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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네 Oct 16. 2024

다시 우리 집으로

다시 일상, 아니 여전히 여행 중인 우리(에필로그)


2024년 10월  11일


드러렁, 드르륵, 쾅쾅쾅 쾅.

  4년 전, 이스탄불에서 세입자되곤 처음 만난 그 녀석. 첫인사는 '털털털'이었다.  녀석이 움직일 때마다 문을 꼭 닫아야만 했던, 한국산과는 퍽 다른 큰 목소리, 이걸 듣고 튀르키예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 건지. 녀석의 소리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그 소음 속에서도 나는 지난 3년 동안 이 녀석을 수리하기 위해 여러 튀르키예인을 만났고, 조금씩 돈도 써가며 그 녀석을 다시 살려냈다. 그래도 굉음을 내며 빙빙 돌고 있어 다행이었다.

 

 비싸긴 하지만 오래된 집이라, 뒤의 뜰에 빌라 전체의 공조기 고장을 수리하기 위해 기술자들은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낮엔 단수도 하고, 며칠째 아저씨들이 땅을 헤집어 놓았길래, 당연히 뒤뜰 땅을 파는 소리라 생각했건만. 터진 밖이 아니라 안이었다.

 녀석은 전원이 켜져 있는 채, 하수구가 없는 유럽식 화장실에다 자신이 머금고 있던 물을 마구 뱉어내고 있었다. 흔들리던 몸에서 쏟아져 나온 물은 화장실 바닥은 물론 거실까지 쳐들어왔다.

흡사 전쟁터의 폭발음과 같은 굉음을 내며 그는 죽지 않고, 계속 빨래와의 전쟁을 치르겠다며 집 안으로 물을 마구 뱉어낸다.


 쾅쾅쾅 쾅!

 여기도 전쟁 났나. 아휴.

 으악! 이 놈의 세탁기!

 

 물바다가 된 집에서 전원을 내리고, 그래도 헐레벌떡 아들을 픽업하고 돌아와, 위기상황의 집 상태를 본 어린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아, 엄마가 바닥에 물 닦다가 혹시 감전되면 아빠한테 전화해라. 사랑했다고 전해라."

 "네, 엄마. 그런데 아빠한테 전화 어떻게 해?"

 "에고. 아들! 알았다."

 


 

'프라하-이스탄불행 비행기를 타고 돌아와 수화물을 찾고, 이스탄불 공항의 장기 주차장에 있는 차에 짐을 실어 이스탄불 집으로 돌아온다. 뻑뻑한 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 현관 앞에서 캐리어를 열어 여행동안 몰아두었던 빨래를 꺼낸다. 나는 밥을 안치고 남편과 아이는 부산스레 목욕을 하고, 이른 새벽에 나서서 정리되지 않았던 이불을 다시 건조기에 넣고 털어 이부자리를 살핀 후, 아이와 함께 잠에 든다.'


 여행의 끝, 아니 엄마인 나의 하루의 끝은 사실 거의 비슷하다. 어쩌면 이스탄불에서의 삶이 시작되고 나는 매일 비슷한 여행을 하고 있는 듯하다. 뒷마당의 공조기가 터졌다며 튀르키예인 관리사무소에서 전화가 오고, 기술자 아저씨들이 땅을 헤집고 그들에게 'Kolay gelsin'이라는 말을 하며 작은 음료수를 건넸다. 그리고 창문가에 얇은 커튼을 치고 돌아서서 청소기를 돌린다. 가끔 아이를 학교로 등교시키곤 마음 착한 이웃과 동네를 걷고,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다시 집에 돌아와 빨래를 하고, 아들을 픽업하고 요리를 하고 아이를 씻기고 다시 저녁을 준비한다. 책을 읽어주다 노곤한 아들과 이불을 덮고 깊은 잠에 든다.


 장소만 달라졌을 뿐, 나는 한국,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에서 모두 비슷한 저녁의 일상을 살았다. 여행이 거듭될수록, 이스탄불에서의 삶이 계속될수록 내가 어떤 장소에 가든, 특히 밤은 더욱 비슷하다고 느낀다. 엄마가 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나이를 먹은 탓일까.

