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실패소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3
그는 택시를 세웠다. 택시 문이 열리고 그는 나를 안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다시 택시에 올랐고 우리 집이 아닌 그의 집 앞에 내렸다.
자주 와서 익숙했던 집. 그 집에 우리 둘이 서 있다.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갰다. 머리를 스치는 수많은 말 대신. 그의 수염은 따가웠지만, 그의 입술은 보드라웠다. 설핏 담배냄새도 났다. 그간의 고독이 고스란히 전해오는 듯했다.
격렬하고도 부드러운 두 입술의 만남은 '탕'하는 총성과 함께 머릿속의 팽팽했던 끈을 끊으며 충분히 서로를 달구었고, 나는 신음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레 서로의 몸을 탐색하고 아주 천천히 서로의 가장 깊은 곳에 맞닿았다. 머리끝에서 찌릿, 하며 긴 숨을 토해냈다.
"어려웠어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다시 이어갔다.
"내가 시작했지만 쉽게 당겨올 수가 없었어요. 조심스러워서. 혼란스러워서. 흔히 말하는 것처럼, 남자는 그렇게 용기 있고 능동적인 동물이 못돼요. 그저 먼저 신호만 보낼 뿐이죠. 거기까지예요. 본능을 숨길 순 없으니까. 이후부터는 좀 더 직진할 수 있는 기질의 '사람'들이 있을 뿐. 반드시 남자가 아니라. 당신이 좋아서 매일 연락하는 건 할 수 있는데 '당신이 좋아'라고 먼저 말하기는 어려웠어요. 내 안에 갇힌 칼을 스스로 꺼내지 못하고 꺼내 주기를 기다릴 뿐이에요. 나도 그런 류의 사람이라... 좀 더 빨리 당기지 못해서, 미안... 해요."
몸도 마음도 충만해지는 순간이었다. 채 식지 않은, 기분 좋게 따뜻한 서로의 몸을 끌어안고, 우리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눈을 뜨고 나니 내 방이다. 어떻게 된 거지? 꿈을 꾼 건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상상 속의 나처럼 그의 손을 잡고, 택시를 타고 머뭇거리지 않고 그의 집으로 갈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차창 밖으로 내민 그의 손을 잡지 못했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와 펑펑 눈물을 쏟았다.
"평일에는 특강 듣기 어려워요. 자취집에서 너무 멀어서."
그가 데려다 줄 거라는 말을 해주기를 바랬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던진 제안에 '내가 자신을 잡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었듯, 나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우리 서로는 상대에게 바라기만 했지, 정작 자신은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그 둘이 공식적으로 연애를 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그 후 결혼 날짜를 잡았다는 말도 들려왔다. 결혼의 인연은 따로 있는 게 분명하다, 는 생각을 하면서도 '인어공주는 나였는데' 하는 아쉬움을 버리기는 어려웠다. 그와 결혼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내 연애가 실패해서이다. 어차피 인어공주 스토리는 새드엔딩이 아니던가. 그리고 나는 심지어 물거품이 되지도 않았다.
아... 도대체 왜 나를 그 동호회에 다니라고 한 거야 그 언니는. 오랫동안 썸만 타고, 썸 증후군으로 허덕이고 울고 불고를 반복하는 나를 보고 친한 언니가 스윙 동호회를 다녀보라고 권했다. 그간 나랑 엮였던 남자들은 왜 그리도 애매했던 건지 모르겠다.
전 남친들과의 연애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거의 모두 내가 다가오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때는 그럴 만큼 젊고 용감했었다. 마음에 드는 오빠에게 '여보'라며 장난스런 문자를 보내다 보니 그 오빠가 고백을 했고, 동아리에서도 회장이던 애한테 어째 저째 고백을 받아냈었다. 그런데 나이가 뭔지 고백을 받아내던 용감한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남자가 적극적으로 다가와주기만을 기다리는 소심하고 수동적인 나만 남아있었다.
그즈음 4살 연하의 남자 '류' 때문에 정신을 놓고 지냈다. 와인 동호회에서 만난 4살 연하의 수의사였던 그와 뭔가 잘 풀리지 않던 때였다. 잘 풀리지 않는다고 표현하기에는 사실 그와 두 번 정도 만나서 식사를 하고 뮤지컬을 본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는 연락이 두절되었다. 아마 4살 연상의 내가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아무튼 즐겁게 만나고 잘 헤어졌는데 결과가 별로이게 되자, 탓할 건 나이밖에 없었다. 그때 다가온 남자가 '유진'이었다. 하필 그도 나보다 4살 아래였다. 공교롭게도. 그리고 나이부터 시작해 우연치고는 인연 같은 일들이 자꾸 생겨났다.
2011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색채의 마술사 샤갈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가 열렸다. 나는 대학 동기와 함께 그 전시를 보러 갔다. 그날 저녁, 유진에게서 쪽지가 왔다.
"나, 그쪽 봤어요."
"거짓말."
"진짜라니까. 오늘 알록달록한 스웨터 입었잖아요."
그의 말이 맞았다. 나를 지켜본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티켓을 찍은 사진을 내게 보내왔다. 같은 날짜였다.
