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가
휴가 시즌이다. 아이들 학원 방학에 맞춰 휴가를 떠나는 가정이 많다. 바다로, 계곡으로, 할머니 집으로 출발.
주요 고속도로가 휴가차량으로 꽉 막혀 있다. 온 가족이 짐을 싣고 떠나는 모습이 정겹다.
부모는 금세 지치겠지만 신이 난 아이 표정을 보며 다시 힘을 내겠지. 아이에게는 몇몇 풍경이 남을 거다.
모래성을 쌓거나 노란 튜브 안에서 둥둥 떠 있던, 홀딱 젖은 채로 라면을 먹는, 별것 아닌 장면이 몸과 마음에 새겨질 거다. 우리는 추억을 남기러 떠난다.
집 앞 공원과 학의천은 한적하다. 유모차도 자전거도 보이지 않는다. 아침인데도 운동하는 사람 하나 없다.
설마 나만 모르는 국제적 이벤트가 있는 건 아닐까?
학의천에 사는 동물도 자취를 감추었다. 너희도 휴가 갔니?
연미복을 입은 푸른 꼬리 물까치와 4계절 내내 둥둥 떠 있는 청둥오리도 보이지 않는다.
고요해서 조금은 쓸쓸한 학의천을 걷는다.
* 복숭아
카카오톡 캐릭터 어파치를 닮은 백도 복숭아를 한 박스 샀다. 올해 복숭아는 비싸다. 장마가 길어져 과일 가격이 폭등했다. 몇 주가 지나도 가격은 변함없다. 9개에 25800원.
탕수육에 부먹파와 찍먹파가 있듯 복숭아도 말랑이파와 딱딱이파가 있다. 난 말랑이파다. 말랑이 복숭아를 사도 충분히 말랑해지려면 며칠 더 걸린다.
아침저녁으로 복숭아 표면을 살짝 누르며 잘 익었는지 확인한다. 복숭아는 천천히 익어간다. 풍부한 과즙, 부드러운 식감, 향긋한 과일 향, 아름다운 빛깔. 완벽한 과일이다.
코로나에 걸렸을 때 미각을 거의 잃었다. 그때 먹은 복숭아는 오로지 쇠 맛만 났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복숭아를 베어 물며 쇠 맛이 사라지기를 기도했다. 2주 만에 복숭아 맛이 났다.
여름이 올 때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복숭아와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수박을 서로 경쟁하듯 먹어치운다.
수박 7통, 복숭아 8박스. 작년엔 내가 이겼다. 올해는 복숭아 스타트가 늦어져 어찌될지 모르겠다.
* 매미
매미가 울기 시작했다. 올해 매미는 다 어디로 갔는지 궁금하던 찰나였다. 대한민국에 사는 매미는 대략 14종이다.
매미는 알과 애벌레를 거쳐 성충이 된다. 애벌레 상태로 사는 기간이 3년에서 길게는 17년 정도라고 한다.
오늘 아침 성충이 되어 처음 소리를 내는 매미도 있을 거다.
매미들 떼창 소리가 여기저기 울려 퍼진다. 기온이 높을수록 때창 확률이 높아진다.
수컷 매미가 노래하는 건 짝을 찾기 위해서다. 몸 안의 울음통을 울려 소리를 낸다.
요즘은 4시 50분에 일어난다. 물을 끓이고 차를 우려 탁자 위에 앉으면 5시. 노트북을 켜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서서히 집중도가 올라갈 무렵 매미 소리가 들린다. 맴 매앰 맴. 205동 앞 나무에서 살고 있는 매미다.
정확히 5시 27분에 운다. 가장 먼저 눈 뜬 매미가 우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웃음이 나온다.
매미도 나도 성공적으로 하루를 시작했다는 기분이 든다. 여름에는 글쓰기 딱 좋은 온도가 새벽이다.
글쓰기를 향한 내 사랑은 매미 소리로 보답 받는다.
* 사과
아침 식탁에 빠지지 않는 과일이 있다. 사과다.
여러 품종 중 홍옥을 가장 좋아한다. 새콤달콤한 홍옥은 나오는 기간이 짧아 부지런히 먹어야 한다. 찾기도 어렵다.
그 다음은 홍로와 양광이다. 부사는 저장성이 좋아 초봄까지도 맛있게 먹는다.
늦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두 달 정도는 사과를 사지 않는다. 묵은 사과라 영 맛이 없다.
사과가 그리워질 때쯤 아오리 사과가 등장한다. 멜론처럼 부드러운 색감이다.