 이 삶 속에 다만 달라지는 것은 그날의 날씨, 그리고 우리의 건강과 마음 그 기분, 우리가 만났던 사람들, 그들과의 대화와 친절함. 그 웃음의 정도 그리고 아이의 성장. 장소가 조금 바뀌고 분위기가 달라지고, 쓰는 비용이 그 나라의 물가에 따라 오르고 내릴 뿐. 갑자기 내가 이스탄불에 왔다고, 프라하에 있다고, 독일 뮌헨에 있다고 해서 삶이 영화처럼 달라지는 은 없었다.

 언제나처럼, 라테 한 잔을 사고 그저 아들 손을 잡았다.


 숙소에 돌아와 저녁 식사를 챙기곤 온 가족이 한 자리에 앉아, 여행 온 지역의 맥주 한 병을 열어 남편과 함께 한 잔씩 나누어 마시는 것이 다를 뿐. 장소가 다른 곳에서도 나는 같은 사람, 가족. 아이와 남편과 늘 함께였다.


 

 늦은 저녁, 남편은 집에 돌아왔다. 아이는 이른 저녁밥을 먹었고, 두 번째 차리는 저녁 밥상을 남편이 받는다. 그는 이리저리 집을 둘러본다. 감전사할 뻔한 부인을 다행스레 다시 만난 것을 감사하라며, 나는 물바다가 된 덕분에 집에 물청소는 제대로 했다며 깨끗해진 집을 소개했다.

 

 물바다가 된 이스탄불의 집에서 나는 다시 한번 한국을 그린다. 어쩌면 내게 '집 나가면 고생이다.'를 깨닫게 하기 위해, 떠났던 내가 다시 한국의 제자리로 잘 돌아가게 하기 위해, 우리를 이곳에 살게 한 것임알고 있다.

 다만, 삶이라는 긴 여행 속에서 우리가 서로를 여전히 사랑하며 잘 살아내고 있는 것에 감사할 뿐, 물에 젖어 축축한 타월과 세탁기가 결국 토해버린 빨래뭉치 캐리어에 넣고 남편은 이스탄불 코인세탁소로 향했다.


 "잘 다녀와요."

 "다녀올게."


 남편이 없는 집. 아들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을 다룬 책을 한참 읽다가, 아들은 학교의 스코틀랜드 선생님과 나눈 이야기를 내게 전했다. 영국의 이중계약이 이 긴 전쟁을 일으키게 한 원인이라는 나의 말을 학교에 가서도 전했나 보다. 난감하다. 아이 앞에선 냉수도 못 마신다더니, 이스탄불의 영국 학교에 근무하시는 선생님께 내 말을 온전히 전했나 보다.

 아이의 말을 잘 들어주시는 친절한 선생님은 아들에게 '나는 다행히 스코틀랜드인이야.'라고 답변을 해주셨다.


 '딩동' 소리가 울린다. 남편은 물을 먹어 무거운 빨래를 잘 세탁하여 들고 집에 안전히 돌아왔다. 우리가 긴 여행을 하고 돌아오던 때처럼, 나는 그가 깨끗이 빨아온 빨래를 우리 집 건조기에 넣고 을 준비했다.


 다시 삶이다. 아니 이스탄불에서의 여행이다.


 그렇게 참으로 다행히 체코, 오스트리아, 독일에서 삶을 고, 다시 그렇게 이스탄불 우리 집으로 아왔다. 

 



덧붙임)

https://brunch.co.kr/brunchbook/mysontravel

 

 작년 2023년 12월에 시작한 글이 이제야 마칩니다. 더 이상 우울하고 슬픈 글은 안 써야지 하고 시작한 연재였습니다. 의도적으로라도 가장 좋았던 시간을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연재를 하는 동안 마음이 참 일렁이기 했습니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인가 싶어서, 연재 제목도 바꾸었네요. 삶이 원래 그런 거겠죠.


 그동안 부족한 글, 게으른 연재에도 불구하고 재밌게 읽어주시고 댓글, 응원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이, 아니 읽지 않는 분까지도 모두 평화롭고 몸과 마음 모두가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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