그날 이후로 그의 별명은 '샤갈남'이었다. 어쩜 나를 헤매게 했던 남자와 나이도 같고, 내가 간 전시회에 그도 같은 시간에 가서 나를 만날 수 있었을까. 참! 그가 내 얼굴을 알았던 것은 싸이를 통해서였다. 직장인 무슨 모임이었던 것 같은데 그곳의 홈피가 싸이랑 연동이 되어서 글쓴이의 아이콘을 누르면 싸이로 연결이 되었다. 어쨌든 같은 날 전시회를 갔어도 시간이 맞지 않으면 만나기 어렵고, 층만 달라도 마주치지 못하는 것인데, 그는 그날 나를 보았다. 이것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기 어려운 우연이었다. 이것은 인연이다.
그는 내 나이를 듣고 당황해했지만, 그래도 나를 만나보고 싶어 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는 듯했다. 싸이로 봤던 사진 속 얼굴과 그 혼자였지만 멀리서나마 봤던 나의 실물이 그다지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었겠지. 여러 차례 접선 실패 후에 우리는 당산역 스타벅스에서 만났다.
그때까지도 '류'에 대한 미련이 남았던 나는 그냥 하루 잘 만나고 오자는 생각으로 전철에 몸을 실었다. 김포에 사는 그는 9호선을 타고 당산으로 온다고 했다. 먼저 도착한 나는, 이어폰으로 뮤지컬 넘버를 듣고 있었다.
이윽고 도착한 그와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2층으로 올라갔다. 싸이에서 보던 얼굴과는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 나름대로 매력이 있었다. 그날 나는 검은색 이너웨어에 브라운 가죽재킷을 걸쳤는데, 조명 아래 앉으니 검은색 이너웨어 사이로 살짝 가슴선이 비쳤나 보다. 그가 그곳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아웃도어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곧 해외 발령이 난다고 했다. 그는 입담이 좋았다. 느린 말투 사이에 남자다움과 순수함이 묻어났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점점 '류'는 과거의 그림자로 변해가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징조였다. 드디어 헤어질 시간. 다음에 또 만나자는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한 달 후에 필리핀 지사 매니저로 가기로 한 그였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나에게 문자를 보내왔다.
"우리, 사귈래요?"
"곧 해외로 간다면서요."
"그렇... 죠...? 그래도 한번 잘 생각해봐요."
이렇게 빠른 전개는 오랜만이다. 순간 설레었다. 거절하지 말 것을 그랬나.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그를 만났다. 그는 손을 잡고 걷자고 했다. '두 번째 만남'에 그 같은 제안이 빠른 듯했지만 싫지 않았다. 같이 연탄불고기를 먹고, 비디오방에 갔다. 커피를 마실까 영화를 볼까 고민하다가 결국은 비디오방을 택했다. 당시에 비디오방은 영화를 보기도 했지만 연인들의 사랑방을 대신한 공간이기도 했다. 지금의 멀티방처럼 갖가지 장비를 갖춰 놓은 것은 아니고, TV와 누울만한 소파, 그리고 화장지와 방향제가 전부였다. 비디오방마다 다르지만 커튼이 설치된 곳도 많아서 은밀한 몸의 대화가 오고 가는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 만남인 그와 그곳을 가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를 고민했으나 나 역시 오랫동안 몸이 데워지지 않았으니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키스 한 번쯤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는 어디까지를 상상했는지 알 수는 없다.
"커피 마시러 갈까요, 영화를 보러 갈까요?"
"음... 글쎄요.... 필리핀 가기 전에 하고 싶은 거 해요."
"음... 영화 볼까...."
영화를 보려면 영화관에 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스럽게 제일 먼저 보인 비디오방에 들어갔다. 어떤 영화를 선택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설령 기억이 난다고 해도 영화 내용을 도통 모르겠다. 거의 보지 못했으니까.
두 번째 만남에 나란히 누워 있으니 몸이 살짝 긴장되었다.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가 내게 기대는 척하며, 귓가에 자신의 코를 갖다 대고 나의 머리 냄새를 맡았다. 나는 눈앞만 직시했다. 침 넘어가는 소리가 그에게 들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아, 4살 누나가 이렇게 긴장하는 모양이라니. 남자들이 누나를 만날 때는 좀 더 적극적으로 리드하기를 바라는 거라고 했는데, 내 인생에 연하와 누워 있는 게 처음이다 보니 어느 때보다 긴장이 되었다. 그의 숨소리가 귓가에 거칠게 들릴 즈음 더는 그 숨소리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고 우리는 부드러운 키스를 나눴다. 아, 도대체 얼마나 오랜만인가. 이 느낌. 저 아래에서 뜨끈한 액체가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진다. 그의 아랫입술을 빨았다. 아기가 젖을 빨듯이 보드랍고도 강렬하게. 그의 손은 이윽고 나의 가슴에 얹어졌다. 그리고 내 옷을 들춰 브라 안으로 손이 들어오려고 했다.
연하가 만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 짜릿했다. 무려 4살이나 어린. 그리고 나는 오랜만에 키스를 했고, 그가 내 몸을 더듬고 있다.
무언가 시작하려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