아오리 사과는 일본 아오모리에서 '골든 딜리셔스'와 '홍옥'을 교배하여 만든 품종이다.
아오리는 여름을 닮아 싱그럽다. 식탁 위에 올려만 놓아도 기분이 좋다. 아오리 사과는 여름이 곧 떠나니 지금을 즐기라는 지표가 되어준다.
* 입추
가을 문턱에 서 있다. 살랑 살랑 불어오는 바람에서 가을 냄새가 희미하게 느껴진다. 가로수 잎사귀는 아직 푸르다. 이제 무더위는 꺾일 거라는 둥, 금세 겨울이 올 거라는 둥 말들이 들려온다. 나는 너를 보내지 않겠다. 남쪽에서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 태풍 전야의 하늘은 시간을 따로 내어 지켜봐야 한다.
아침부터 양떼들이 떼로 몰려왔다. 고적운이다. 높쌘구름이라고도 한다. 빼곡하게 들어찬 양떼구름을 보며 감탄한다.
낮이 되면서 양들은 조금씩 편을 나눠 각자 갈 길을 간다. 웅성거리며 한데 모여 있는 양들도 있고 홀로 떨어져 풀을 뜯는 양도 있다. 사람 사는 세상과 비슷하다.
노을이 진다. 태양이 양털에다 오렌지색과 회색을 뭉텅 뭉텅 묻힌다.
윌리엄 터너가 커다란 붓을 들고 쓰윽쓰윽 하늘을 칠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림 같은 하늘 풍경이 완성되었다. 바야흐로 폭풍전야다.
* 태풍
태풍이 올라오는 중이다. 제주도를 지나 부산을 지나 강원도를 지나 수도권으로 북상중이다. 빗방울이 굵어진다. 하늘이 번쩍번쩍한다. 소리 없는 번개다. 바람이 분다.
집 앞 작은 공원 나무들도 헤드 뱅잉을 시작했다. 누가 잘 흔드나 경쟁이 붙었다. 쉬잉, 쉬잉. 바람이 베이스를 깐다.
천둥은 무대 뒤에서 준비 중이다. 우산을 방패처럼 단단히 쥔 사람들이 공연을 방해하지 않으려 조심하며 공원을 지나간다.
나는 아파트 5층 VIP 석에 앉아 있다. 무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관람료는 공짜다. 공연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수도권으로 들어오며 태풍 세력이 약해졌다. 태풍 피해를 줄이려 사람들이 단단히 대비했다.
덕분에 피해가 적었다. 순식간에 기온이 10도가 떨어졌다. 학의천 돌다리는 물에 잠겼다.
남편은 돌다리 대신 학의교를 건너 출근한다.
* 맨발 걷기
태풍이 지나가며 바람을 남겨둔다. 팔에 닿는 찬 기운에 깜짝 놀란다. 낮에도 꽤 시원하다.
해가 질 무렵 산책을 나간다. 사람들 옷이 바뀌었다. 긴팔과 긴바지가 종종 눈에 띈다.
학의천도 전보다 북적인다. 신발을 풀숲에 놓고 맨발로 땅 위를 걷기 시작한다. 땅은 촉촉하고 말랑하다.
맨발 걷기에 가장 좋은 날은 비 온 다음날이다. 맨발걷기 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
전국적으로 맨발걷기 붐이 일어나기 전부터 맨발로 땅을 밟았다. 처음엔 어르신들 몇 분밖에 없었다.
발이 아프지 않냐, 어쩜 그렇게 빨리 걷냐, 맨발로 걸으면 뭐가 좋으냐는 질문을 가끔 받았다.
그럴 때마다 허리와 어깨를 곧게 펴고 경쾌하게 걸었다. 흙에서는 맨발로 걷는 게 당연하다는 표정을 짓고.
우리 동네 맨발걷기 부흥을 일으키는 데 한몫 했다고 생각한다.
* 말복
여름의 끝을 알리는 날이다. 복날만 되면 삼계탕 집이 북적거린다. 복날에 삼계탕을 먹은 기억이 없다.
단오에 찰밥을 먹지도 않고 생일이라고 미역국을 끓이지도 않는다.
몇 년 전 조카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족들은 생일을 챙기기 시작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 부르는 게 아직도 어색하다.
케이크 촛불을 바라보며 박수 치는 조카들과 함께 열심히 노래를 부른다. 올해는 처음으로 복날도 챙겼다.
