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63세 엄마의 보호자입니다

예순 셋 젊은 엄마와 늙은 딸의 더부살이 (11)

by Sunny Day

우리의 것이라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간암 환자가 되고 암환자 가족이 되어보니 가슴 한켠에 묵직한 것이 들어차 앉았다. 마치 그 무게는 제주도 해녀들이 물질을 할 때, 바다 깊은 곳으로 몸을 던져 가라앉히기 위해 허리에 무거운 납덩이를 달고 들어가는 것 같은 정도일 수도 있다. 바람에 흔들려도 꺽이지 않아야 하고, 위로를 가장한 쯧쯧거리는 물살에도 쉽게 휩쓸리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그런 무거운 무엇인가를 들어앉히지 않고는 현실과 제대로 맞짱뜰 수 있다. 그래도 암을 이겨낼 가장 좋은 방법은 결국 나는 이겨내겠다, 이겨내고야 말겠다는 굳은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더라.




엄마는 8월 9일 은평성모병원에 입원하셨고 사흘 후 12일에 간암 수술을 하셨다. 그렇게 2주 넘게, 3주 가까이를 입원하셨다가 그 달 마지막 주에 퇴원하셨다. 병원은 코로나 감염우려에 매우 취약한 환자들이 모여있는 곳이라 철저하게 코로나 방역수칙을 지키며 무진장 애를 쓰고 있었다. 그 때문에 환자 1명 당 보호자도 1명으로 제한하였고 불가피한 경우에만 입원기간 중 1번만 보호자를 교체할 수 있었다. 수술 전 집도의는 입원기간을 수술 포함 2-3주를 예상했는데, 마침 일을 하고 있지 않았던 내가 보호자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긴 입원기간동안 나마저 지칠까 염려하는 동생들의 배려로 남동생이 일주일에 하루뿐인 휴일을 포함하여 2박 3일을, 그 이후부터 퇴원까지는 내가 하기로 보호자 교체작전을 짰다. 여동생도 함께 하고 싶었지만 워낙 바쁘게 일하는 통에 제대로 먹고 편하게 잘 수 없는 환자 보호자 역할까지 하도록 놔둘 수 없었다.


남동생과 보호자 바통터치를 하고 병원에 들어가니 동생이 간간히 보내주었던 사진과 사뭇 느낌이 달랐다. 그래도 엄마가 수술 전 식사를 하실 수 있을 때는 옷만 환자옷을 입었지, 평소와 다름없었는데 수술 직전 금식에 들어가고 수술 대기를 하고 수술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나의 역할도 더 커지게 되었다. 그냥 옆에서 엄마가 필요한 것을 살펴드리는 일을 하는 것 뿐만 아니었다. 엄마의 기분을 살피고 다른 환자들을 보거나 수술 회복이 더딜 때에도 마음이 마냥 가라앉지 않도록 환기해드리고 무한 응원해드리는 역할을 해야했다. 자연스럽게 회복의 수순을 밟고 있다가 갑자기 뒷걸음질 치듯 회복이 더딜 때에도 괜찮다, 걱정하지 말자, 다시 회복할 것이라고 용기를 북돋아드려야 했다. 밤 사이 열이 37도를 넘지 않도록 얼음찜질을 하고, 피주머니에 피고름의 색과 양을 체크하고 소변주머니에 순식간에 채워지는 소변을 비우고 그 양을 체크해서 간호사에게 보고해야했다. 식전약과 식후약을 챙기고 삼시세끼 식사도 회복에 필요한 만큼 적절하게 드실 수 있도록 권하고 입맛 돋는 간식거리도 챙겨드려야했다. 엄마는 수술 후 가스를 배출하자마자 미음을 4일 가까이 드시고 나서야 죽으로 넘어갔고 죽도 3-4일 드신 후에야 밥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 단계마다 우리 모녀는 감사로 박수치며 식판을 받아들었다. 그래도 좀처럼 입맛이 올라오지 않아서 엄마는 입이 개운해지는 시원한 물김치만 비워내시고 나머지 반찬과 밥은 뜨는 둥 마는 둥 하셨다. 평소에 아프셔도 죽 반 그릇 이상은 드셨던 엄마인데 식욕이 떨어지니 여느 입 짧은 아이마냥 그래 보였다. 엄마에게 한 숟가락이라도 드시게 하려고 ‘한 숟가락만, 한 숟가락만’하며 애원하듯 했는데 결국 안드시고 숟가락을 내려놓으셨을 때는 너무 속상했다. 엄마는 거의 뜨는 둥 마는 둥 하며 대부분 남기신 밥을 나더러 먹으라 하셨는데 너무 화가 나서 그냥 퇴식구 선반에 내버리듯 던져놓고 와버렸다. 수술 후 폐에 물이 차서 운동도 많이 해야 물이 빠지는데 식사를 안하시니 기운이 없어서 운동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밥 잘 안먹는 초등학생 자녀에게 어떻게 하면 밥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게 할까 고민하는 엄마 같은 심정이었다.


나는 예순 셋 엄마의 보호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