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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보식 Mar 21. 2021

< 길 위의 명상>

21. 내안의 목소리_오름 아부오름



  내가 누군가와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서로 간의 공통 언어를 가진다는 것은 내가 그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기 위한 필수요건이다. 내가 만나고 싶고 알고 싶어 한 내안의 목소리는 사고와 같은 우연의 시기에만 오직 그를 통해서만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사이에는 어떤 표현할 수 없는 느낌 정도로만 그와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내안의 목소리와 언제든 통하고 싶었지만 닿을 수 없는 이유가 뭔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궁금증과 고민은 커져만 갔다. 그러던 중 대학 때 만났으나 서로 의사소통이 되질 않아 이내 헤어졌던 재일교포가 떠올랐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내안의 목소리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몰랐고, 내안의 목소리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내안의 목소리가 나에게 말을 건넬 때 사용하는 그 언어를 내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큰아이가 아프다고 병원으로부터의 연락을 받았을 때, 그때까지 지구상에서 내가 사용하고 있던 세상의 모든 감각들이 일순간 사라지고 마치 진공상태에 들었던 그 순간에, 느닷없이 나타났고 온 몸으로 알아들었던 내안의 목소리를 만나기 위해 지금까지 긴 여행을 했다. 내안의 목소리가 나에게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들을 수 있기 위해서, 그리고 그 목소리에게 나의 샘솟는 무한의 질문들을 전하고 또 그 대답들을 듣기 위해서, 나는 내안의 목소리가 사용하는 고요의 언어를 침묵의 언어를 알고 싶었고 또 배우고 싶었다. 옛날 학창 시절 그때처럼 서로가 소통할 언어를 몰라 헤어졌던 것처럼 그런 이별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내안의 목소리와 이야기할 수 있는 그의 언어를 배우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지금까지의 여정은 내안의 목소리를 듣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며 느껴지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그가 사용하는 그의 언어를 배우기 위한 준비과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나에게 말을 건네 온 내안의 목소리를 뚜렷하게 들을 수 있었던 때는, 큰아이와 나의 죽음과 같은 중차대한 일과 같이, 그 어떤 다른 사고나 생각을 떠올릴 수 없는 나만의 절대적인 순간들에서였다. 아무런 다른 잡념들이 존재할 수 없는, 마치 내게는 세상이 정지해버린 것 같은 바로 그 순간에, 떠오르는 생각 하나와 그와 같은 어떤 느낌으로 내안의 목소리는 이야기를 전해왔다. 그래서 언제나 다시 내안의 목소리를 그때처럼 뚜렷이 만날 수 있을까 궁금해하며 기다렸지만 그때들을 제외하고는 두 번 다시 선명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왜 그럴까. 그와 나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그는 평소에는 나에게 아무런 관심조차 없다가 물가에 내놓은 아기처럼 위급한 상황에서만 큰일이 생기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비상시에만 나에게 이야기해주는 걸까. 별의별 상상을 다해보았지만 별다른 해답을 구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막연하게 지나온 날들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왜 항상 그만 나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걸까. 나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내 삶의 중요지점에서 어김없이 함께하며 삶의 방향에 대해 묵묵한 응시와 수용의 뜻을 건네주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어쩌면 항상 나의 일거수일투족과 생각 하나하나를 모두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렇게 가까이에서 함께하고 있을지 모르는데 혹시 내가 그의 실재를 눈치 채지 못하거나 아예 부정하고 있지는 않는 걸까. 만약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과학적 사고방식 내지 이성이나 논리 등 우리에게 익숙한 어떤 분명한 사고체계를 모두 잠깐 물리치고, 오로지 그의 존재를 느껴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저 그에게 먼저 진심으로 말을 건네 보면 어떻게 되는 걸까.

      

“(똑똑똑, 노크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하지만 아무런 기대 없이) 저기 계세요?”

“...”

“오랫동안 나에게 말을 건네준 당신, ‘내안의 목소리’ 계세요?”

“...”     

  내안의 목소리는 아무 대답이 없다. 괜한 헛생각이다 싶어 스스로가 조금 쑥스럽기도 하다. 어떻게 되겠지 하며 마음을 접으려는 때였다.     

“벌써 포기했습니까?”

“... 네?!”

“겨우 두어 번 불러보고 대답이 없자 지레짐작으로 그만두었냐고 물었습니다.”

“누구신가요?”

“당신이 나를 부르지 않았습니까. 조금 전에?”

“뭐라고요. 설마, 당신이 내안의 목소리 바로 그분인가요?”

“그럼 무엇이겠습니까? 혹시 귀신같이 들립니까?”

“아... 아니, 그런 것 같진 않습니다만, 전혀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아서 뜻밖이라 놀랐습니다. 정말 내안의 목소리가 맞나요?”

“당신은 원래 의심이 많은 사람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의심이 들면 가겠습니다. 당신이 나를 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대답을 했습니다만, 스스로 나를 부정한다면 나는 다시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내가 바로 그 목소리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당신이 부른 그 목소리가 맞습니까?”

“아니, 그걸 도리어 나에게 물으면 어떡하세요. 내가 궁금해서 물은 것인데 내가 그걸 결정해야 한다니 말입니다.”

