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직급체계는 멋져 보였다. 사원-대리(주임)-과장-차장-부장으로 올라가는 회사 생활은 마치 트로피를 따내는 선수의 삶처럼 보였다. 중간마다 탈락자는 있겠지만, 그게 나는 아닐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한 몫했다. 하긴, 신입사원에게 "너도 진급 누락할 수 있어."라는 말은 너무 잔혹하다. 회사에서는 탈락자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어찌 되었든 너도 부장이, 그리고 팀장이 될 수 있어."라는 말이 중요하다. 그런데 말이다.
임원이 되지 못한 부장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인사팀은 연말과 연초가 가장 바쁘다. 연말에는 임원 인사가, 연초에는 승진이 있기 때문이다. 인사팀의 기능은 크게 인력운영(팀과 조직), 평가보상(연봉, 인센티브, 복지), 채용(신입사원, 경력사원), 조직문화, 교육 등으로 나누어진다. 그중 승진은 이 모든 기능이 움직이는 가장 큰 행사다. 승진이 이루어지면 팀이 바뀌고 연봉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조직문화가 바뀌고 승진 교육이 시작된다.
그러니 팀장/부장급에게는 연말이, 그 외 직원들에게는 연초가 가장 중요하다. 사원들이 연말 정리에 야근을 하고 신경이 곤두설 때, 우리의 부장님들은 다른 의미에서 신경이 곤두서 있다.
나이 한 살 더 먹는 건 참을 수 있지만 부장으로서 1살 더 먹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인사팀과 주변 경쟁자들이 참지 못한다. 부장은 승진이 없기 때문이다.
임원 인사가 발표되면 새로 수정된 조직도와 명단을 받았다. 나는 매번 임원들의 간택 사유를 꼼꼼하게 읽어보곤 했다. 뭐라도 배울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사유는 다양했다. 공통점은 모든 경쟁자를 물리치고 올라왔다는 것이었다. 배틀로얄 같았다. 대부분 한 조직에서는 단 1명만 새로 임원이 된다.
임원 발표가 나고 사원 승진이 발표되는 3월까지는 퇴사 성수기다. 퇴사 직급은 신입사원부터 부장까지 다양하다. 회사 꼬꼬마 시절, 전체 그룹사(계열사)의 퇴직률을 보다가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을 발견했다. 신입사원의 퇴사율은 점점 줄고 있는데, 과장급과 부장급의 퇴사율이 늘고 있었다. 과장급은 이직을 한다고 하지만, 대체 부장들은 퇴직하고 어디로 가는 걸까?
하루는 담배를 피우러 가는 선배를 따라가 물었다.
"대체 왜 그만두는 거죠? 저 같으면 어떻게든 버틸 거 같은데.. 자식이 대학생이면 학비도 주잖아요."
선배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못 견뎌서 그런 거지. 그거 못 견딘다. 너는 버틸 수 있을 거 같아?"
"어디 섬 같은 곳으로 오지 발령을 받아서라도 버텨야죠."
"그런 곳이 있으면 나 좀 먼저 보내줘. 그렇게 놔두겠니?"
선배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곳은 천국일거야 - 싸이의 낙원 中
임원이 되지 못한 부장이 숨을 오지는 없다. 오히려 동료들과 후배들을 통해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처럼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번에도 안되셨데.." 다들 쉬쉬하며 승진과 관련된 대화를 피한다. "아휴! 내년에는 되겠지!"하며 먼저 이야기 꺼내고 껄껄껄 웃는분도 있다. 더 불편하다. 나 역시 10년 넘게 부장으로 버티신 분 밑에 있었는데, 11년 차가 되셨을 때 "제발 아무 말하지 않으셨으면..."하고 빌었다.
임원은 능력만으로 된다고 볼 수 없었다.
능력이 좋다고 임원을 시키면 승진하듯 너도 나도 임원이 되어야만 했다. 임원은 승진하는 것보다, 팀장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 선출직에 가깝다. 즉, '자리'가 있어야 한다.