부모님을 모시고 청계사 아래에 있는 식당에 갔다. 부모님도 나도 설레는 마음이다. 메뉴는 누룽지 백숙. 닭은 엄마가 좋아하고 누룽지는 아빠가 좋아하고 죽은 내가 좋아한다.
말복 다음날인데도 가게 안이 꽉 찼다. 회사에서 단체로 온 팀도 있다. 대가족이 오기도 했다.
고개를 숙이고 닭죽을 떠먹는 사람들을 보니 기분이 좋다. 성실하게 절기를 챙기는 사람들. 사랑하는 가족과 음식을 나누며 계절의 변화를 기념하는 기쁨을 깨닫고 있다.
부모님과 나는 몇 번의 여름을 더 맞이할 수 있을까?
* 귀뚜라미
5시 27분에 일어나던 매미가 사라졌다. 게으름을 피우는 걸까? 태풍에 쓸려갔나?
대신 귀뚜라미가 일찍 일어난다.
우리 아파트에 사는 귀뚜라미는 점잖은 편이다.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적당한 톤으로 공간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귀뚤 귀뚤. 모데라토 빠르기다.
학의천에 사는 귀뚜라미들은 수다쟁이다. 귀뚜르르르, 뚜뚜뚜뚜뚜, 특특특특.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소리가 정신없이 튀어나온다. 목청도 좋고 씩씩하다.
우리 집 귀뚜라미는 왜 약해 빠졌지? 남편이 대답한다. “여긴 경쟁자가 없어서 그래.”
귀뚜라미가 울자 잠자던 새들도 깨어난다.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꿀벌과 나비가 사라지는 시대다.
귀여운 곤충도 예전만큼 눈에 띄지 않는다. 침묵의 봄이 올까 두렵다.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아이들이 “꿀벌이 뭐에요?” 묻는 날이 오지 않기를.
* 늦더위
늘 이런 식이다. 꼭 떠나갈 것처럼 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옆에 착 달라붙었다. 다시 습도도 높아졌다.
태양은 이글거린다. 긴팔을 입을까 고민하던 마음이 쏙 들어간다.
일주일 전 엄마는 푸른 꽃잎이 큼지막하게 프린트 된 반팔 블라우스를 샀다. 여름 다갔는데 괜히 샀다고 후회하던 엄마는 다시 블라우스를 꺼내 입는다.
올해는 더위가 오래 간다. 8월 중순이 지났는데도 낮 기온이 33도를 웃돈다. 거리는 한산하다. 밤에는 창문을 열고 잠을 청하지만 한낮에는 에어컨을 틀어야 한다.
온난화로 기온이 상승하면서 한국의 사계절 패턴이 무너지고 있다.
여름은 머물러 있지만 낮 길이는 조금씩 짧아진다. 어둠이 30분 일찍 방문하기 시작했다. 저리 가줄래?
* 처서
‘더위가 그친다’는 뜻을 지닌 처서다. 처서 기념으로 아침에 산책을 나가본다. 집 앞에 심겨진 중국단풍 손끝 몇 개가 빨갛게 물들었다. 네일 아트 받고 왔니?
새 옷으로 바꿔 입는 나뭇잎들. 학의천에는 나팔꽃이 활짝 피었다. 전날 비가 와서 땅이 촉촉하다. 맨발에 흙이 부드럽게 감긴다.
수크렁, 맨드라미, 무궁화, 억새, 해바라기, 코스모스, 닭의장풀, 달맞이꽃, 들국화. 그 밖에도 이름 모를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있다. 바람이 선선하다.
육교나 돌다리를 건너 출근하는 직장인도 많아졌다. 한 시간을 걸으니 땀이 난다.
먹구름이 파란 구름을 밀어내고 있다. 다시 비가 오려나보다.
* 찬바람
새벽에 몸이 서늘해져 눈을 떴다. 살짝 열어놓은 거실과 부엌 창문에서 찬바람이 들어온다. 문을 닫고 눕는다. 잠이 오지 않는다. 여전히 춥다. 다시 일어나 양말을 신고 반팔 티셔츠를 겹쳐 입는다. 얇은 이불을 한 겹 더 덮는다.
엊그제까지 더위에 뒤척이며 잤는데 처서가 지났다고 발이 시렵다. 절기마다 음력 날씨가 정확하다는 생각을 100번째 하고 있다.
가을은 약속 잘 지키는 사람처럼 제시간에 도착했다. ‘
찬바람 불어오는 마굿간, 볏짚 구유에 누인 저 아기’ 마음속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다 다시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