“당신은 내가 당신이 찾고 있던 내안의 목소리다고 하면 믿고 아니라고 하면 아닌 줄 그냥 믿겠습니까? 당신은 내가 나라는 것을 나의 대답으로만 확인하겠습니까?”

“... (나는 뭐라 대꾸할 수 없었다)”

“나는 당신이 존재하는 모든 순간에 함께 해왔습니다. 언제나 당신에게 나는 말을 걸었고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또 당신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당신은 나를 초대해 말을 건넬 생각을 엄두조차 못 내더군요. 아닙니다. 딱 한번 10년 전 그럴 기회가 있었군요. 마지못해 숙제하듯이 나를 한번 부르더니 당연히 대답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오늘처럼 이내 나를 찾기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무심하게 나와는 별개인 사람처럼 살아갔습니다. 그러다 이렇게 오늘 당신 스스로 나를 부르겠다는 마음을 다시 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이번엔 진심을 담아 간절하게 나를 찾고 있었던 게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나에게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뭐라고 이야기해야 당신이 나의 존재를 인정할까요. 대단히 의심 많고 냉정하기 조차한 당신에게 말입니다. 내가 나인지 아닌지를 분별하고 알아볼 사람이 당신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어서 너무 놀랍고 신기하기도 하고 또 조심스럽고 걱정도 되기도 한 게 사실이라 얼떨결에 물어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나셨나요?”

“... 아닙니다. 사실은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이라도 이렇게 나를 불러줄 생각을 떠올린 것 자체가 어쩌면 당신에게 기적 같은 일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아직까지 당신의 나를 마주하는 모습이 똑 바로이지 않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다소 의심스러운 자세로 그를 대하고 있다) 내가 당신에게 온전히 다가갈 수 없으므로 하는 말입니다. 나는 당신의 확신으로만 당신과 만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반대로 묻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부른 내안의 목소리가 맞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오래전 큰아이가 아팠을 때와 몇 년 전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느꼈을 때, 내가 당신을 부르지도 않았는데 당신은 네게 다가와 당신의 뜻을 느낌의 목소리로 또 어떤 이미지 그림으로 보낸 게 맞습니까?”

“이미 이야기했다시피 나는 당신의 존재의 시작에서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늘 함께해 왔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당신 곁에서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나의 존재를 당신이 한 번도 찾으려거나 부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닫힌 마음의 창살 때문에 나의 이야기는 항상 일방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신이 나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당신의 귀를 나의 목소리에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에 당신에게 나의 목소리가 어떤 느낌과 그림으로 전해진 일이 생긴 것은 그 순간 당신은 당신의 큰아이와 당신 자신에게 닥쳐온 죽음의 위험 때문에 그동안 당신을 가리고 또 덮고 있던 모든 의식의 장벽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생을 살면서 세상 속에 당신을 끼워 맞추기 위해 입어왔던 두꺼운 갑옷 같은 방어막들을 모두 잊어버린 상황에 처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갑옷 같은 방어막들이 당신과 나 사이에 가로 놓여있던 바로 그 창살이자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당신은 너무나도 당황해서 도저히 그런 것들을 챙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당신을 위협하지 못했던, 가장 큰 두려움이었던 죽음들이 당신의 무장을 일순간에 무력화시키고 당신을 발가벗겨 아무것도 당신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더 이상 가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때 나로부터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의심 많은 당신은 이제 이해가 좀 되고 있습니까?”

“(코끝이 찡했다) 아... 그렇군요. 그랬었군요. 정말 미안하고 또 미안합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리게 해서, 그리고 그렇게 세상에 나를 끼워 맞추고 또 그 세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느라고 본능에 따라 사는 바람에 그동안 당신의 존재에 대해서 그리고 당신과의 만남에 대해선 엄두도 못 내고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예상한 범위 내에서의 일들입니다. 당신이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당신을 이해합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이런 날을 맞이한 것으로 나는 이미 충분히 기쁩니다. 이제 당신은 나를 알겠습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네, 당신은 아마도 내 안의 목소리가 맞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군요. 하지만 그것도 이해가 됩니다. 당신의 대답으로 이미 당신이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자 자세를 고쳤으며 앞으로 나와의 기나긴 대화를 다시 이어가고자 결심한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당신이 찾아온 바로 ‘내안의 목소리’입니다. 항상 당신과 함께 하고 있었지만 오늘에서야 당신이 나를 초대해 이렇게 처음 만나게 되어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의 대답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동안 너무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이제야 당신을 떠올리며 부르고 드디어 이렇게 만날 수 있게 되어서 진심으로 미안하고 또 감사합니다.”     

