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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별 Oct 21. 2023

도련님은 오글거려요

동거부터 할게요 8화




"우리 아직 결혼한 거 아니에요."

일반적으로 결혼하면 생겨나는 온갖 귀찮은 일을 하지 않을 때 동거는 좋은 핑곗거리가 된다. 예를 들어 명절이라고 해보자. 명절에 나랑 남자친구는 각자 본가에 가고 인사는 선물로 갈음한다. 아무도 오라고 하지도 않고, 오지 않는다 해서 섭섭해하지도 않는다. 우린 아직 결혼을 한 건 아니니까.


서로의 집에 가면 손님 대접을 받는다. 우리 집에 가면 오랜만에 고향집에 내려왔다고 토종닭을 푹 삶은 백숙에 갓 담근 겉절이, 잔칫날마다 꼭 등장하는 갈비찜과 잡채 등 진수성찬이 밥상 위에 올라간다. 남자친구네 집에 가도 마찬가지다. 어머니는 한 마리에 2만 원씩이나 하는 병어를 사다가 조림을 만들어주시고, 백숙과 콩나물국과 미역냉국까지 국물류만 3가지를 내어주셨다. 음식을 차리거나 치우는 걸 도와드리겠다고 해도 한사코 거절하신다.


남자친구 부모님 댁 대신 호텔에서 잠을 자도 괜찮다. 남자친구 고향집에 화장실이 하나뿐인 데다가 남의 집에서 자는 게 불편해서 남자친구 고향에 내려갈 땐 주변 호텔에서 묵곤 했다. 부모님은 남자친구한테는 조금 섭섭한 기색을 내보이기도 하셨지만, 나한테는 아직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는다.




남자친구 고향집에 처음 놀러 갔을 때 일이다. 처음 내가 집에 방문하는 날이라 어머님께서 온갖 좋은 요리를 차려주셨다. 어른이 분주히 움직이는데 가만히 앉아있기도 뭣해서 밥그릇 국그릇과 수저 젓가락을 상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맛있게 차려주신 음식을 먹고 난 뒤에 또 눈치가 보여 설거지라도 하겠다고 나섰다.


"어머니, 제가 설거지할게요."

"아이고, 나중에 해."

"아... 네..."


그런데 곧 큰 물음표가 하나 떠올랐다.

'나중에? 나중에 언제 하라는 거지?'

어머님은 별 뜻 없이 했던 말일지 모르겠지만, 이 말은 온종일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 나 결혼하면, 이 집에서 설거지해야 하는 건가?' 첫 방문은 '손님'이라 봐주는 건가 싶었다.


반면 남자친구는 우리 집에 왔을 때 밥상 앞에 앉아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망부석인 줄 알았다. 처음 우리 집을 방문한 날도,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앉아있었다. 엄마랑 내 여동생만 분주히 움직였다. 밥그릇 국그릇 수저 젓가락 모두 엄마가 손수 밥상 위에 놓았다. 남자친구는 밥을 다 먹고 가만히 앉아 엄마가 내놓은 과일과 차도 맛있게 먹었다. 빈 그릇을 치우는 건 엄마의 몫이었고, 내가 설거지한다고 나섰으나 오빠랑 이야기하라며 엄마는 그 마저 만류했다. 남자친구는 말 그대로 손님이었다. 바삐 움직이는 남자친구네 어머님을 보고서 어쩔 줄 몰랐던 나와는 달랐다. 남자친구는 손님으로 우리 집에 왔고, 남자친구도 우리 가족도 모두 그걸 당연히 여겼다.


다들 편안했고 이 정반대의 경험에서 불편함을 느낀 건 나뿐이었다. 나는 나 자신이 싫었다. 손님이면 그냥 손님답게 가만히 남자친구처럼 앉아있으면 되는데,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여자'랍시고 어머님 일을 거들려고 했다. 어려서부터 그토록 이해가 안 갔지만, 할머니댁에서나 우리 집에서나 친척들이 오면 부엌에서 분주히 움직이며 며느리 역할을 했던 엄마를 보며 자라서일 테다. '왜 고모들은 가만히 있는데 엄마만 힘들게 일하지. 지들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어린 마음에 항상 고모들과 할머니한테 분노했으면서도 그걸 보고 자란 나는 '바람직한 며느리상(지금은 동거인에 불과할지라도)'이 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시어머니가 저렇게 바삐 움직이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라는 마음. 거기에 어머님도 화답했다. 설거지는 나중에 하라며.




"아이고~ 형수님."


넉살 좋은 남자친구 동생은 형수님 소리를 잘도 했다. 연애 기간만 6년이 되다 보니 동생도 여러 번 본 터였다. 그리고 원래 남자들은 여기저기 형님, 형수님 소리를 편히 하는 편이니까. 보통 친한 형의 아내한테도 "형수님"이라 부르니, 본인이 부르는 형수님이 나 포함 족히 10명은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남자친구 동생을, 그의 예명으로 불렀다. 예컨대 예명을 '푸바오'라 하면, 푸바오님이라고 불렀다. 여기에 '님'자를 붙인 건 나 나름대로의 예우였다. 동생이 나보다 4살이나 많았기 때문이다. '씨'는 약간 나보다 아랫사람을 부르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요즘 회사에서도 서로를 '00님'으로 부르는 게 유행이 아닌가.


오랜만에 남자친구와 그의 동생, 나 이렇게 셋이서 술을 꽤나 들이켰다. 그랬던 푸바오님이 갑자기 버럭 하며 말했다.


"아니, 형수님 왜 저를 계속 푸바오라고 불러요?"

"아... 그럼 이름으로 부를까요?"

"아니요!! 도련님이라고 불러야죠. 나도 형수님이라고 부르잖아요."

"그럼, 형수님이라 부르지 말고 제 이름을 부르세요."

"아니 그게 아니잖아요~~~!"

"아 도련님은 넘 오글거리는데요..."


술 취한 와중에 실랑이 아닌 실랑이가 오갔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 부른 홍길동도 아니고, 왜 도련님을 도련님이라고 부르지 못하냐'는 게 그의 요지였다. 나도 강력히 의견을 표현했다. 오글거려서 부르기가 어렵다는 게 이유였다.


생각해 보자. 도련님이라니. 2023년 현재 지금 도대체 어디서 '도련님'이란 단어를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형의 아내와 남동생이라는 사이에서 부르는 명칭 외에 누군가가 상대방을 도련님이라고 부르진 않는다. 심지어 남동생이 미혼이라 망정이지, 결혼을 하면 '서방님'이라고 불러야 한다. 내 서방한테도 서방이라고 안 부르는 판에 왜 남의 서방한테 서방이라고 해야 하는지. 여동생이었다면 '아가씨'라고 불러야 한단다. 무슨 조선시대 종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호칭부터 한참 오글거린다. 동거 중인 지금은 어찌어찌 오글거린다는 핑계로 빠져나갔지만, 결혼이라도 한다 치면 어떻게 도련님의 호칭에서 피해갈지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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