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실패소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2
찰스턴 특강 같이 들을래요?
그에게서 첫 연락이 온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쯤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아직 스윙댄스의 초보자였고, 그는 고수였다. 스윙댄스는 스윙(swing) 리듬에 맞춰 즐기는 춤을 말하는데, 세부 종류로 지터벅(jitterbug), 린디합(lindy hop), 블루스(blues), 부기우기(boogie woogie), 발보아(balboa), 쉐그(shag), 웨스트코스트 스윙(west coast swing)이 있다. 이 가운데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린디합이다. 당시 나는 지터벅을 했었고, 그는 이미 다른 동호회에서 최고 수준까지 마치고 다시 이 동호회에 들어와 린디 과정을 배우고 있었다. 그런 그가 나에게 특강을 듣자고 연락이 온 것이다. 찰스턴은 템포가 엄청 빠른 음악에 맞추어 추는 댄스로 나 같은 초보가 범접할 영역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미 답을 보내버렸다. "혹시 생각 바뀌면 안 되니까, 내가 우선 강습료 입금했어요. 나중에 강습료 대신 밥 한번."라는 답장이 왔다. 이로써 그와의 식사까지 약속하게 만드는 멘트였다.
매주 수요일 저녁, 나는 그와 함께 특강에 참여했다. 이 특강은 커플 단위로 신청을 해야 연습이 가능했다. 부족했지만, 열심히 했다. 혹시라도 괜히 나와 함께 강습 듣자고 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즈음 잠시 병원에 입원한 엄마를 간호하면서도 그 연습에는 빠지지 않았다. 연습에서 돌아와서 엄마를 보고, 병실을 나와 새벽이 넘도록 그와 통화를 했다.
"아, 이런 기분 정말 오랜만인 거 같아요. 밤에 통화하는 거. 기분이 뭔가 설명할 수 없이 묘해요."
"후후. 그래요?"
사실 나도 그랬다. 그렇게 말하면 될 것을 타자화해서 말했던 것은 내가 너무 쉽게 넘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하나 더, 내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그러면서도 연습장을 빠져나오는 내게 그가 쥐어준 편지를 밤새 읽고 또 읽었다. 자신이 어떻게 성장해 왔으며, 지금은 어떤 것에 몰두하고 있고, 어떤 생활을 하며 지내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의 친한 동생들과 함께 그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그중 한 명은 나와 동기였고, 나머지 한 명은 그와 동기였다. 그들은 모두 남자였고 나만 여자였다. 내 생애 언제 또 그런 날이 올까 싶을 정도로 복에 겨운 날들을 보냈다. 남자 여럿에 둘러싸인 여자 주인공. 그녀를 향한 남자들의 관심이 보는 내내 부러운 그런 구도 안에 '내'가 있었다. 주로 '석이'가 우리와 함께 했다. 그는 나를 누나로 부르며 잘 따랐다.
그의 집엔 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고, 그와 동고동락했다. 그의 빨간색 이불에는 하얀 고양이 털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그는 그 뒤로도 종종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올리브 파스타를 만들어 주기도 했고, 모카포트에 끓인 커피를 내어주기도 했다.
우리 서로 재능 기부할래요?
그는 미술 전공자였다. 그는 스케치를 가르쳐주기로 했고, 석이는 가죽공예를 가르쳐주기로 했다. 나는 내 전공 언어를 가르쳐주기로 하고, 토요일 강습 전에 만나서 수업을 하고, 함께 스윙 강습을 받으러 갔다. 그즈음, Bar에는 나와 그 둘을 한 무리로 보기 시작했다. 그 눈빛들이 싫지 않았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힘들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석이는 이미 취해서 잠이 들어있었다.
"교사였어요. 상담교사. 힘들게 헤어졌어요. 그리곤 2년 정도 혼자 지냈어요."
자신이 섣불리 누구에게 마음을 주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 그는 그런 방식으로 설명을 했다. 나만 허덕이고 지냈던 것은 아니구나, 당신도 고되고 힘들었구나. 괜한 동질감으로 그를 이해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나를 통해 그가 다시 '사랑이 뜨거운 것'임을 알기를 바랬다.
"아, 그 사람 얘기하니까 첫 섹스했을 때가 떠오른다. 첫 섹스 했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갑작스런 기습공격에 말문이 막혔다. 참. 이럴 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전 그런 경험 없어요,라고 이야기해야 좋아할까, 아니면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좋아할까, 정말 첫 섹스의 기분이 궁금해서 이런 질문을 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섹스 경험이 있는지를 떠보는 걸까,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나와 있는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게 잊지 못한 구 여친과의 첫 섹스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 남자 앞에, 내 대답이 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고민하는 내가 있었다.