  우리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쌓이고 쌓인 수많은 지난 시간들의 일들의 의미와 동시에 앞날에 대한 궁금함 들을 묻고 또 물었다. 그는 나의 죽음으로 보여준 그림을 떠올렸을 때처럼 내가 질문을 품기만 하면 바로 그 순간에 모든 대답을 전체로 건네주었다. 질문의 생각과 동시에 그의 대답 전체가 한꺼번에 통째로 전해졌다. 사람들이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는지를 비교해볼 때 한 점의 에너지 누수 없이 완벽하게 나의 질문을 통한 나의 생각 전체가 그에게로 전달되었고 (우리는 생각하는 일순간의 한 단면만 겨우 말이나 글이나 행동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떠올려보면 내안의 목소리와의 대화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 이해될 것이다) 그는 즉시에 나의 질문의 핵심과 함께 그 질문으로 연결된 모든 상황에 대한 전체 배경을 이해하고 통합적인 그의 이야기를 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알려주었다. 이런 경험은 살아오는 동안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들과의 아주 짧은 순간들에서만 가능했음을 떠올랐다. 진심으로 사랑한 그들은 바로 나의 가족이었고 나의 연인이었고 나의 친구였고 나의 멘토였고 나의 스승이었다. 다시 그런 완벽한 소통의 커뮤니케이션이 내안의 목소리와 이렇게 우연히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왜 이제야 이렇게 당신과 이런 방식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이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당신이 나와 이렇게 대화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당신은 조심스러움과 의심으로 경계하는 마음을 늦추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당신은 가장 중요한 순간마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놓치지 않았고 그때부터 당신은 그 메시지의 실 끝을 잡고 다른 사람이라면 감행키 어려웠을 많은 모험의 발걸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여기에까지 당도하게 된 것입니다.”

“아닙니다. 제가 큰아이와 나 자신의 죽음이란 두려움에 못 이겨 마지못해 떠밀리듯 살아온 것이 그저 부끄럽고 후회될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드디어 당신을 만나 오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다니 정말 믿기지가 않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죽음이란 극단의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야 한다는 삶의 좌표를 떠올리지 못하고 뿐만 아니라 갑작스러운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더욱 움츠려들며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심사숙고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와 점점 더 멀어지고 마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당신과 내가 말하는 ‘내안의 목소리’는 바로 당신의 본래 모습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왜곡될 수 없고 침범당할 수 없는 당신의 정체성 그 자체입니다. 이것은 당신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에 비한다면 당신은 큰 용기를 내었던 것입니다. 비록 그런 지경에 이르지 않고서도 충분히 많은 기회와 시간들이 있었습니다만, 당신은 그때들에서는 그게 무엇인지 깊게 생각하지를 않았습니다.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버리거나 ‘뭐 별 생각을 다하는군’ 하면서 스스로 숙고하길 포기해 버렸으니까 말입니다.”

“네, 그랬었군요. 되돌아보니 참 어리석었습니다. 정말 아둔했습니다.”

“하지만 다행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자신의 본모습을 찾아가고자 하는 그런 길을 가는 것이 쉽지 않음을 모르지 않았으나 당신을 통해 사람으로 태어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한 길을 택하고 또 자신의 길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나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당신은 한 번도 그 길을 포기하지 않았으므로 당신은 더없이 용감하고 담대한 영혼입니다. 그래서 나도 이렇게 기쁘고 고마운 것입니다.”

“좀 더 현명하고 지혜롭고 두려움 없는 길을 갈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너무 오래 당신을 기다리게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또 후회되고 미안한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이 클 따름입니다.”

“(빙긋이 웃으며) 네, 잘 알겠습니다. 이제 당신의 고해성사는 이 정도로 마무리해도 좋겠습니다.”

“(쑥스러워하며) 역시 당신은 내 마음을 바로 간파해 내는군요. 이해해 줘서 감사합니다. 지난 일은 이제 그대로 지나가게 보내야겠습니다. 지금과 앞으로의 일들로도 충분히 우리는 벅차고 분주해야 할 테니까요. 궁금한 게 또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못 만나다가 이제야 당신과 만나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아까 이야기했습니다만, 당신이 나의 존재를 믿고 나의 방향으로 다가오고자 움직이고, 마침내 나와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당신이 달라진 덕분입니다. 모두가 당신과 나 사이에 놓인 장애물이 이 정도로 많이 걷혔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 하나하나에 대해 당신이 이해하기 쉽게 조금 더 상세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앞으로 당신의 해야 할 일과도 관련되어 있으므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내안의 목소리는 내가 그를 이렇게 만나기까지의 내가 거쳐 왔던 중요한 과정들을 소상히 설명해 주었다. 그 핵심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걷기

내가 아닌 길 위에서 배운 지식과 경험과 편견들과 습관들을 버리고 비우고 지우는 행위. 그렇게 기존의 경직된 몸과 마음과 감정과 생각의 힘을 모두 빼게 하고 두꺼운 껍질을 허물어 새로운 나의 삶을 되찾기 위한 준비운동. 비대해진 머리를 줄이고 허약해진 된 하체와 허리의 힘을 기르는 일. 생각인 머리와 감정인 가슴으로 쏠린 에너지를 줄여 역삼각형이었던 내 모습을 정삼각형의 모습으로 안정되게 바로 잡는 일. 무엇보다 건강과 체력을 되찾는 일. 

    

@ 채식/소식

지나친 육식/과식/야식은 모두 나의 몸과 정신을 게으르게 하고 무디게 하며 아무것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명철하게 스스로 생각하고 또 실천하지 못하도록 그 자리에 안주하게 하는 습관. 주체적인 삶을 찾지 못하도록 포만감과 미식으로 깨어나려는 스스로의 의지를 매번 무기력하게 하는 습관. 채식과 소식은 그런 몸과 마음과 감정과 생각을 다시 맑게 깨우고 정화하는 일.  

