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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Nov 01. 2019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연애실패소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8




올백으로 묶은 머리의 숱이 빼곡하다. 이마가 볼록하고 이마선도 바르다. 세 보이긴 하지만 가만히 보니 생김새가 매력적이다. 김종 그 자식은 저렇게 매력적인 여친을 두고 왜 그렇게 바람을 피우고 살았을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하긴 바람은 병이지. 상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냥 심리적인 질병일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제 말씀해 보세요."

"김종을 처음 만난 건 홍대였어요."


"아, 잠깐만요. 몇 살이시죠?"


자기 남친의 이름을 '00 씨'도 생략하고 그냥 부르니 거슬렸나 보다. 하지만 나보다 10살이 더 많아도 그 개자식에게 '00 씨'를 붙여서 말하기는 죽어도 싫었다. 내 나이를 듣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또 뭐지. 의문의 1패를 한 것 같은 이 기분. 그놈이랑 고작 한 살 차였는데 어르신 대접받은 기분이었다.


"아, 네. 계속 하세요."


접근부터 잠적까지 거짓말한 모든 것을 순서대로 말해주었다.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믿게 하려면, 섹스한 것 까지 말해야했다. 굳이 잡고 싶은 대상도 아닌, 게다가 남의 남자와의 섹스를 떠벌릴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순두부 집에서 헤어지자고 하고 일어서다 물이 쏟아진 일이 있으세요?"

"아뇨. 그냥 같이 자주 가는 순두부 집이 있기는 해요."

"헤어진 상태도 아니라는 거죠? 헤어지자고 한 적도 없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가 그 모임 싫어했어요. 거기에서 예전에도 한 번 그랬어서. 그래서 저도 안나가고, 나가지 말라고도 했고요. 아무래도 여자남자 모이면... 그나마 '그 언니'만 믿을 만해서 연락하고 지냈어요."


확실히 처음은 아니었나 보다. 이야기하는 내내 표정과 말투에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았다. 나라면 배신감에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했을텐데 그녀는, 초연해 보였다. 계획범죄에 당했던 나만 분노하고, 그녀를 동정하고 있었을 뿐.


"아휴, 어쩌다가 김종같은 남자를 만나서 그 고생을 하셨어요."


그녀는 오히려 나를 동정했다. 어? 뭔가 이상한데? 가여운 것은 내가 아니라 분명 당신이잖아. 결혼을 약속한 남친이 다른 여자랑 바람을 피워서 섹스까지 했다는데, 그리고 또 다른 사냥감을 찾아서 나서는 쓰레기라는데, 그런 놈의 여친이 더 가여운 것 아닌가.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에요?"


헤어질거라는 답을 기대했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 내 복수가 끝이 난다고 생각했다. 안쓰러운 그녀는 그런 놈에게서 해방되어야 하고, 그간의 바람에도 참아준 착한 여친으로부터 버림을 받아야 제대로 한방 먹이는 것이다.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내가 한 방 먹었다. 


아니 사실 그게 옳은 대답이기는 했다. 자신의 남친과 바람난 여자 앞에서 헤어질 거라는 말은 그녀 스스로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자존심 문제이다. 게다가, 그녀는 아직은 남친을 믿고 싶은 마음도 있는 듯 했다. 그래서 그놈이 인정을 하든 변명을 하든 그놈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결정을 하겠다는 뜻이다.


내가 경솔했다. 


내가 낄 문제도, 내가 할 수 있는 질문도 아니었다. 나와 그 둘 사이에 확실한 선이 있다는 것을 왜 진작 몰랐을까. 그놈의 잘못을 삿삿히 알리면서 그녀도 일순 나의 편이라고 착각을 했다. 하지만, 내 섣부른 판단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대단한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쓰레기 같은 놈을 지 않는 그 여자가.


이번에는 김종한테 알릴 차례다. 그놈은 이제 내 전화도 받지 않는다. 소위 내 몸까지 '따먹었으니', 이제 가치가 없어졌겠지. 이래서 여자는 주체적이어야 한다. 나는 거리낄 것 없는 싱글 아닌가. 누군가와의 섹스로 다른 누군가에게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되는내가 그런 놈을 따먹고 버렸어야 하는데, 괘씸하다. 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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