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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희종 Nov 17. 2019

추락, 두 번째 이야기

위험한 신혼여행


 아침에 일어나자 편두통이 느껴졌다. 힘들 정도의 고통은 아니어서 두통약을 먹으면 금방 좋아질 듯했다. 다행히 하늘이는 몸에 큰 이상이 없었다. 우리는 고소 적응차 4,500m에 위치한 캠프 2까지 갔다 오기로 했다. 이곳을 출발하면 너덜지대 위의 캠프 1과 해발 4,500m 눈밭의 캠프 2, 해발 5,000m의 마지막 캠프까지 총 세 곳의 캠프가 있었다. 하지만 보통 산장에서 정상까지 하루 만에 왕복이 가능하기에 굳이 하이캠프를 거치는 이들은 많지 않은 듯했다.

 산길을 따라 올라가니 캠프 1을 만날 수 있었다. 너덜지대와 모래에선 신발이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캠프 1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니 꽁꽁 얼어 있어 길이 무척 미끄러웠다. 경사가 급한 곳도 있었지만 큰 어려움 없이 캠프 2까지 3시간 만에 오를 수 있었다. 내려올 때는 여러 개의 갈림길이 보여 올라올 때 저장해 두었던 GPS 좌표를 참고해 내려갔다. 가이드가 있는 팀은 대부분 새벽 1시에 산장을 출발해, 동이 틀 무렵 잠바파 글레시어에 도착한다는 계획이었다. 우리는 새벽 2시에 일어나 가이드가 있는 팀들의 루트를 뒤따라가기로 했다. 산장 밖에 텐트를 치고 일찍 잠들었다.

 새벽 2시의 텐트 밖은 고요했다. 오리사바 쪽으로 멀리 헤드랜턴 불빛이 보였다. 옷과 양말을 단단히 껴입고 새벽 2시 45분 텐트를 나섰다. 캠프 1을 지나며 GPS를 확인해 보니 어제보다 페이스가 조금 좋았다. 곧 우리보다 앞선 한 팀을 만났다. 미국인 가족 3명(부부와 아들)과 멕시코인 가이드 2명으로 구성된 팀이었는데 그들을 타깃으로 삼아 따라가기로 했다. 우리는 5분 정도 간격을 두고 그들을 뒤따랐다. 올라가는 내내 조금 눈치가 보였지만 그들에게 최대한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천천히 따라갔다. 캠프 2에서 자마파 글레이셔까지 오르는 길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랐다. 경사도 급해지고 꽁꽁 얼어붙은 얼음이 많아 피켈과 아이젠은 필수였다. 오를수록 바람은 기온이 떨어졌다. 눈과 얼음이 펼쳐져 정확한 길을 확인할 수 없었다. 가이드가 없다면 길을 잃을 것 같았다.

 나는 앞서 가는 하늘이에게 계속해서 손발을 움직이라고 주문했다. 나 역시 점점 얼어가는 손과 발을 끊임없이 움직이며 동상에 걸리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얇고 가벼운 트레일 러닝화 속의 발가락은 얼어 가는 것 같았다. 나는 셰퍼드가 챙겨준 핫팩을 하늘이의 장갑과 양말 위에 붙여 주었다. 그렇게 추위와 맞서며 동이 터오를 무렵 자마파 글레이셔에 도착했다. 멀리 구름 밑으로 태양의 붉은빛이 꿈틀대는 것 같았지만, 그 빛이 나에게 오려면 아직은 한참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우리는 가스와 버너를 이용해 차를 끓여 마시며 몸을 녹였다. 해발 5,000m 지점이었다. 이제 고도 600m만 높이면 정상이었지만 경사가 생각보다 심했다. 혼자라면 더 빠르게 정상에 다녀올 수 있겠지만 하늘이와 함께하는 행복을 포기하기 싫었다.