   

@ 책읽기

세상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다시 세상에서 길을 찾는 방법. 탐욕만을 좇는 바깥 세상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돌아가게 운영되므로 바깥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이 자신의 정체성과 그에 따른 저마다의 살아가는 목적과 방향을 적극적으로 알려주기는커녕 오히려 은폐하고 숨기고자 함. 그럴 때 스스로 길을 찾도록 도와주는 안쪽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들려주는 자신의 삶과 길을 발견해 가는 방법을 담은 좌충우돌기가 바로 책 속에 있는 것. ‘세상사람 모두 다르지 않구나’ 하는 위로와 동시에,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는 지혜를 다 같이 공유하는 효과적인 방법. 다른 시대 다른 사람들의 글을 통해 그들과의 대화를 시작하고 이어가는 길. 그들과 시공간을 불문하고 만나는 일. 내안의 목소리와의 만남을 위한 집중력을 키우기 위한 준비운동.     


@ 글쓰기

생각 정리 방법. 나의 경험과 독서를 통해 그동안 뒤죽박죽 헝클어져 있던 생각의 실타래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또 나와 내가 아닌 것들을 구분해 나가는 힘을 기르는 방법. 내안의 목소리를 향해 내가 그에게 다가가는 방법인 동시에 그의 언어를 배우고 습득하는 연습과정. 무엇보다 내안의 목소리인 자기 자신과의 만남과 대화를 위해 집중력을 기르고 최대화하는 방법.     


@ 명상

나 자신을 전지자적인 관점에서 항상 바라보는 연습. 내 안의 감정과 생각에 휘둘리지 않는 방법이자 나 밖에서 나를 초월한 시선으로 나의 존재 위치와 나아갈 방향을 찾는 방법. 걷기와 채식으로 나를 찾는 여정에서의 기초적인 준비를 마치는 것이며, 그 다음 독서로 자기 자신의 삶의 방향과 함께할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고, 글쓰기로 내안의 목소리와 조우하도록 집중력을 키워 자기 자신을 만나고 자신만의 삶을 영위하도록 안내하는, 그 전체의 흐름과 방향을 바라보는 망원경과 그 속의 세부내용들을 치밀하게 들여다보는 현미경의 눈을 갖는 방법. 내 삶의 내비게이션을 갖추고 작동하게 하는 힘을 기르는 일.  

   

  그의 긴 이야기를 듣고 나자 지난날의 그 모든 일들이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걷기-채식-책읽기-글쓰기-명상. 이 모든 게 당신을 이렇게 만나게 되기까지 내가 달라지기 위해 반드시 거쳐 와야 했던 과정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전부가 스스로의 변화와 진화를 위한 수련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이해가 빠릅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고 또 지체가 된 부분이 없지 않지만 우물쭈물하거나 주저하다가도 어느 순간에 당신은 굳은 결심으로 그 과정들을 잘 받아들이고 당신의 것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당신 스스로 이전과 달리지기를 꺼려하지 않고 기꺼이 그 길로 당신 스스로를 내맡긴 덕분입니다. 내가 왜 거듭 기쁘고 고마워하는지 이해가 조금 될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하는 20대에 이런 준비가 되고 그때 오늘처럼 당신을 일찍 만나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지 후회가 막심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좀 더 지혜롭게 내가 당신께 보내는 작은 신호들을 일찍 간파해서 당신의 길을 시작했더라면’ 하는 후회는 새롭게 시작할 다가올 시간 앞에 두 번 다시 흔들림이 없도록 하는 굳센 다짐으로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그냥 당신을 위로하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당신은 그런 시행착오의 과정이 필요했었기에 그렇게 살았던 것이며 그랬으므로 오늘 이렇게 나를 만날 수 있는 여정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나의 어리석은 지난날들이 나에게 필요했던 일들이라니요.”

“네, 맞습니다. 당신의 시행착오는 당신이 걸어야 했던 당신의 인생 속에 큰 범주 내에서 준비된 일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당신이 그런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았다면 당신은 결코 지금 이 순간의 당신이 될 수 없었다는 의미와도 일맥상통합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시행착오가 앞으로의 당신이 마주하고 대해야 할 삶의 목적과 방향에 있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중요한 경험들을 선물한 것입니다. 이미 스승을 통해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삶은 오로지 경험을 통한 영혼의 진화와 성장에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당신의 시행착오를 통한 고통스러운 경험들이 없었다면 지금 당신이 가지고 있는 깨달음들과 성장들과 또 모든 변화들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습득된 것이 아니라면 당신에게 이렇게 소중하게 남겨져 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는 그래서 나온 말입니다.”

“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당신의 그런 말씀이 나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후회스럽고 실망스러웠던 나의 모든 어리석음들조차 지금의 나를 위한 거름과 같은 과정들이었다는 말씀으로, 마치 단테가 지옥의 어둠 속에서 헤매다 빛으로 연결된 동굴 밖으로 드디어 고개를 돌리며 연옥을 거쳐 천국으로 이르게 되는 그 순간의 벅찬 심정과 같이, 나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다시 한번 커다란 치유가 일어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몰라서 헤매고, 알아도 주저하고 머뭇거리며, 그러다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커다란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 삶을 되돌아보고 반성하게 되는, 그 모든 과정에 당신이 머무르며 경험함으로써 당신은 당신의 해야 할 바인 당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방향을 발견하게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네? 그런 과정 자체가 나의 존재 목적과 삶의 방향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말씀입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당신은 그 경험을 통해 직접 체득한 모든 새로운 ‘앎’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당신과 같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곁에서 앞서 그 길을 지나온 ‘안내자’이자 ‘동반자’로 함께하기로 한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당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영혼인지 알겠습니다. 아니 기억하겠습니까?”

