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를 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
복도 하나짜리 vs 복도 두 개짜리 비행기가 있다. (세 개짜리는 아직 못 봤다)
좀 더 비행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소형기 vs 대형기로 구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만약 항공 쪽에 관심이 조금 더 있는 사람이라면
협동체 vs 광동체라는 단어를 들어봤을 것이고,
항공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 혹은 전에 만났던 애인이 항공 쪽에 있었다면
B737, B787, A380, A330의 기종정도는 들어봤을 것이다.
여기에 뇌절을 조금 가미하자면
B737-800, B737-8, B777-300ER, B777X, B787-9, A330-200 등의 시리즈를 알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행기들은 최대항속거리가 저마다 다르고, 그에 따른 노선에 따라 비행시간 또한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보통 소형기보다 대형기가 훨씬 더 멀리, 오래 날아갈 수가 있다.
자동차의 종류보다 항공기의 종류가 더 많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굉장히 많은 종류의 비행기들이 있지만, 보통의 조종사라면 그 중 1개의 기종을 전담하여 조종한다.
무슨 말인고 하면, 평생 1개의 기종만 탄다는 것이 아니라 B737과 A330 면허증(정확히는 기종 한정 자격이라 부르지만, 편히 면허증이라 하겠다)이 둘 다 있다 해도 둘 중 하나의 비행기를 전담하여 조종한다. 실제로 두 개의 기종을 번갈아 타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대개는 한 가지의 기종을 조종한다. 만약 다른 기종의 비행기를 조종하려 한다면, 여러 가지 시험을 거쳐 면허를 취득하여 기종 전환을 한 뒤 새로운 기종을 조종하는 식이다.
그렇다면 객실 승무원인 아내는 어떨까.
이것 또한 물론 회사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은 기종에 상관없이 그 회사에 있는 모든 비행기를 탄다. 일본을 갈 때는 A220을 타기도 하고, 뉴질랜드를 갈 때는 B777을, 하와이를 갈 때는 B747을 타기도 한다.
따라서 내가 타는 기종은 소형기로 주로 가는 동남아 노선을 기준으로, 보통 4시간~5시간 정도 되는 노선을 다니지만, 아내는 소형기와 대형기 모두 타기에 4시간 걸릴 때도, 14시간이 걸릴 때도 있다.
단일 기종을 타는 나는 주로 가는 나라만 간다. 즉, 내가 조종하는 비행기가 갈 수 있는 노선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필리핀에 있는데 무려 이틀 전에 왔던 곳이다. 이틀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틀 전에는 같은 가게에서 내가 초밥을 먹었고, 오늘은 라멘과 가라아게를 먹었다는 차이 정도일까. 커피는 둘 다 탐앤탐스에서 똑같이 먹었다.
반면 아내는 회사에 있는 여러 기종을 타기 때문에 동남아처럼 가까운 곳을 갈 때도, 미국이나 유럽처럼 먼 노선을 갈 때도 있다.
4, 5시간 정도의 비행시간에 익숙해진 나는 아내가 14시간 동안 비행기에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피곤이 몰려온다. 나조차도 이런데 정작 14시간을 날아가야 하는 아내는 오죽할까.
그래서 얼마 전,
아내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한번 더 샘솟았던 적이 있는데(물론 더 샘솟을 곳도 없지만. 여보 보고있지?) 오랜만에 우리 회사에서 가는 가장 긴 노선인 푸켓이 나온 날이었다.
브리핑실에 도착하여 비행계획서를 뽑았고, 이것저것 중요한 사항을 체크하는데 적혀있는 비행시간을 보았다.
'6시간 37분'
wow....
얼마 전에 다녀온 방콕 5시간도 길었는데 그보다 1시간 37분을 더 날아가야 한다니.
헛웃음이 나와 비행 중인 아내에게 카톡을 남겼다.
'여보, 나 오늘 비행시간 6시간 37분 나왔다. 대박. 이거 어떻게 날아가지.'
아내에게 연락을 하고 뉴욕에서 오고 있는 아내의 비행기를 검색해 봤다.
Departed 11:56 ago.
Arriving in 2:59
와이프느님께선 11시간 56분 동안 비행 중이시고, 앞으로 2시간 59분을 더 날아오셔야 한다.
나의 비행시간 6시간 37분?
껌이다.
아내에게 다시 정정 카톡을 남겼다.
'여보, 뉴욕에서 12시간째 날아오고 있구나. 잘 다녀올게.'
항공 부부의 장점,
내가 막상 그 상황이 되면 상대방이 얼마나 힘든지를 직접적으로 알 수가 있어서 공감이 쉽다.
아무래도 고생하는 아내에게 소고기를 더 많이 사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