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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와 모과 Sep 12. 2024

11월



* 입동  


겨울의 시작이다. 아침에 거실로 나가니 쌀쌀함이 느껴진다. 실내 온도는 22도.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어준다. 패딩을 입고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다. 털모자를 쓴 아이도 있다. 

밖의 온도는 4도. 낮에는 15도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겨울이 오면 밖에 나갈 때 챙겨야 할 것들이 늘어난다. 립밤과 핸드크림. 머플러와 장갑도 잊지 말아야 한다. 가끔은 털모자도 필요하다. 

이리저리 껴입은 옷도 무겁고 두꺼운 양말도 무겁고 두툼한 신발도 무겁다. 몸이 움츠러든다. 

벌써부터 여름이 그립다.           



* 호빵  


편의점에 호빵 찜기가 등장했다. 올해는 호빵 종류가 더욱 다양해졌다. 

떡볶이 호빵, 마라찜닭 호빵, 양념치킨 호빵, 대파크림치즈 호빵, 인절미 호빵을 맛볼 수 있다. 호빵을 보고 그냥 지나치기는 어렵다. 

편의점 입장에서는 호빵 기계를 놓는 게 이득이 없다고 한다. 팔리지 않는 호빵은 몇 시간에 한번 폐기해야 해서 마진도 적다. 

호빵 없는 겨울 편의점은 쓸쓸한 느낌을 주니 마지못해 갖다놓는 게 아닐까? 그래서인지 동네에서는 호빵 파는 편의점을 찾기 어렵다. 

찐빵과 호빵은 뭐가 다를까? 둘 다 같은 빵이다. 다만 집에서도 간편하게 쪄먹을 수 있게 간편화 한 것이 호빵이라고 한다. 

찐빵은 좀 더 묵직하고 팥소의 알갱이가 살아 있다. 호빵은 가볍고 폭신하며 팥소도 부드럽게 으깨져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호빵을 양손에 들고 호호 불며 걸어간다. 

지나가는 아이가 빤히 쳐다본다. 너도 먹고 싶니?           



* 수족냉증  


손발이 차디차다. 기온이 살짝 떨어질 때마다 손과 발이 가장 먼저 반응한다. 

지인들은 손이 왜 이렇게 차냐며 깜짝 놀란다. 나는 그들의 따뜻한 손을 만지며 부러워한다. 

여름에는 인기 많은 손이지만 겨울에는 악수하기가 미안해진다. 집안에 있어도 손이 시리다. 

밤에는 발이 차가워 단번에 잠들지 못한다. 발이 따뜻해질 때까지 발가락을 움직여 온도를 높여야 한다. 

낮에는 두툼한 양말을 발목까지 올려 신고 슬리퍼를 신어야 겨우 온기가 돈다. 

식단을 바꾸고, 운동을 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해도 손발은 따뜻해지지 않는다. 

엄마 체질을 물려받았을 거다. 엄마는 나보다 정도가 훨씬 심해 한여름에도 양말을 벗지 못한다. 엄마는 찬물만 마셔도 기침을 한다. 

가을이 올 때마다 탄식이 절로 나온다. 겨울이 멀지 않았구나. 겨울에게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다. 

남편이 퇴직하면 겨울마다 따뜻한 지역으로 거처를 옮길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품는다. 그 희망으로 올 겨울도 잘 버텨야겠다.          



* 수능  


수능 날이다. 올해는 한파가 없다. 부슬부슬 가을비가 내린다. 라디오에서 우리 딸, 우리 아들이 수능 보러 간다는 사연이 줄줄이 올라온다. 

내일이 되면 지각할 위기에 처한 수험생이 경찰차를 타고 제시간에 도착했다는 에피소드가 들려오겠지. 

직장인 출근 시간을 한 시간 늦춘 회사가 많다. 수능 보는 아이들을 위해 출근 시간과 비행기 이착륙 시간을 바꾸는 나라. 

온 국민은 아닐지라도 가정에서 최대 관심 대상이 되는 아이들은 이를 감사하게 생각할까? 부담으로 느끼지는 않을까? 

