라가 있는 냉면 한 그릇을 떠올려 보라. 돌탑을 쌓은 듯 아름답지 않은가.
* 단풍
데이비드 소로우가 말한 것처럼, 꽃단풍나무 잎들은 “우리 언제쯤 빨개지기로 할래?” 귓속말을 속삭여 왔다. 합의가 다 되었는지 설악산은 붉게 물들었다.
남쪽에서부터 물감이 번지듯 단풍이 물들며 올라온다. 우리 동네 나무도 울긋불긋 빨개지고 있다.
엽록소로 가득했던 식물 잎은 겨울이 다가오면 광합성 작용을 중단한다.
초록색 엽록소가 사라지면 그 잎이 원래 지니고 있던 색상이 드러난다. 노랑, 주황, 빨강색이 많다.
은행나무 잎이 쇠라의 점묘법처럼 점점이 찍혀 있다.
노란 은행잎이나 빨간 단풍잎을 코팅 한 후 친구에게 나눠주던 시절은 지나갔지만 길가에 떨어진 고운 나뭇잎을 그냥 지나치기는 어렵다. 하나 둘 주워 책 사이에 끼워 넣는다.
낙엽 이불을 덮은 아스팔트길은 포근해 보인다.
주말에 고속도로 휴게소는 단풍놀이를 가는 관광버스로 가득하다. 단풍처럼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이 보기 좋다.
꽃 피는 계절에는 꽃놀이를 가고, 단풍 물드는 계절에는 단풍 구경을 가고. 그렇게 살면 좋겠다.
* 춘천 마라톤
아마추어 마라토너에게 10월은 특별하다. 춘천 마라톤이 열리기 때문이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마라토너가 우승했다. 10년 뒤인 1946년 10월 27일, 세계제패기념으로 조선일보사에서 마라톤을 창설했다.
1991년 춘천으로 코스를 이전한 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춘천 마라톤은 한국을 대표하는 마라톤 행사다.
붉게 물든 삼악산을 병풍 삼고 춘천 의암호 둘레를 돌 수 있기에 매년 수많은 이들이 마라톤에 도전한다.
올해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10km코스와 42.195km 풀코스 중 하나를 선택해 달릴 수 있다.
마라톤을 출전하는 다양한 사연들이 있다. 시력 잃은 남편 손을 잡고 함께 뛴 아내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남편 박씨는 2009년 급성 녹내장 진단을 받은 후 서서히 시력을 잃어 2016년 실명했다.
마라톤이 취미였던 아내 김씨는 남편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남편 손을 잡고 함께 달리기 연습을 시작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풀코스를 완주했는데 올해 기록은 6시간 10분 26초. 그들의 목표는 시간 단축이 아니라 완주라고 말한다.
나도 녹내장이 있기에 사연을 읽으며 절로 감정이 이입된다. 포기하지 않고 완주하는 삶을 살아내고 싶다.
* 붕어빵
붕어빵 냄새가 유혹적이다. 우리 동네는 붕어빵 파는 노점이 두 군데 있다. 쌀쌀해지니 절로 고개가 돌아간다. 옛날에는 달콤한 간식을 파는 곳이 드물었다. 붕어빵이나 호떡이 유일한 군것질거리였다.
그러다 카페가 생겨나고 각종 디저트를 언제든 먹을 수 있게 되자 붕어빵과 호떡은 자연스레 수요가 줄었다. 요즘은 붕어빵 파는 곳을 찾기 어렵다.
붕세권이라는 단어도 생겨났다. 붕어빵 파는 노점을 알려주는 앱도 있다.
세월이 흐르며 붕어빵도 진화했다. 팥과 슈크림이 든 붕어빵이 전부였는데 요즘은 붕어 안에 고구마 무스도 넣는다. 크루아상으로 반죽한 붕어빵을 팔기도 한다. 꼬마 붕어빵도 있다.
가격은 비싸졌다. 여섯 마리에 천 원이던 시절이 있었나 싶다. 그때는 호떡도 한 장에 백 원이었다.
지금 우리 동네는 두 마리에 천 원을 받는다. 붕어빵을 머리부터 먹어야 할지 꼬리부터 먹어야 할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나는 항상 팥이 들어있는 머리부터 먹는다.
* 은행
길가에 은행이 잔뜩 떨어졌다. 꼬릿꼬릿한 냄새가 풍겨온다. 지뢰밟기 게임이 시작되었다.
잘못 밟으면 끝이다. 끈질긴 냄새가 영원히 따라온다.
오래전 부모님이 산에서 은행을 잔뜩 주워 차에 실은 적이 있다. 그 뒤로 반 년 동안 차에서는 구린내가 났다. 고약한 냄새를 보상하듯 잘 구운 은행 열매는 정말 맛있다. 쫀득쫀득하고 고소해서 계속 집어 먹게 된다.
은행은 혈관을 튼튼하게 하고 면역력을 강화한다. 그렇다고 한 번에 너무 많이 먹지는 말자. 독성물질이 있다.
매년 시어머님은 손으로 껍질을 일일이 깐 은행을 한 봉지씩 보내주신다.
올해도 통통하고 실한 은행 알을 선물 받았다. 은행을 주워 본 적도 없는 나는 미안하고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