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람을 앞둔 라마단의 끝, 이스탄불에서
저녁 식사도 치운 어둠 속의 이스탄불, 창문 밖에서 냄비에 숟가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본다.
땡땡땡. 마치 긴 메아리처럼.
한쪽에서 시작되던 소리는 다른 쪽으로 크게 울린다. 이방인인 나는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본다. 창문 반대편 일본인 가족도 나와 같나 보다.
두리번두리번. 두렵다.
요즘 학원을 빠지고 집에 머물고 있다. 튀르키예의 시국이 참으로 조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몇 달 전, 우리나라에 계엄령이 실시되었을 때 내게 한국의 가족들과 나라의 안위를 묻던 튀르키예 사람들은 어느 날 아침, 한순간 말이 없어졌다.
한국 회사(현#로템)에서 만든 이스탄불의 지하철, 가끔 학원을 마치고 지하철을 타면 내가 서울 지하철 2호선에 서 있는 느낌이 든다. 고개를 들면 낯빛과 체구부터 다른 튀르키예 사람들이 서 있다. 그저 조금 더 낡았다고 할까. 쌍둥이다. 집으로 향하는 나는 서울 지하철 2호선에서 6호선으로 갈아타는 기분이다.
튀르키예의 정치적 이슈로 결국 일부 출입구가 막힌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타고 집에 왔다. 기분 탓일까 더 붐비고 차가 밀리는 것 같다.
솔직히, 지금의 이스탄불은 뉴스에 나오듯 무서운 공포의 상태는 아니다.
누가 내게 지금 이스탄불 여행을 예약해 놓았는데 어떻게 하냐고 묻는다면, 이스탄불 시청 앞이나 'Taksim Meydanı'과 같이 우리의 광화문 광장과 같은 '메이단느(Meydanı)'라는 이름이 있는 곳에는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할 것이다.
실제 교통 통제도 있고 이번 사건으로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다수 있으니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 주요 관광지가 몰려있는 파티흐 지구는 가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이미 여행을 계획한 사람에겐 아쉽겠지만, 걱정 많은 나로선 그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4년째 사는 사람의 눈으론, 지금의 이스탄불은 기사 속 사진 몇 컷만큼 위험하지 않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평소처럼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론 또 누군가는 구금되었다.
라마단 기간 가장 중시해야 할 '자비, 연민, 풍요(rahmet, merhamet, bereketle)'의 정신이 사라질까 두려울 뿐이다. 난 괜히 겁이 난다.
어둠이 짙어져서야 집 창문을 열어 냄비에 숟가락을 두드리며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사람들. 이방인인 나는 방관자처럼 소리를 내는 그들을 창문을 열어 바라본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들은 더 무서워하고 있을까. 구금된 정치인과 기자들, 거리에 모여든 청년들과 사람들, 민주주의를 말하는 거센 외침들 그리고 반대로 폭력적인 시위대를 진압하다 다쳐서 병원에 누워있는 경찰들의 모습, 그들을 위해 병문안을 행하는 정치인들.
나는 두 시선의 신문기사를 읽는다.
아들의 학교의 어떤 사람은 범죄자들을 잡아갔다고 말했고, 또 어떤 사람은 욕심쟁이가 이스탄불을 망치려고 한다고 욕했다.
이스탄불에 사는 이방인인 나는 두 가지 시선을 다시 바라본다. 누가 어둠 속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아슬아슬한 선에서 이방인은 아들에게 중립을 권한다.
이프타르가 시작되는 늦은 밤의 이스탄불
냄비를 두드리는 소리는, 아주 옅은 메아리가 되어 내가 사는 시떼를 넘어 울리고 있었다.
어느 세상이든, 항상 달콤한 각설탕 같을 순 없다.
어딘가 참으로 많이 닮은 이 곳, 평소와 다름없이 분주한 이스탄불 속에서 본디 씁쓸했던 차이 한 잔에 애써 각설탕 한 봉지를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