오늘 시험 결과가 자신의 남은 인생을 좌우한다고 믿을까? 그 믿음이 깨지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까?

 최선을 다해 준비한 아이들이 차분한 마음으로 시험을 치루면 좋겠다.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한 부모들도 차분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기다리면 좋겠다. 

시험이 끝나면 그동안 고생했다며 서로서로 안아주며 따뜻한 마무리를 하면 좋겠다. 

인생에서 수능은 풀어야 할 숙제 중 하나에 불과하고, 이전 문제를 완전히 망쳤어도 남아 있는 문항이 많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 은갈치 


가을은 제주 갈치의 계절이다. 목포 갈치는 먹갈치, 제주 갈치는 은갈치라 부른다. 

제주에서는 그물 대신 낚시로 고기를 낚아 은빛 비늘이 오롯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갈치는 조리법이 다양하다. 갈치자반, 갈치조림, 갈치젓, 갈치회, 갈치국. 나는 바삭하게 구운 갈치를 가장 좋아한다. 

이번에 생선 구이용 오븐을 새로 구입했다. 고등어 두 마리를 넣으면 꽉 차는 미니 오븐이다. 

컬리에서 제주도 토막 갈치를 주문했다. 300g에 14,000원이다. 노르웨이 고등어도 함께 담았다. 170g에 4000원이다. 

오븐에 종이 유산지를 깔고 은갈치 네 토막을 올린 후 230도에 20분을 구웠다. 간장에 생 와사비를 풀고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갈치 살을 한 점 찍어 먹었다. 생각보다 별로다. 

다음날 230도에 40분을 돌려 고등어를 구웠다. 와. 맛있다. 고등어를 구워보니 알겠다. 

갈치는 후라이팬에 굽는 게 더 맛있다는 걸. 

갈치 안녕. 이제 너는 끝이다.           



* 첫눈  


남편은 회사 동호회 밴드에서 통기타를 연주한다. 드럼, 베이스, 일렉기타, 보컬, 통기타, 키보드로 이루어진 밴드다. 나는 키보드를 맡고 있다. 사내에서 키보드 칠 팀원을 모집했으나 지원자가 없어 집에서 놀고 있던 내게 기회가 왔다. 

오늘은 밴드 팀원과 점심을 먹었다. 칼국수와 파전을 시키고 꼬막 초무침에 밥을 비벼 먹는데 누군가 소리친다. “눈이다” 

창밖을 보니 하얀 눈이 펑펑 내리고 있다. 함박눈이다. 눈의 결정은 만들어질 당시 습도와 온도가 결정한다.

대한민국 기상청에서는 눈 모양을 40여 종으로 구분하고 있다. 별, 기둥, 나뭇가지, 부채, 바늘 등 가지각색이다. 

함박눈은 눈 결정이 여러 개 모여 크게 내리는 눈이다. 포근한 날에 내린다. 하늘에서 눈송이가 쏟아진다. 쏟아진다. 

밥을 먹고 밖을 나서니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이 뚝 그쳤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다시 눈발이 날린다. 빗방울이 섞인 싸리눈 같다. 눈이 코트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사라진다.           



* 시래기  


드디어 205동 7층 베란다 밖에 시래기가 걸렸다. 우리 집 거실에서 바로 보인다. 

태극기 꽂는 봉 아래에 시래기를 엮어 걸어놓는다. 베란다 밖에 걸린 시래기는 겨울 내내 얼고 녹고를 반복한다. 아침마다 시래기가 잘 달려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작년에 우연히 시래기가 날아가는 걸 목격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오후였다. 의자에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구경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7층 베란다에 매달려 있던 시래기가 바람에 밀려 봉에서 빠져나와 땅을 향해 천천히 떨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화단 옆 바닥에 떨어진 시래기를 한참 지켜봤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계속 바닥에 두면 누군가 쓰레기로 생각해 발로 밟고 지나갈 위험이 있었다. 

밖으로 나가 시래기를 화단 옆 나뭇가지에 묶어두었다. 부디 집주인이 발견하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며칠 동안 나뭇가지를 관찰했으나 시래기는 그대로였다. 