자리는 회사원 용어로 포지션(Position)이라고 한다. 조직의 구조를 짤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포지션이다. 낙하산으로 오거나, 급하게 채용한 임원급 인재일 경우에는포지션을 억지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또는 일은 시키고 싶은데 임원은 시키기 어려운 사람들을 "임원급 포지션"이라는자리에 앉히는 경우도 있다. 임원 일을 하는 곳이지만 임원은 아닌 애매한 자리다. 포도 과즙은 하나도 안 들어간 포도주스인셈이다.
어느 날, 오랫동안 부장을 하고 계셨던 분과 마주쳤다. 한 때 인사(HR)에서 잘 나가시는 분이었지만 회사 경영이 안 좋아지면서 말년에 좋은 평가를 챙기지 못한 분이었다. 회사 영업이익이 잘 나오지 않는데 인사팀장이 좋은 평가받기란 쉽지 않다. 물론 평가와 달리 후배들은 그 부장님을 꽤 존경했다.
그분의 오른쪽 손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어디서 만취해 오락실 펀치를 치실 분도 아니고, 교통사고라도 당하셨나 싶었다. 훗날 붕대의 비밀을 알 게 되었다. 팀장에서 프랜차이즈 부점장으로 잠시 갔다 오셨다는 거였다. 부점장이 요리를 알아야 하니, 그곳에서 음식을 하다가 손을 크게 데셨다고.
그때 마침 오래전 선배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거 못 견딘다. 너는 버틸 수 있을 거 같아?"
회사에 오래된 부장을 위한 곳은 없었다. 회사원은 은퇴를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밀려나는 것이었다. 그게 싫으면 자발적으로 떠나야했다. 우리 모두 저와는 다를 거라고 고개를 저었지만 퇴사는 운명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퇴사를 준비해야만 했다. 회사에서 나가는 순간 스스로 자립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준비가 되어 있는가? 어떤 회사원이 준비가 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임원은 다를까?
2019년 중앙일보 기획 기사에 따르면 임원의 평균 연령은 50.9세, 임원 경력은 4.1년이다. 게다가 남성이 92%라고 한다. 한국시엑스오(CXO) 연구소 조사로는 발탁 나이는 평균 49.6세, 평균 재직기간은 5.6년이다.
내가 있던 회사에서 임원의 평균 근속 연수는 3년이었다. 3~4년 동안 임원 명단을 관리하고 했었는데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떠난 분들을 명단에서 지우는 일이었다. 발탁된 분들은 공개게시판에 영광스러운 명단이 나오지만 떠나는 분들은명단이 없다. 간 사람을 지우고 새로운 사람을 넣고, 3년 치가 쌓이고 나면 완전 새로운 명단이 된다. 테세우스의 배와 같다.
원래 회사는 테세우스의 배와 같지 않을까?
실제로 업계에서 말하는 평균은 3.3년이다. 처음으로 상무나 이사가 되고 3년 정도 평가를 받으면 일을 그만두게 된다. 회사의 1%라는 임원도 50세가 마지노선이다. 임원이 되지 못한 남성들과 그보다 많은 여성들은 더 빨리 회사를 떠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경제 저성장기 진입과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유연화라고 적고 쉽게 자른다로 읽는다)으로 조기퇴직과 비자발적 퇴직이 늘고 있다. 젊은 시절을 헌신한 주된 일자리는 평균 50.5세에 그만두게 된다. 본인이 영업사원이든 마케터든 스텝이든 연구원이든
회사원 인생이 50세에 끝날 확률이 99% 라는 말이다.
그만둔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아직 50세에 도달하지 않은 회사원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언젠가 회사원 모두는 회사를 떠나 독립을 해야만 한다. 독립의 성패는 회사를 다니며 얼마나 준비했느냐에 달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