하늘이의 최고 고도는 2010년 한국 청소년 오지탐사대에서 다녀온 중국 깡션카의 4,772m 봉우리였다. 그 기록대로라면 이미 그녀는 최고 기록을 경신하고도 남는 높이에 서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인근의 칼라파타르에 다녀온 적이 있어 5,000m대의 경험이 있었지만 그녀는 처음이었기에 걱정이 앞섰다. 아침 7시가 조금 안 된 시간, 태양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듯했다. 북서쪽 방향에서 오르기 때문에 태양의 따스함을 온전히 즐길 수 없었다. 하늘이를 앞에 세우고 천천히 따라갔지만 속도가 너무 늦었다. 아무래도 설산에 대한 경험이 부족으로 피켈과 아이젠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시간을 더 지체하다간 발가락이 모두 얼어버릴 것 같았다.

경사는 갈수록 급해졌고 속도는 더욱 더뎌지고 있었다. 둘 다 하네스를 착용하고 있지 않아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자리를 바꿔 조금 위험해도 내가 앞에서 경사면을 깎아내려 하늘이가 밟고 오를 수 있는 스텝을 만들기로 했다. 한참을 그렇게 올라 고도계를 바라보니 5,500m를 가리키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오리사바 정상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더 커져가고 있었다. 경사가 더욱 심해졌고 체감상으로는 거의 직벽에 가까웠다. 뒤따라오는 하늘이의 자세가 불안정했고 겁먹은 표정이었다. 나의 계속된 설명에도 불구하고 하늘이의 자세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조금 무리를 해서 눈앞의 정상을 갈 것인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내려갈 것인가. 지금의 속도라면 올라갈 수는 있겠지만 족히 한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았고, 체력 소모가 심해 하산 시 더 위험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이는 자기 때문에 내가 못 올라가는 것이 너무 속상했는지 나만이라도 정상을 다녀오라고 했지만 하늘이를 혼자 두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었다. 지금은 깨끗이 포기하고 함께 최대한 안전히 내려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우리는 천천히 하산을 시작했다. 하지만 경사가 심해 내려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급경사 구간을 지난 뒤, 이제는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하늘이를 뒤로 한 채 자마파 글레이셔 시작 지점까지 먼저 빠르게 내려왔다. 힘들어하는 하늘이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따뜻한 라면을 끓여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절대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 내 생애 가장 최악의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고 배낭을 내려놓은 뒤 라면을 꺼내는 찰나였다.

 “저기! 누가 미끄러지고 있어!”

 나보다 먼저 내려와 쉬고 있던 멕시코인 가이드가 소리쳤다. 바로 하늘이가 미끄러지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피켈을 들고 그녀가 미끄러져 오는 방향을 향해 곧장 달렸다.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추락 예상 지점에 미리 도착해 피켈을 꽂아 확보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그럴 시간은 없었다. 피켈을 옆으로 던지고 미끄러져 오는 그녀를 온몸으로 막아냈다. 원심력을 이용해 옆으로 회전시켜 속도를 줄이려 했다. 그대로 멈춰 세우려 들면 두 사람 다 함께 추락할 것 같았다. 다행히 그녀는 내 품 안에서 멈춰 섰다. 그 순간 나는 정말 슈퍼맨이 된 듯했다.

“오빠 미안해. 흑흑. 미끄러져서 피켈로 멈추려 했는데 잘 안 됐어. 흑흑. 너무 미안해.”

 하늘이는 내 품에서 흐느끼며 계속 미안하다고 했다. 내 부주의였고 내 잘못이었기에 내가 100번 사과해도 부족한 상황이었는데 그녀는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녀를 진정시킨 뒤  온몸을 살폈다. 다행히 오리사바의 산신이 우리가 그렇게 밉진 않았는지 약간의 찰과상과 타박상만 입었을 뿐 부러지거나 심하게 찢어진 곳은 없었다. 우리는 휴식을 취하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라면으로 체력을 보충한 뒤 천천히 하산했다. 산장에 내려와 비상약품을 구해 부족했던 응급처치를 마저 했다. 도저히 마을까지 자전거를 타고 갈 자신이 없어 가이드들에게 부탁해 트라치추카마을로 내려가는 차를 얻어 탔다. 트라치추카마을의 숙소에서 셰퍼드를 만났고, 그와 함께 멕시코 남부 와하까까지 여행하기로 했다.

 비록 오리사바 정상에 오르진 못했지만 훨씬 소중한 것을 얻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한다. 우리는 우리만의 오리사바 정상에 올랐다고 생각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다시 길 위에서 새로운 행복을 만나길 기대하며 우리는 오리사바와 작별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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