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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Nov 01. 2019

아무래도 거기까진 안 되겠어.

(연애실패소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5




개자식. 아마 그 개자식이었던 거 같다. '김 종'. 나보다 한 살 연하였다. 여자 친구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했다.


"같이 순두부찌개를 먹자고 해서 나갔는데, 이제 그만 만나자더라구. 내가 잡았는데, 이제 그만 좀 하라고 소리까지 지르면서 일어섰어. 그 바람에 물어 엎어졌는데, 더 비참하더라."


담담하게 이야기했지만, 듣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비록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잔인한 이별 이야기는 동정심을 유발하기 마련이다. 도전의식이 없는 나는, 여자 친구가 있다고 하면 바로 관심 OFF였다. 그런데, 그 여친랑 헤어졌다니. 그로부터 얼마 뒤 '김 종'은 나에게 사귀자고 했다. 아, 지나고 나서 기억해보니 이미 전에도 나한테 사귀자는 식으로 말했었는데, 여친 있는 놈이 말해서 농담이라 여겼던 것 같다. 아무튼 나는 그에게 시간을 달라고 했다. 동정심과 호감을 구분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에피톤 프로젝트'의 음악을 보내주었다. 그런 감성의 남자라면, 한 번 남자로서 알아보고 싶었다. 



그는 이름만 대도 익히 아는 대기업 건설사인 PS의 조경 파트에서 근무했다. 그에게 듣기로는 우리나라에 조경학과가 있는 대학이 많지 않다고 했다. 건설업계가 불황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라면 먹고사는데 문제는 없어 보였다. 계산적이라고 할지 몰라도 그때는 결혼을 배제하고 누구를 만나기는 어려운 나이였다.  그의 회사는 가산디지털단지에 있었는데, 외근을 핑계로 평일에도 가끔 나를 보러 오곤 했다. 밖에 나와도 사원증을 목에서 빼지 않았는데 아마 그 자신도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꽤 커 보였다. 그의 사원증 목걸이에 새겨진 초록색 PS의 로고가 빛났다.


 



정식으로 사귀기로 하고 처음 만난 곳은 신도림역이었다. 그곳 10번 출구로 나가면 공원이 하나 있는데, 우리는 저녁 식사 후 그곳을 걷기로 했다. 그는 내 허리에 자신의 팔을 감고 내게 바짝 밀착하여 걸었다. 그리고 헤어질 때쯤 그는 뽀뽀를 해달라고 했다. 나는 거절했다.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공원에서 무슨 뽀뽀란 말인가. 그냥 볼에 쪽, 하는 정도만 해준다고 했지만, 그는 기어이 내게 졸라댔다. 하지만 안된다.



하루는 남영역 곱창골목에서 저녁을 먹는데 그의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응, 지금? 남영역. (......) 응, 여자랑.  (......) 응."


통화 내용은 잘 알 수가 없었으나, 나를 그냥 '여자'라고 지칭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나를 여자 친구라고, 왜 이야기하지 않았어?"


친구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은 떳떳하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응? 아~ 헤어진 지 얼마 안 됐는데 금방 또 다른 여자 사귄다고 하면, 아무리 친구라도 '쓰레기'라고 생각할까 봐... 근데 미안, 니 생각은 못했다."


그랬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를 원망했다.


"그럼, 걔들 지금 술 마시고 있다는데 같이 갈래?"

"지금?"

"응, 지금. 너한테 미안해서. 내 친구 보여줄게."


친구까지 소개시켜준다면 신뢰감이 든다. 남자가 친구나 가족을 소개시켜준다고 했을 때는, 상대 여자에게 확신이 있다는 증거이다. 오래 만나도 지인들에게 소개를 안 시킨다는 것은 상대가 부끄럽거나 뭔가 켕기는 게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 확인해 보자.


그의 차를 타고 친구가 있다는 사케집으로 이동했다. 안에는 이미 그의 동창이라는 남녀가 있었다. 스튜어디스라는 그녀는 피부에서 광이 났다. 우리는 인사를 나누었고, 그녀는 옆의 친구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속삭였다. 그러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야, 너 이뻐졌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동창 간 대화가 열이 올랐다. '김 종'이 한 살 연하이니 셋 모두 나보다 동생들이다. 동생들의 대화에 함부로 껴드는 것은 어른스럽지 못하다. 그저 조신하게 그리고 인자하게 웃었을 뿐. 친구들도 소개받았으니 누가 뭐래도 나는 그의 공식적인 여자 친구였다. 



가끔씩 자신의 회사가 있는 가산역에 보러 와달라고 했고 나는 기꺼이 그렇게 했다.  어느 날은 서울역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나서 그가 말했다.


"우리 집에 가볼래?"

"그래!"

"근데, 우리 집에 오면, 나 못 참을지도 몰라."

"크크크"

"진짠데, 안 믿네."


남자 혼자 사는 집 치고 깔끔했다. 모던한 색깔로 통일된 침구와 화분 2개가 눈에 띄었다.


"얘는 이름이 김, 얘는 종, 이야."

"크크크. 식물들도 이름이 있어?"

"그럼, 있지. 외로운 집에서 나한테 엄청 든든한 애들이야."

"재미있다."


그는 알약 하나를 입에 털어 넣었다. 뭐냐 물었더니 별거 아니라고 했다. 뭐였을까. 혹시 발기부전? 아니면 조루? 나에게 먹이는 건 아니니 괜찮겠지.


그는 나를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천천히 키스를 했고, 나의 원피스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하필 그날따라 단추가 많은 원피스를 입었다.


"와아, 예쁘다."


드러난 나의 가슴을 보며 그는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첫 키스였다. 그와 나눈. 첫 키스를 하는 날, 처음으로 몸을 섞게 되다니. 나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안된다. 그를 밀쳐내고 몸을 일으켰다.


"미안. 아무래도 안 되겠어."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단추가 많은 옷을 입은 것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는데 왜 나는 그를 거부했던 걸까. 


'키스'인 것 같다. 씁쓸한 담배 맛이 느껴졌고 오가는 혀의 교류에도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사랑이 결여된, 감정은 없고 본능만 살아있는 기계적인 키스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달콤하지 않은 첫 키스는 나에게 매우 큰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그는 나의 반응에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어색해진 공기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얼른 옷을 챙겨 입고 서둘러 그의 집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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