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nny Lane is in my ears and in my eyes. There beneath the blue suburban skies.
I sit, and meanwhile back.
Penny Lane은 내 귀 안에 있고 내 눈 안에 있어요. 푸른 교외 하늘 아래 나는 그곳에 앉았고,잠시 있다 돌아왔어요.
영국 리버풀, '페니레인(Penny lane)'. 비틀스의 멤버인 폴 매카트니와 존 레넌이 어렸을 때 살았던 거리다. 무수한 사람들이 줄지어 에비로드 횡단보도에서 사진을 찍는 것처럼, 이제 세상에 비틀스는 없지만 영국 어딘가에 여전히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그곳 그 거리를 머무는 사람이 있다.
노래 속의 이발소 아저씨, 은행원, 소방관이 있던 페니레인 거리. 사람들은 비틀스의 어린 시절 동네에서 자신이 가장 젊었던 그 시절의 자신과 그 동네를 떠올린다.
비틀스, 그들은 그들의 젊은 시절. 자신이 살았던 그 거리를 묘사하던 청춘의 노래가 지금까지 불러질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그렇게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청춘, 그 시절에 런던에 서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예상하지 못한 순간,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다.
어린 시절, 나의 동네는 한창 개발이 시작되던 신도시였다. 나의 엄마와 아빠가 새 집을 지어 무던히 집 안 밖을 닦던 것처럼 그곳엔 꿈 많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 속에서 나는 빽빽한 교실 한편에 자리를 둔 아이였다. 그렇게 일곱 살에 이사 왔던 동네를 지금의 남편과 함께 살기로 약속하기 전까지 살았으니, 이스탄불에 살고 있는 지금도 나는 눈을 감아 친정 동네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낸다.
그 시절의 나는 학교를 마치고 무연고 묘지를 지나, 작은 구멍가게에서 팔던 백 원짜리 아이스크림 집어 친구와 함께 집으로 가던 길. 그때의 그 거리는 을씨년스러운 무덤과 어울리지 않게 봄날의 벚꽃이 휘날렸고, 여름이 되면 비로 물컹해진 진흙으로 질퍽질퍽해진 길에 지나 학교로 갔다.
8차선 도로를 넘던 우리 앞에, 군인 아저씨인지 경찰 아저씨 모를 그들의 경비소가 있었다. 떨어진 낙엽을 곱게 잡아 실내화 주머니에 집어넣고, 차에 치일까 겁을 내는 친구의 손을 잡아 신호등이 없는 그 도로를 그렇게 세차게 달렸다. 눈발이 흩날릴 매서운 추위 앞에서도 그 길에서 우리는 그 어떤 편견도 두려움도 없이, 이제는 아이 둘의 엄마인 그녀와 나는 영원히 우리가 그때의 아이일 것처럼 그 거리에서,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를 낳고 나는 아파트를 샀다. 나의 퇴직금과 남편이 모아둔 돈을 탈탈 털어, 부모님들의 도움 없이 아파트를 샀다. 신혼 시절 전세살이를 청산하자는 나의 주장에 흔들림이 없던 그도 아들이 커가고, 이제는 사야 한다는 나의 주장에 마지못해 우리는 첫 집을 샀다.
아들이 다닐 초등학교가 보이는 우리 집, 나의 부모님이 그러했듯 나는 그 집에 나의 청춘을 모두 털어냈다. 그리고 나는 아들과 그 집의 거리를 걸었다. 영원히 이곳에 머물 것처럼, 그리고 그곳에서 삶이 익숙해질 무렵 우리는 그렇게 갑자기 이스탄불에 왔다.
코로나 19가 이미 한 차례 유럽을 휩쓸고 간 2022년의 이스탄불. 겁 많은 나는 아직 어린 아들을 데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었다. 한국에선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이 되던 공간에서,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 오히려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스탄불에 도착하니 그 시절의 대중교통 이용은 내게 도전에 가까웠다.
2022년 5월 1일
온 가족이 코로나19를 견디고 만난 런던의 지하철, 언더그라운드 입구에는 도시의 부랑자가 앉아 있다. 어느 대도시가 그러하듯 사람이 사는 모습은 대체로 비슷하다. 사람이 몰리고 많으면 삶의 다양한 모습이 중첩되는 법이다.
모든 게 처음인 아들은 제 생애 처음 만난 부랑자의 모습에 놀라, 언더 그라운드를 더 이상 타지 않겠다고 외쳤다. 십 년 전의 런던보다 보다 밝고 깨끗해졌건만 아들의 눈에는 거리에서 종이상자를 깔고 앉아 있는 그들의 모습이 낯선가 보다.
그래, 나는 남편과 아들의 손을 잡고 오이스터 카드를 들어 다른 길로 떠난다. 세상의 길은 여러 가지니까. 난 내가 잡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아들과 언더그라운드를 벗어나 도로 위의 버스 정류장에 선다. 런던에선 흔하디 흔한 이층 버스로 올라간다. 아들을 잡고 유모차를 접어 올리느라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잡고 이층으로 올라간다. 다행이다. 이층 앞 좌석이 비었다. 남편과 아이가 안전하게 앉았다. 나는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아직은 참으로 작은 아들, 이 겁 많은 네가 크면 어떤 모습일까 하는 궁금함을 참고, 비슷한 뒤통수로 앉아서 런던의 도심을 바라보는 남편과 아들, 둘의 모습이 정겹다.
그렇게 나는 오이스터 카드*를 들어, 아들과 남편의 손을 잡고 언더 그라운드가 아닌 다른 길을 찾아 나선다. 때론 이 길이 어색하고 힘듦이 있더라도 그와 그리고 너와 함께라면 꽤 괜찮을 테니까. 나는 다시금 버스 정류장에서 손을 들어 이층 버스를 맞이한다.
' The world is your oyster.*'
'모든 기회는 열려있다.'
*오이스터 카드, 영국의 교통 카드. 영국은 박물관은 공짜지만 교통비가 굉장히 사악합니다. 특히 보증금이 7파운드로 현지(영국)은행 계좌가 있다면 오이스터 카드에 충전한 금액을 환불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환불이 불가능합니다. (영국에 살지 않는 이상, 영국에 은행 계좌가 있을 리가 없어요.:)) 4일 머물 경우, 보증금을 포함하여 30파운드 정도를 충전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7파운드를 환불받을 수 없습니다.
*이 표현은 셰익스피어의 희극인 'The Merry Wives of Windsor(윈저의 즐거운 아내)'에 피스톨(Pistol)이 하는 대사로 'Why then the world’s mine oyster, Which I with sword will open.'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굴은 실제로 템스강에 살고 있으며, 영국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입니다. 굴은 이렇게 영국에선 흔한 음식이지만 한편으론 열어서 먹기가 참으로 힘든 음식입니다. 그래서 'oyster'는 영국인들에게 인생은 참으로 힘들지만, 계속 노력한다면 기대하지 않은 보상, 기회를 받을 수 있다는 비유로 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