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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선 Nov 30. 2024

게으른 베이시스트이자 안이한 취준생

연주와 출판 편집의 상관관계

클럽에서 연주한 지는 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베이시스트라고 생각한다. 기량에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 그런데 최근 오랜만에 베이스를 잡고 실력이 확 줄었다는 게 느껴졌다. 코드를 틀려서도 아니고 박자를 놓쳐서도 아니다. 연주하며 망설이고 있었다. 코드와 코드, 마디와 마디 사이를 어떻게 채워야 할지를.


인스타 릴스 댓글을 보면 베이스를 보고 메가 우쿨렐레라느니, 들리지 않는다느니 하지만 긁히지 않는다. 4비트 근음만 해도 얼마나 다채롭게 디테일을 조정할 수 있는지는 그 쾌를 경험한 사람만 안다. 왼손 터치의 강약, 쉼표의 사용, 옥타브, 다음 음을 단호하게 끊어갈지 슬라이드로 쭈욱 이어갈지 등 다양한 경우의 수와 조합 안에서 의도한 연주가 반영되었을 때의 저릿함. 어쩌면 나만 아는, 하지만 확실히 내가 아는 그 사소하고도 미묘한 묘미. 중요한 건 이 선택이 매우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거다. 즉흥 연주에서는 계산과 동시에 답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잠시라도 망설인다면...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내가 이렇게 주춤댄다고?


우리 교회 밴드는 연습 시간이 길지 않아 진득하게 연습할 수 없다. 멤버들이 당일날 한 시간 전에 만나 한 곡당 많아 봤자 서너 번 반복하고 예배에 선다. 그 서너 번, 적다면 한두 번의 시연 동안 다른 악기가 어떻게 연주하는지 파악하고 내 연주의 기준을 세워야 한다. '오늘 건반 치는 친구는 멜로디를 많이 넣네. 에드리브 굳이 넣지 말아야겠다.', '드럼은 정박으로 가는데 일렉은 엇박을 치니까 벌스에서는 4비트로 단순하게 치고, 후렴에서는 일렉 리듬을 따라가야겠다.' 화려하게 치는 편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조화를 이끄는 게 내 자부심이었다.


그런데 그 기준이 흐물텅대고 있었다. 당연했다. 기초 연습을 한 지 너무 오래됐으니까. 플랫 하나에 손가락 하나씩을  따박따박 짚어내는 크로메틱도, 기계처럼 한 곡 내내 같은 세기와 속도로 줄을 두드리는 8비트와 16비트도, 같은 음계를 반복해서 왔다 갔다 하는 스케일도. 이 연습에 시간을 들인 지가 몇 년은 되었다. 결코 타고난 실력이 아닌데 왜 아무것도 안 해도 기량이 유지된다 생각했을까. 내 연주가 탄탄하지 않으니 실수를 피하기 바빠서 다른 악기 소리에 맞출 새가 없었다.


일일 베이스 강연을 했던 대학 시절 어느 날이 생각났다. 화성학 이론이나 연주 자체보다는 예배하는 연주자, 연주하는 예배자로서의 마인드에 대해 더 많은 말을 했는데(그들은 그걸 원했을까...), 내가 강조했던 건 연주를 잘해야 하는 이유였다. 코드나 리듬 정도는 생각하지 않고 칠 수 있어야 회중과 리더와 다른 악기와의 호흡, 가사의 의미 같은 연주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배의 참맛은 경이의 체험에 있고, 경이란 무엇보다 나를 잊는 것. 무아의 지경까지 가려면 내가 나를 잊고도 연주가 될 만큼 손이 자동으로 움직여줘야 한다. 악기에 온 신경을 집중해선 그 맛을 볼 수가 없다. 연주한다는 걸 잊을 정도로 연주에 익숙해야 진짜 연주의 전율을 느낄 수 있는 역설.


막바지에야 손이 풀렸다. 여유가 생겼는지 잠시 딴생각도 들었다(예배에 집중하지 않아 죄송합니다...). 어느 분야든 기본기가 중요하구나. 당연하고 닳은 말이라 쓰면서도 두드러기가 날 것 같지만 오래 잊었던 만큼 새롭게 다가왔다. 한 달 동안 두 출판사의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참 많이 적었는데(예컨대 저는 도전 정신이 굉장하고요. 이러저러한 기획에 자신이 있습니다), 신입 지원자로서의 기초를 잘 다졌나 돌아보게 됐다. 당연히 안다고 생각했던 맞춤법, 당연히 가능할 거 생각했던 교정 교열, 막상 일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던 원서 대조. 나 정말 단단히 다졌나? 지원하는 출판사를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집에 도착해 노트북을 켜고 메모 앱에 매주 할 일을 적었다. 교정 교열, 맞춤법을 어떻게 공부하고 어떤 책의 원서를 살지. 어느 분야든 통하는 게 있다. 베이스를 치면서 편집자 준비를 반성하게 되는 걸 보니. 근음 연주만 간신히 해내는 연주가 매력 없듯 문장만 겨우 다듬는 편집자는 좋은 책을 만들기 어렵지 않을까. 잘 다린 기본기 위에서 이것도 할 줄 알고 저것도 할 줄 알아서 만들고자 하는 책에 맞게 척척 선택해 적용할 수 있는 유능한 출판인이 되고프다. 역량의 가용범위를 넓히기 위해 재미없는 일도 결심할 줄 아는 나는야 멋진 예비 편집자. 새 마음으로 준비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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