그와 나는 공교롭게도 서로 아주 가까운 곳에 살았다. 전철로 두 정거장, 차로는 10분 이내 거리.
나와 그와 석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서 먹고 마시고 놀았다. 그리고 석이를 데려다주고 나를 내려주고 그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석이를 데려다주고 오는 길. 눈이 소복하게 내렸고, 가로등이 노랗게 비추고 있었다. 탄성을 지르는 나를 거기에 내려주었다. 그리고 함께 걸었다. 뽀드득뽀드득.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깊은 밤 단둘이 걸었다. 손이 시려워 손도 잡았다. 바람결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입에 문 채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을 보며 거렁뱅이 같다며 박장대소하고 웃었다.
하루는 내가 먼저 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 택시를 타는 것을 꺼리지만, 택시밖에 탈 수 없었던 시간이었다. 석이에게 전화가 왔다.
"누나, 잘 가고 있지? 걱정돼서..."
"응, 걱정 마. 고마워."
석이는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했다. 듣게 될 말이, 어쩐지 들으면 곤란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찰나였다.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 다행이다.
"어? 석아, '한'한테 전화 왔다. 이따가 다시 통화해."
"여보세요? 아! 석이가 전화했어요. (....) 무슨 얘기했냐고요? (....) 음... 잘 들어가고 있냐고."
같이 있었을 그 둘이 번갈아가며 전화를 한 것은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어렴풋하게 눈치채고 있었다.
그는 평일에 처음으로 휴가를 한 번 써보고 싶다고 했다. 몇 년 만에 써보는 휴가라고 했다.
같이, 제부도 갈래요?
고민할 거리도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전 여친의 그림자가 사라져 가는 게 보였다. 나를 통해서. 그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것은 누가 봐도 나였다. 그렇게 우리는 석이도 모르게 몰래 만났고, 그것은 석이에게 비밀 아닌 비밀이 되었다. 왜 나도, 그도 말하지 못했는지를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카톡이나 전화를 했다. 특강을 마치고 차로 1시간 걸리는 자취집까지 데려다 주기도 했고, 주말이면 함께 스윙 연습을 했고 다음날 또 만나서 먹고 마시고 놀았다. '연하에게 주는 연하장'이라며 이따금씩 편지도 써주었다.
그랬던 우리에게 균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새로운 기수가 들어온 후 전체 엠티를 갔던 때였다. 어떤 여자가 적극적으로 그에게 구애를 했다. 눈에 띌 정도로. 동호회 내에서 우리는 한 무리로 보였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사이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당사자인 나 역시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썸 타는 사이인 것은 분명한데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고 팽팽한 긴장감만 몇 달째 가져가고 있었다. 닫힌 마음을 서서히 열어가는 그와 매사에 조심스러운 나의 조합이었으니. 어쩌면 누구 하나 머리에 박힌 안전핀 하나 뽑고 미친 듯이 소화기를 잡고 흔들어야 했다.
그녀는 단아했지만, 공격은 저돌적이었다. 그가 있다면 어디든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라며 곧장 달려갔다. 살얼음에는 온수 한 방울이면 족하다. 꽁꽁 얼었던 그를 천천히 녹인 것은 나였지만 살얼음 상태인 그를 무장해제한 것은 그녀였다. 나는 몇 달이 걸렸지만 그녀는 몇 주로 충분했다.
그의 흔들림은 나뿐 아니라 석이의 눈에도 띄었는지 '저 형 요새 이상해졌지?'라고 묻곤 했다. 우리 셋의 만남의 빈도는 눈에 띄게 줄었고, 재능기부를 마친 어느 토요일, 그는 새로운 그녀와 만나 함께 연습장에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나는 항의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지만, 어쩐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제서야 마음이 조급해졌다.
함께한 술자리 끝,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그는 나에게 기대었다. 복잡한 심정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의 머리를 밀쳐 냈지만, 어느새 가만히 어깨를 내어주었다. 집 근처에 다다르자, 그가 나에게 물었다.
"특강 하나, 같이 듣지 않을래요?"
마지막 확인이었던 것 같다. 자신도 흔들리는 마음에 확신이 없었던 것이었으리라. 오랫동안 차게 얼었던 그의 마음은 이미 녹아내렸다. 나를 통해서. 마지막 안전핀을 뽑을 일만 남았는데, 그때 적극적인 그녀가 그 핀을 뽑아버렸던 것이다. 인어공주는 나인데, 결정적 장면은 결국 다른 공주의 몫인 셈이다. 하지만, 인어공주의 공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어쩌면 인어공주가 자신을 잡아주기를 바랬던 것이 아닐까.
나는 택시에서 내렸고, 그는 창문을 내려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