집주인이 시래기가 날아간 줄 모르거나 발견하지 못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얼마 뒤 시래기는 사라졌다. 누가 가져갔는지 알 수 없다. 

올해 베란다에 걸린 시래기는 작년보다 양이 몇 배로 풍성하다. 꽃다발을 거꾸로 걸어 놓은 것 같다. 

저 정도 무게면 날아가지 않겠지. 가끔 참새 한 마리가 다가와 시래기를 콕콕 쪼아 먹고 날아간다.          



* 소설  


24절기 중 20번째 절기인 소설이다. 이날 첫눈이 내린다고 하여 소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눈이 오기엔 따뜻한 날이다. 최고 온도는 14도. 두꺼운 후드 티만 걸쳐도 될 정도로 화창하다. 손이 시리지 않다. 

붉게 물들었던 단풍나무 잎이 나뭇가지에서 그대로 색이 바랬다. 흑백 사진 같다. 

도서관 옆 초등학교에 걸린 현수막엔 ‘11월에는 책을 읽읍시다.’라고 적혀있다. 문구가 무색하게 도서관은 매번 한적하다. 

도서관이 가장 붐빌 때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 7월 중순이 넘어가면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거나 공부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러다 8월 중순이 되면 도서관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조용해진다. 

눈은 오지 않았지만 포근해서 좋은 날, 소설이다.           



* 캐롤  


피트니트 센터에 들어서는 데 어쩐지 분위기가 다르다. 주변을 둘러봐도 바뀐 건 없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트레드밀에 올라 걷기 시작한다. 

아, 캐롤이 흐르고 있구나. 항상 가요나 팝송이 흘러 나왔는데 오늘은 캐롤이다. 

가볍고 신나는 멜로디가 헬스장을 가득 채운다. 마음이 설렌다. 그리운 친구도 생각나고 12월에 지인들과 함께 할 송년회도 기대된다. 

조카들의 성탄절 공연도 보고 싶다. 캐롤을 들으며 12월을 상상하다보니 오늘 운동은 덜 힘들었다.           



* 고드름 


학의천 다리 밑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열렸다. 투명한 수정 고드름이다. 오늘 최저온도는 영하 7도. 장갑을 끼고 털모자를 썼지만 여전히 춥다. 

주말이라 산책을 나간다. 함께 걷던 남편이 노래를 부른다. 

‘고드름 따다가 발을 엮어서 각시방 영창에 달아 놓아요.’  

각시는 따뜻한 방안에서 햇살에 반짝이는 고드름을 보며 행복했을까? 고드름 발이 바람에 흔들려 서로 부딪히며 종소리를 냈을까? 고드름 발을 볼 때마다 몸을 움츠리지는 않았을까? 

남편이 발차기로 고드름 하나를 떨어뜨리려 시도한다. 발은 근처에도 미치지 못한다. 

민망해진 우리는 누가 볼까 싶어 학의천을 힘껏 뛰기 시작한다.           



* 곱창김  


11월은 곱창김이 나오는 시기다. 한 번 들으면 잊기 어려운 이름이다. 

왜 곱창김일까? ‘원초’ 자체가 곱창처럼 구불구불해서 곱창김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곱창김 원초는 울퉁불퉁하고 굵직해 맛과 향이 진하다. 1년 중 약 25일 정도만 생산이 가능해서 일반 김보다 비싸다. 

처음 곱창김의 존재를 알았을 때는 100매를 샀다. 두 식구가 먹기엔 많은 양이라는 걸 깨닫고 이제는 소량만 구입한다. 

올해는 조미 없이 한번 구운 곱창김을 샀다. 오븐이나 프라이팬에 따로 굽지 않아도 되니 편하다. 

도마 위에 통김을 놓고 칼로 슥슥 자르기만 하면 된다. 두툼한 김에 밥을 싸서 와사비를 푼 간장에 살짝 찍어 한 입에 넣는다. 질 좋은 김만 있으면 밥 한 공기는 거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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