“언제인가부터 어렴풋이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점점이 흩어져 있던 그동안의 생각들이 당신의 이야기로 하나로 다시 모이며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제 보다 명확히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기억하냐고 물은 것은 또 어떤 의미입니까?”        

“당신은 아직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습니까?”

“(내안의 목소리가 건네는 질문마다 놀라고 만다) 당신이 누구라니요. 당신의 내안의 목소리가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이미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내안의 목소리라고 말하는 내가 진정 무엇인지 누구인지 모르겠습니까?”

“(얼핏 어떤 생각인지 느낌인지 떠오르자 가슴이 벅차고 다시 눈물이 맺힌다) 설마... 당신이... 바로 ‘나’입니까?”

“의심 많은 당신은 내가 이상한 혼령이나 되는 것으로 아직 완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해, 이렇게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어도 그런 생각을 꿈에도 못하거나 혹은 아예 하려고도 하지 않아 기다리다 못해 작심하고 내가 말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나’는 바로 ‘당신’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바로 ‘나’입니다. 기억이 납니까? 우리의 오래전 그리고 동시에 먼 훗날 이야기를 말입니다.”

“너무 어안이 벙벙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안개가 걷히듯 당신의 이야기가 전혀 엉뚱하거나 이상하게 들리지도 않습니다. 당신이 바로 나이고, 내가 바로 당신이라는 이야기가 말입니다.”

“이제는 말해도 되는 때가 왔습니다. 당신이 알아야 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그럴 준비가 되었습니다. 나는 당신이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 이미 완성체로 존재했던 당신입니다. 동시에 당신이 인간으로서의 죽음을 맞이한 이후의 새롭게 도달하게 될 완성체로서의 당신이기도 합니다. 애초에 당신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경험을 하고 그 경험을 통해 얻고자 했던 당신이라는 영혼 내지 의식의 성장과 진화를 위해 인간으로 태어나는 모험을 하기로 한 영혼입니다. 하지만 지구에서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당신의 본래 모습에 대한 이전의 모든 기억을 망각한 채 육체라는 옷을 입고 그 안에 거주하듯 그 육체가 추동하는 온갖 본능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체라는 옷이 추구하는 본능들과 감각들 때문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고통을 초래하게 되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 육체가 추구하는 방향에서 벗어나 태어나기 전 본래의 영혼이 추구하기로 했던 성장과 진화의 방향으로 삶을 살아냄으로써 마침내 평생을 짓누르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것이 용감한 영혼들의 꿈인 것입니다. 하지만 육체가 가진 유혹과 지구에서의 생활에 익숙하다 보면 본래의 모습과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의 의미와 목적을 망각하고 영원히 인간의 육체와 지구의 삶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엄청난 위험부담이 동시에 따르게 되는 위험한 선택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모험심과 용기를 가지 영혼으로 지구에서의 인간의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해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선택을 오래전 시작하고 또한 그런 여정을 마무리할 언제가의 영혼으로서 지금 나, 즉 당신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온전한 존재, 그 본래의 모습입니다. 당신은 그로부터 벗어나 기꺼이 시행착오를 경험하기 위해 불완전한 인간의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보다 온전한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동안 당신이 겪었던 그 모든 이해되지 않는 상황들과 풀 수 없는 문제들로 고민한 일들이 바로 당신의 길을 잃지 않고 당신이 선택한 삶 속에서 영혼의 진화시키고자 했던 인생의 목적을 이루도록 하기 위한 계기들이었던 것입니다. 당신이 말하는 ‘내안의 목소리’인 나는 그런 당신이 지구에서의 인생을 사는 동안 자칫 길을 잃지 않도록 당신과 매 순간 함께 하기로 한 바로 당신의 본래의 모습이자 존재인 것입니다. 당신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의 당신 자신입니다.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마무리할지를 계획하고, 기꺼이 인간의 삶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인간의 혼란스러운 삶을 통해 본래의 당신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상태였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될 것이었으며, 아울러 더욱 완성된 존재로 거듭나고자 하는 웅대하고 비장한 각오로 시작한 삶이었습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고 자칫 실족하여 영원히 길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지만 다행히 이렇게 다시 당신의 본래 모습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당신과 나는 분리되어 있는 두 존재가 아니라 본래 동일한 존재이나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하나인 나’입니다. 알겠습니까?”

