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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Jan 22. 2019

미안하지만, 그래도 너는 아냐.

(연애실패소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1



구름이 걷혔다. 슬쩍 비친 달빛이 그날의 기억을 다시 불러왔다. 제주미향, 이던가? 처음으로 제주에 왔고, 처음으로 갈치 튀김을 맛보았던 곳. 5년도 더 된 기억인데 보자마자 알아보다니 내 기억력이 놀라운 것인지, 그 집의 외관이 유니크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몸만 오면 된다고 했다. 숙소도 다 마련되어 있다고 했다. 각자 서로 애인이 있던 완과 나는 솔로인 상태로 다시 만났다. 하지만, 애틋한 감정이라고는 일점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서로에 대한 환심이 있었다면 몸만 오면 된다는 그의 말에 응했을 리 없었다.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공항으로 마중 나온 완과 그의 제자들은 제주 바람만큼이나 산뜻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완은 하나도 변함이 없었다. 그가 맡은 아이들도 완만큼이나 건강하고 풋풋해 보였다. 난생처음 제주에 온 날, 갈치 튀김을 먹었고 새연교의 야경을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고마워."

"고맙긴, 짜식!"


다음 날도 제주의 어딘가를 갔던 것 같다. 성산일출봉이었나 그 근처에서 돔베고기를 먹었던 기억만 있다. 아이들을 들여보내고, 숙소에서 맥주 한잔 하기로 했다. 술에 약한 나는 맥주 몇 모금만 마셔도 취기가 올라온다. 몸은 한기가 느껴지고 얼굴은 불그레해졌다.


"잘래. 어여 건너가 봐."

"한 번만 안아봐도 되냐?"

"안 돼. 어서 가."

"딱 한번 만이야."


아. 잘못 왔다. 남자가 오라고 할 땐 아무 이유가 없을 수가 없는 거였다. 내가 애송이였나. 수없이 나의 연애 고민을 들어왔던 완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하리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못했다.


"왜 이래! 화낼 거야. 얼른 가."

"나 전부터 니가 좋았었어."

"웃기지 마. 우리 둘 다 연애 중이었어."

"그때도 너한테 관심이 있었어. 너 같은 여자가 좋아. 지적이고 삶을 즐길 줄 알고 그리고..."

"됐어. 얼른 가. 지금 당장 나가지 않으면, 나 지금 당장 제주 떠날 거야."


그제서야 그는 내 방에서 나갔다. 아... 내 착오였다. 설령 여기에서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해도,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 가운데 내가 정말 이런 일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하면 믿어줄 사람이 있을까. 땅을 치고 후회해도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내가 입을 다물면 이 일은 완과 나, 둘만의 굴욕사로 끝난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배신감이 느껴지는 것일까.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그 후로 나는 그와 싸이월드 일촌을 끊는 것을 시작으로 절교를 했다.


완이 왜 갑자기 나에게 고백을 한 거지? 기억을 되짚어봤다. 음... 술을 마셨고, 고맙다고 인사를 했었고, 그리고... 아! 그 사람 이야기를 했었다. 애매하게 멀고도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던 '한'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시작하려던 순간, 내 이야기를 막아섰다.


"그만! 듣고 싶지 않아. 그 이야기하지 마."


남자에게 남자 이야기를 하면 답이 좀 나올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완을 자극했었나 보다.





'한'은 스윙 동호회에서 처음 만났다.


콧수염과 복장이 인도인 같기도 하고, 미술을 전공하는 사람답게 자유로운 외모과 말솜씨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나 역시 그 못지않게 동호회 내에서 눈길을 받았다. 시작은 동호회 후기를 남기며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고, 점점 물이 오른 춤솜씨와 외모로 스윙 바(Bar) 내에서는 쉴 틈이 없을 정도였다. 사실 나이만 공개하지 않았다면 그 영역을 더 넓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상연하 불문하고 나를 궁금해하는 남자들이 많아졌다. 내가 주최하는 번개 모임 공지에는 여자보다 남자들의 참여가 많았고, 부담을 갖지 않기 위해 친한 여동생들 몇몇과 동행하기도 했다.


우리 집은 대학생 때까지 통금이 있었다.

동문회에 갔다가 12시가 넘어서 귀가한 나에게 내려진 통금시간은 밤 10시였다. 그 후로 9시 반이 되면 귀가를 재촉하는 엄마의 전화가 수없이 걸려왔다. 나의 통금이 풀린 건, 정확히 말하면 통금이 자연스럽게 해제된 것은 내가 자취를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내가 10시에 집에 들어오는지 12시에 집에 들어오는지 부모님이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전화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를 내려놓으셨겠지. 아무튼 그러던 내가 주말마다 동호회를 갔고, 동호회 뒤풀이를 시작하는 시간은 밤 11시였으니 뒤풀이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새벽 귀가는 불 보듯 뻔하다. 엄마는 새벽 서너 시에 들어오는 딸에게 "대학 때 못하게 했더니 서른 넘어서 이러네. 살면서 한 번쯤 겪어야 하는 것을 못하게 했더니, 아이고야."라고 하셨다. 그러게 조금이라도 젊을 때 겪게 했으면, 그때 남자 다리 한 번이라도 걸어 넘어지게 했을 거 아냐. 그럼, 내 인생이 조금은 달라졌을지 알아요? 왜 그걸 막아서서 나이 먹어서 결혼도 못하고 동호회나 기웃거리게 하냐고요.


보통은 기수 뒤풀이만 끝나면 집에 왔는데 그날은 뒤늦게까지 남았었다. 처음에는 같은 기수끼리 모여서 술을 마시지만, 밤이 깊을수록 여러 기수가 한자리에 모인다. 다시 말하면, 교제의 범위가 더 넓어진다는 것이다. 직장인들의 취미 모임에서 기수가 의미하는 것은 나이가 아니라 들어온 시기이기 때문에 여러 기수가 모인다는 것은 그만큼 넓은 스펙트럼의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바로 그날, '한'과 처음 이야기를 나눴다. 기인에 가까운 행동을 하는 그는 그 술집에서 내 손을 잡고 스윙을 다. 나는, 주춤했지만, 촌스러워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네 기수 엠티에 놀러 오라는 말을 건넸고 나는 그러리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남의 기수 엠티에 굳이 찾아가는 눈치 없는 사람이 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술도 적당히 취했고, 괜히 안 간다고 해봤자 말만 길어질 것 같아서 알았노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전화번호 입력해요. 안 올 거 같아, 아무래도."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은 없지만, 워낙 눈에 띄는 외모다 보니 궁금하긴 했었다. 게다가 만화로 그린 자기소개글은 동호회 홈페이지에 인기글에 올라가기도 해서 동호회 내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나에게 연락처를 물어왔다. 싫지 않았다.


그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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