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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Nov 01. 2019

바람병자의 종말

(연애실패소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9




김종의 회사 앞으로 갔다. 장문의 편지를 써서 들고. 내가 할 말을 다하고 오려면 말이 아니라 글이어야 했다. 게다가 그 놈의 쌍판대기를 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뺨 한대 후려갈긴다고 해서 속이 편해질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우아한 복수를 하기로 결심했다.


편지라고 하면, 예쁜 편지지에 정성을 담아 쓴 모양새를 상상하겠지만, 절대 아니다. 컴퓨터로 타이핑 A4를 인쇄해서 누런 서류봉투에 넣었다. 겉에는 대문짝만한 크기로 'P•ES건설 김종氏'라고 꾹꾹 눌러 썼다. 그리고 그의 회사 1층에 있는 카페에서 케이크 한 판을 샀다. 심부름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저기, 죄송한데... 이 케잌을 혹시 위층 사무실에 배달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배달 음식점도 아니고, 카페에서 케이크 배달이라니 터무니 없는 주문에 알바생의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세상에 별 이상한 년도 다 있다,라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아... 그게 거래처 사람인데, 좀 감사한 일이 있어서 전해드리고 싶은데 직접 가서 드리기엔 괜히 이상할 거 같아서요..."


내가 거래처 사람인 그를 좋아하는데 차마 직접 주기는 부끄러우니 당신이 대신 메신저가 되어 줄 수 있냐는 분위기를 풍긴 것이다. 그랬더니 경계하던 알바생의 눈초리가 배시시 웃는 눈으로 바뀌었다. 성공이다. (너도 참 딱하다. 니가 이렇게 좋아할 때이더냐.)


"이게, 그 분 전화번호 이구요. 그냥 사무실 앞으로 가셔서 문 앞에 배달 왔으니 잠시 나오라고 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아! 그리고 지금 바로 말고요, 1시에 부탁드려요. 이건, 제 전화번호."


시간을 지정해야 그의 반응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받았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면서도 주문은 디테일하게 넣은 이유이다. 그랬더니 알았다며, 아주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리고 살다보니 이렇게 재밌는 일도 다 있다는 표정으로, 내가 너네 둘의 사랑의 메신저야 고마워 해야해, 라는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카페를 나왔다.


근처에서 조금 기다리다보니 케잌 배달을 마쳤다는 문자가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제 알았냐? 니 여자친구가 이 모든 사실을 알았다는 것, 니 회사가 PS건설이 아니라 그 하청인 P•ES라는 것, 니가 새로 문 먹잇감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


전화는 당연히 받지 않았다.


너도 애가 좀 타봐야지. 나를 그렇게 우습게 본 죄다. 그러자 문자가 왔다. 할 말이 있다고. 또 무슨 눈물 겨운 변명을 해대려고? 내가 추측해볼까?사실은 내가 좋았다고, 결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아니! 나는 너의 거짓말에 다시는 속지 않아. 그냥 바람둥이 개새끼 뿐이야. 이 씹새야!




PS전자에 다니는 친구, 기석을 만났다. 이 일 해결의 일등공신. 홍대였고, 케쥬얼한 사케집이었다.


"고생했다, 야."

"고마워. 도와줘서. 너 아니었음 복수도 못하고 당하고 끝났을지도 몰라."

"야, 근데 너도 참 대단하다. 그렇게 복수할 생각을 하고."


바람이 쌀쌀하게 느껴지는 가을 밤이었다. 사실 되게 친한 친구도 아니다. 친한 친구의 친구인데, 둘은 재수학원에서 만났다고 들었다. 또다른 내 친구는 그 모임의 다른 남자와 연애를 했었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어보니, 기석이랑 살짝 썸 같은 걸 타던 때가 있었다.


시작은 기석이 소개팅을 해주러 모두가 모였던 때였다. 나의 회사 동기를 소개시켜주러 나갔던 자리에 기석이를 포함해 그 친구들이 모두 함께 있었다. 물론 내 친구 커플도. 우리는 함께 식사를 했고, 노래방도 갔다. 대학시절 만났던 친구의 친구들은 대학시절과 똑같이 여전히 잘 놀았다.


대학시절 나의 캐릭터는 수줍음이 많고 낯가림이 심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제 더이상 소심하고 내성적인 여자가 아니었다. 남자들은 의외로 자신감이 넘쳐서 자신을 잘 드러내는 여자에게 매력을 느낀다. 사실 여자들도 자신이 스스로 매력있다고 느낄 때 더 자신을 잘 어필할 수 있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 소개팅 날 나는 이전과 다른 나의 매력을 발산했다. 대학 시절의 내가 아님을 구태여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하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소개팅하려 나온 기석이 오히려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먼저 가보겠다는 회사동기를 전철역까지 데려다 주려고 나오면서 그에게 같이 다녀오자고 했다.


전철역에서 돌아오는 길에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후로 친구를 통해서 기석이 나에게 관심을 보인다며 다음에 한 번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PS의 노예로 바쁘게 살면서 지내다 오늘에서야 다시 만난 것이다.


 "아... 여자친구가 우리 집에 와서 씻고 나오는데, 등 뒤에 부항 자국이 시커먼거야. 근데, 난 왜 그게 그렇게 싫던지. 하지 말라고 하는데 끊을 수가 없대나 뭐래나..."


그렇다. 기석에게는 여자친구가 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뭔가 시들시들한 분위기였다. 술 기운을 식히려 사케집을 나와 골목을 걸었다.


"주말에 야구 보러 갈래?"


헤어지는 길목에서 기석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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