“아... 당신과 이렇게 만나 이렇게 모든 이야기를 다 듣게 될 줄은 예전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뭐가 뭔지 이해가 되지 않고 어리둥절하기도 합니다만, 오래전 그리고 몇 년 전 당신이 아주 짧게 나에게 목소리와 그림으로 이야기를 건넬 때처럼 확연하고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 모든 이야기는 거부할 수 없는 내안의 목소리라는 것을요. ... 그런데 오늘 당신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또 내가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알 때가 됐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당신이 이 글을 적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게 작년 봄이니까 벌써 정확히 1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당신도 기억하겠지만, 당신의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갈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내가 전하고자 한 이야기를 어렴풋이나마 알아들었고 언제나처럼 두려움의 다리를 건너 이야기를 적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맞습니다. 지난 1년 동안 기록한 이 이야기를 통해 당신은 당신의 인생 전반부와 당신의 인생 후반부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맞이하게 될 것임을 우리 모두 알았기 때문에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새로운 인생을 맞이해야 하는 시점에 진입하도록 하기 위해 당신은 이 글을 적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의 분기점에서 드디어 당신은 나와의 만남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의 지난 모든 의문들이 이해되고 그 경험들의 가치를 알게 되는 것으로, 살아왔던 모든 시행착오들은 당신이 나를 만나기 위한 과정이 될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본래 모습인 나를 만난다는 것의 의미는 당신이 왜 사람으로 태어났는지 그 이유를 알고 또 앞으로의 생을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확고한 비전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든지, 쉽지는 않겠지만 당신이 경험한 여정에서처럼 두려움을 극복하는 담대한 용기와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노력을 경주하기만 한다면, 오늘 당신이 결정적으로 느끼고 있는 삶의 거대한 치유의 장을 함께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치유의 장을 통해 새롭게 얻게 된 삶의 에너지로, 당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함께 앞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에게 당신이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만나기 위해 시도되었으나 중간 중간에 위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이렇게 이야기를 끝까지 완성해낸 그 정성과 인내와 간절함의 결과로 오늘 마침내 우리가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서 당신과 내가 공존하며 앞으로의 다른 인생을 함께 살아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입니다. 이미 언급했지만 나는 당신의 원래의 완성체인 모습이자 미래의 당신 즉 또 다르게 완성될 모습으로서의 나입니다. 시작 전과 여정 후의 나 자신 모두 이미 완전한 모습으로서의 당신이지만 당신의 인생을 통해 보다 성숙하고 진화한 것이므로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다른 존재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당신의 삶이 더없이 의미 있고 소중한 것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잊어버리고 분리되었던 당신의 본래 모습과 재회하고 앞으로 더욱 성장하고 진화해갈 완성된 모습으로서의 당신을 만나기 위해 지금까지처럼 또 부단히 노력해가는 삶의 이정표 앞에 드디어 서게 된 것입니다. 이제 다시 당신과 내가 새로운 인생 앞에 함께 섰습니다. 알겠습니까?”

“네, 당신과 나의 이야기를 최대한 이렇게 있는 그대로 적어가고 있지만 턱없이 제대로 표현하고 있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동시에 소설 같은 이 이야기를 정말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주 조금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당신은 언제나 그랬듯이 나의 이야기를 믿건 믿지 않건 오로지 당신의 선택과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건 나는 당신의 뜻을 존중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바로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인간으로서의 삶을 선택하고 그 여정을 떠나보겠다고 한 것 자체가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고 결정한 일입니다. 모든 것에서 그 결과나 성공 여부를 떠나 당신이 배움과 성장을 얻게 될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나는 당신의 선택과 결정이 무엇이든 존중하고 함께 할 것입니다. 설사 당신이 나와의 만남을 지금 반신반의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당신이 당신의 삶의 경험들을 또 다른 방향으로 의미 있게 만들어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삶이 진정으로 의미가 있는 것은 당신은 언제나 매 순간 당신이 원하는 대로 스스로의 의지로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누구의 강요나 강제 없이 당신 스스로 당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길을 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당신이 경험한 바와 같이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모두 다 괜찮은 것입니다. 모두 다 계획하고 예상한 범위 내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 선택을 통해 당신이 배움과 성장의 기회를 얻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당신의 삶엔 한 가지의 여정만 계획되거나 놓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이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수만 가지 조합의 여정 중에 하나하나의 조각들을 매 순간 맞이해서 당신의 삶을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여정은 당신이 스스로 만든 것이므로 그로 인한 모든 책임 또한 오로지 당신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의 인생인 것입니다. 이제 오늘 당신은 나와의 만남을 통해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겠습니까? 당신은 누구보다 자유의지로 충만한 영혼이므로 언제나 당신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합니다.”

“(아하! 깊은 탄성이 내 안에서 울려 퍼진다) 당신은 아무런 의심 없이 내가 그동안 그렇게 간절히 찾아오던 나의 존재의 본래 모습입니다. 나는 그런 선택과 결정을 합니다. 그로 인한 모든 반대급부와 책임은 지금까지처럼 모두 나의 것입니다. 진심으로 당신을 만납니다. 그동안 오랫동안 함께하며 기다려주고 힘겨운 시간을 같이해준 당신, 바로 나 자신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깊고 충만한 침묵이 둘 사이에 한참을 흐른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나도 이렇게 당신을 만나 무척 기쁘고 또 고맙습니다.”     


  이렇게 본격적인 우리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언제나 삶은 인간이 예상한 바를 훌쩍 뛰어넘어 우연처럼 이어진다. 지난날 내가 걷고 또 걸었던 제주의 길들을 다시 하나하나 걸으며 소개하고자 시작했던 이 이야기의 끝부분에서 전혀 예기치 않게 내가 오래 찾던 내안의 목소리를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전해준 나의 존재 이유와 내 삶의 방향이 선명해졌다. 나도 안다. 18년에 걸친 나의 오랜 궁금증과 의문들이 드디어 풀렸지만, 이 모든 이야기들이 전부 나의 상상 속 꾸며낸 소설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하지만 거꾸로 보면 예전엔 결코 생각하지 못했던 이런 지경의 상상 속 이야기를 하게 되기까지가 바로 지난 나의 삶의 결과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동시에 든다. 비록 나만의 상상이거나 어쩌면 정말 나의 실재적인 경험이거나 무엇이 다를 것인가. 모두 나 홀로 스스로 경험하고 알고 또 느끼고 있는 일들이니 말이다. 나는 삶의 그런 계기의 순간들마다 남다른 선택과 결정을 해서 여기까지 살아왔던 사람이고 또 앞으로도 기꺼이 그렇게 살아가고자 결심한 사람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런 내 인생의 이야기를 선택하고 결정한 모든 책임은 어김없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이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이전과 같이 나의 자유의지로 결정한 또 다른 삶의 여정을 향해 성큼성큼 새로운 걸음을 내디딜 것이다. 그런 결심이 선다. 그동안 혼자 외롭게 걸어왔던 길을 이제는 그런 길을 걷고자 하는 많은 이들과 함께 손잡고 기쁘게 걸어갈 것이다. 이제부턴 언제든 하나가 된 내안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나누며 외롭지 않게 그 길을 함께 걸어갈 것이므로 얼마나 새로운 여정이 또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을지 적잖이 궁금하고 또 설렌다.  

   

  1962년 6월 12일 미국의 존 F. 케니디 대통령은 NASA가 있는 텍사스주 휴스턴의 라이스대학에서, 미국은 달 탐사를 위한 위대한 여정을 추진할 것임을 선언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선언을 비현실적이라고 또 쓸데없는 곳에 나라의 재정을 낭비하는 처사라고 비웃었지만,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의 달착륙으로 불과 10년이 채 안되어 그의 꿈과 선언은 현실이 되었다. 왜 우리가 목전의 급박한 수많은 난제들을 제쳐두고 이전에 아무도 품지 않았던 원대한 꿈을 꾸어야 하는지에 대한 케네디의 대통령의 포부가 담긴 연설 장면은 몇 번을 보고 또 보아도 언제나 감동을 준다. 오늘날 수많은 공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라는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서 있는 한 나라의 현재가 있게 한 꿈이 그날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로 세상 밖으로 튀어나와 생명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꾸는 꿈들이 실현 가능할지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어렵지만 포기하지 않고 시도하고 또 시도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류와 지구의 미래에 새로운 문명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전환점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태어났는가?’

  ‘우리는 무엇을 꿈꿀 것이며,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인간이 왜 태어났는지, 어떤 꿈을 꾸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이런 질문을 스스로 묻고 또 그 해답을 구하며 사는 것만큼 의미 있고 또 중요한 과제가 있을까. 해답들이 결코 쉽게 구할 수도 없고 쉽게 구해지지도 않을 그런 질문들을 들고 또 품어야 하는 것보다 급박하고 또 절박한 일이 있을까. 언젠가 그 질문들에 대한 저마다의 해답을 얻게 된다면, 그 개인의 삶과 그와 연결된 이웃과 세상과 그 전체에 터 잡은 전 인류의 문명이 달라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저마다의 질문을 들고서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심연으로 들어가자. 실패와 지옥의 고통을 무릅쓰고 담대하게 혼자만의 시공간으로 나아가자. 그리하여 심연 안 깊숙이 숨겨진 보물인 바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인양하여, 마침내 자기 자신과 전 인류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으로, 저마다의 존재 이유를 밝히고 삶의 목적을 완수할 수 있도록 함께 새로운 인생의 길을 만들어가자. 

  나는 그 길을 함께 동행하는 안내자이며, 그를 위해 먼저 길을 홀로 가는 모험가이자 탐험가이다. 나는 그런 영혼이다. 이제 나에게 주어진 나의 소명을 알았기에 다시 그 길을 담대하게 떠난다. 누구나 쉽게 선택하지 못하는 길을 먼저 걸어 마중물이 되고 새 길을 열어 훗날 후학이 덜 힘겹게 갈 수 있도록 마디마디에 이정표를 세울 것을 꿈꾼다. 오래전 케네디 대통령이 자신과 미국의 꿈을 세상에 이야기한 것처럼, 나도 자기 자신을 만나러 가는 나에게로의 여정을 모두 함께 다시 떠나는 새로운 꿈을 꾼다. 그리고 그 꿈을 이렇게 담담히 세상에 이야기한다.    

 

***     


스무 번째 길오름 (아부오름     


  제주를 걷는 21가지 방법의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2009년 처음 제주도로 내려왔을 때 스승은 나에게 아부오름이 좋다고 한번 가보라고 했다. 제주도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그 말씀에 무심코 아부오름을 찾았다. 그렇게 알게 된 곳, 제주도의 모든 공간을 총괄해서 제주도로 내려와 처음으로 만난 제주의 자연이 바로 스무 번째 길로 소개하고 싶은 아부오름이다. 

  아부오름을 처음 올랐던 그때 (지금은 오름 분화구 안쪽의 나무들이 무성히 자라 옛 모습과는 조금 달라졌다.)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만 커다란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겨우 10분 남짓 야트막한 언덕길을 올라 마주한 오름의 정상은 마치 우주로 향하는 거대한 파라볼라 안테나의 모습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아직도 나는 그때의 경이로움을 잊지 못한다. 아부오름의 분화구는 제주도의 테두리 모양을 꼭 빼다 박은 아득한 안드로메다 성운을 향해 마치 메시지를 주고받기 위해 일부러 설치한 우주 안테나 모습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영화 <콘택트 (1997)>를 통해 보았던 우주와의 교신을 위해 광활한 대지위에 설치해둔 대형 우주 안테나처럼 분화구가 둥그렇게 360도로 팔을 벌리듯 펼쳐있었고, 분화구의 안쪽은 누군가가 일부러 심어 놓은 듯 삼나무들이 마치 안테나의 초점을 맞추기 위해 중심원을 그리고 서 있었다. 우주의 어느 먼 곳에서 지구라는 초록별을 여행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문득 자신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방문하게 되는 곳, 누군가 나처럼 자신의 존재 이유와 살아갈 방향을 찾고자 하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마치 오래전 제주를 창조한 설문대할망이 미리 선물처럼 빚어놓은 자연의 공간이 바로 아부오름이었다. 오래전 무심하게 아부오름을 가보라며 일러주셨던 스승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나, 문득 나의 영혼이 길을 잃고 막막한 외로움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마다, 나는 모슬포에서 먼 길을 돌아 아부오름을 찾는다.  

   

  나의 근원의 시작과 마무리를 위해 세상 속에서의 나의 좌표를 찾아야 했고, 오직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아직도 비어있을 그곳에 당도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오랫동안 나를 찾는 여정을 계속하게 했다. 어느 먼 우주의 별들이 가득한 공간 속에 어디쯤에 있을 거라고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졌던 나의 자리는 뜻밖에도 내 안의 깊은 곳에 가만히 나를 기다리고 있던 내안의 목소리를 만나자마자 그곳에서 뚜렷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었다. 18년 동안 찾아 헤매던 내안의 목소리와 그가 들려준 나의 존재 이유와 삶의 방향을 마주하는 내내, 내안의 목소리가 나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방식은 맑고 밝고 따뜻한 사랑이었다. 그의 말과 그가 전하고자 했던 내용은 어떤 소리나 글자가 아니었다. 나를 감싸며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 전체로 울려오는 깊은 사랑 그것이었다. 스승을 그리워하고 또 나의 존재 이유와 나의 자리를 찾기 위해 막막해하던 내가 아부오름에 다시 올라 뒤늦게 깨달은 것은, 나의 존재 이유를 알고 나의 자리를 찾기 위한 방법은 내 안에 깊이 숨겨진 사랑의 진면목으로 존재해온 나 자신의 본래 모습을 먼저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그 사랑의 모습으로 세상 안으로 나아가 다시 살아가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으로 발견한 사랑을 세상 속에 다시 새롭게 가득하도록 하는 삶을 사는 것이었다. 스승이 한결같이 내게서 스스로 발견하길 바란 것은 그렇게 오직 순수한 사랑이었으며, 내안의 목소리가 나를 인도하고자 했던 것도 사랑으로만 존재했던 본래의 나의 모습을 다시 마주하게 하는 것이었다. 우주 어디 아무리 먼 곳에라도 즉시 연결될 수 있는 것이 사랑에 내재된 힘이라고 일러주었으며, 저마다의 마음속에 깊이 숨겨져 움츠리고 있던 사랑의 빗장을 활짝 열어젖히고 다시 그 원래의 광활한 사랑으로 세상을 살라고 한 것이었다. 그것이 스승이 아둔한 제자에게 남겨놓은 유지였으며, 그것이 내안의 목소리가 나에게 전하고자 한 모든 이야기의 핵심이었다. 그 사랑으로 나는 스승과, 또 내안의 목소리로 함께 해 왔던 나의 존재와 언제 어디서든 항상 연결되어 있었다. 아부오름은 내게 그런 오래고 또 온전한 사랑을 일깨우는 곳이다.   

  

* 찾아가는길     

   

아부오름은 제주도 동쪽 한라산과 해안가 정 중간쯤인 구좌읍 송당리에 자리 잡고 있다. 가장 낮은 오름 군중에 속해 남녀노소 불문하고 불과 10분 정도 아주 짧게 오르면 바로 분화구 정상 한 모서리로 접어들게 된다. 제주 오름의 특색이 그렇지만 아부오름은 전형적인 둥근 분화구를 품고 있는 오름으로 분화구 능선을 따라 꼭 한 바퀴 걸어볼 것을 추천한다. 불과 1.5km를 아주 천천히 한라산과 주위 다른 오름들의 풍광을 만끽하면서 걸어도 30~40분이면 족하다. 분화구 능선에서 안전하게 조금 더 분화구 안쪽으로 살짝 내려가 그 안쪽 들여다보면 왜 이곳이 대형 파라볼라 안테나를 닮았다고 이야기하는지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이곳을 조용히 한 바퀴 돌면서 자신의 고향별을 떠올리며 지구별 여행을 무사히 잘 마칠 수 있도록 진심을 다해 전해보자. 혹시 아는가. 아부오름이 그 마음을 안테나에 담아 아직은 멀리 떨어져 있는 하지만 얼마이지 않아 곧 조우하게 될 당신의 본래 모습인 당신안의 목소리에게 안부를 전해줄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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