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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보식 Feb 20. 2021

< 길 위의 명상 >

18. 혼돈을 대하는 자세_곶자왈 제주도립곶자왈공원



  흐르지 않은 적이 없는 강물처럼, 지나지 않는 적이 없는 시간처럼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하는 것이 우주의 법칙이다. 변화를 거부하는 모든 것은, 강물도 시간도 사람도 문명도 모두 죽을 때뿐이다. 그러므로 가장 거대한 생명체로서의 우주와 그 안의 지구와 그 안의 인류와 그 안의 나는 모두 달라져야 한다. 그 변화의 시기가 지금 나와 우리 모두 앞에 도착해 있고, 변화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것을 의미하므로 변화 자체는 온통 혼돈을 야기할 뿐이다. 그래서 위협적이고 두렵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움직임과 변화가 우주의 대전제인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나와 우리와 지구 전체에 동시적으로 그간의 평탄한 흐름의 시간대를 지나 어떤 변곡점을 맞이해야 하는 시점에 접어들어야만 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면, 그로 인한 기존과의 다름 즉 혼돈은 우연 같은 사건으로 왔음에도 오는 그대로 필연이요 수순이다. 변화가 야기한 혼돈은 우주의 흐름 속에 당연한 것이므로 우주의 법칙 안에 포함된다. 혼돈은 변화의 과도기적 증상이며 표피의 일시적 모습일 뿐이다.      


  어느 날 뜬금없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에서 시(詩) 하나가 날아 들어왔고 나의 오랜 방황과 시행착오가 끝났다. 시 한 편으로 어떻게 삶이 바뀌는 그런 일이 가능할까. 하지만 그랬다. 더 이상 헤맬 필요가 없어졌다.      


<혼돈을 사랑하라> - 알베르트 에스피노사    


“세상이 가르쳐 준

모든 규칙을 잊으라. 

    

너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고

너 자신의 언어를 정의하라.   

  

너의 혼돈을 억압하는 대신

사랑해야 한다.     


만약 너의 혼돈을 사랑한다면

이 세상은 해답을 주지 못할 것이다.

해답은 네 안에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될 것이다.     


너의 가장자리를 두려워하지 말라.     


누군가가 너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

그에게 말하라.

‘나의 혼돈을 사랑하라’고.     


너의 혼돈에 질서를 주입하려고 하는

세상에 반역하라.


네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세상을 힘껏 두드려야 한다.     


두려움은 단지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에 불과할 뿐,

네가 해답에 다가갈수록 우주는

너와 놀이를 하며

너로 하여금 질문을 잊게 할 것이다.  

   

너 자신이 돼라.     


남들이 원하는 사람이 되면

정복당할 것이니,

너의 혼돈을 사랑하라.  

   

너의 다름을 사랑하라.     


너를 다르게 만드는 것

사람들이 너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

사람들이 너에게 바뀌기를 원하는 것

너를 유일한 존재로 만드는

그것을 사랑하라.”     


  사람은 이 말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다른 생각을 하거나, 진심은 이것이어도 말과 행동을 전혀 다르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의 모든 감정과 생각을 동시에 모두 정확하게 한꺼번에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지구상의 말이나 언어 또는 특별한 기술로는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한 인간의 감정과 생각처럼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채로 혼재해 있는 것이 지구의 이 삶의 지금과 여기의 모습이다. 그런 혼돈에서 우주의 질서를 찾고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이것이나 저것으로 무턱대고 결정되지 않는 가운데 최선의 결정은 무엇일까. 그냥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 것일까. 어중간함의 혼돈을 피하고 싶어서, 그 불확실성을 피하고 싶어서 우리는 양극단을 오가며 선택과 후회를 무한 반복해오지 않았던가. 정반합의 변증법 이외에 다른 진화의 방법이 없는가. 혼돈 한가운데에서 거대한 질서 안의 평안을 동시 얻는 방법은 불가능한 것인가. 무언가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뭐라도 하면 좋아질 거라는 믿음에 따른 막연한 무언가가 아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참고 이겨내는 것으로 그냥 있는 그대로 혼란 그대로 그 모두를 통째로 받아들이는 방법이 가장 나은 것은 아닐까. 만약 최선의 방법이 그렇다면 도대체 아무것도 아닌 내가 해야 하고 또는 할 수 있는 또 다른 그 무엇은 도대체 무엇일까.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 해야 하고, 그 다음 아무것도 내가 하는 것이 없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나로 하여금 하도록, 그 전체로 수용하면 되지 않을까. 나 이되 혼란에 혼란만을 가중시키는 이전까지의 에고를 탈피한 나, 즉 순수한 속 알맹이 영혼인 본성으로 존재하는 내가 만약 그 무언가를 한다면 가능한 일 아닐까. 모두 내가 하는 것이지만 내가 하는 것이 아니기도 한 그것이면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 이것이나 저것으로 구별해서, 나의 유익에 부합하는 것 이외 모든 것을 부정해온 에고인 나의 단계에서, 변화의 과정으로 드러나는 혼돈을 특별한 고통으로 여기지 않고 그 혼돈 자체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그냥 품어내는 다른 단계의 나로 전환 가능하다면 (그걸 본성으로 존재하는 나의 단계로 칭한다면) 내 안의 본성을 되찾고 내 안의 본성으로 주어진 모든 것을 살아갈 수 있다면, 나는 우리는 어쩌면 혼돈이라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본성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그 본성을 찾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었던가. 어떻게 하면 평상심의 흔들림이 없는 그 자리를 찾고 지키고 그곳에서 계속 머물 수 있을까. 혼돈의 지구에서 절대고요의 우주는 어디에 있는 걸까.      


  큰아이의 아픔은 예측할 수 없는 어딘 가로부터 느닷없이 나에게 던져진 어떤 일이었고, 그로인해 ‘나는 왜 태어났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내 삶의 혼돈이 시작되었다. 2019년 코로나바이러스 또한 상상 밖의 차원에서 갑자기 3차원의 지구 안으로 들어와 온 세상을 예외 없이 들쑤셔 놓았고 지난 1년이란 시간 동안 세상은 지금껏 살아온 시간의 경험 내에서 가장 동시적으로 지구 전체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은 일로 이어지고 있다. 아이의 아픔으로 나의 삶은 전혀 다른 행로를 걷게 되었고, 코로나바이러스 또한 우리의 삶을 불과 얼마 전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으로 바꿔 놓았다. 백혈병으로 인한 아이의 아픔과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세상의 아픔 모두 상상 밖의 일이었으므로 ‘우연’이라고 하겠으나, 그 우연이 나와 세상의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아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혼돈으로 이끌었으므로 ‘사건’이기도 했다. 그런 우연과 사건이 왜 나에게 우리에게 닥치게 되었는지 그리고 도대체 그것 때문에 나와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아무도 몰랐고 또 아무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아이의 아픔과 코로나바이러스는 나에게 닮음 꼴이었다. 아이의 아픔으로 당장 내가 아프거나 내가 죽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의 아픔으로 당장 대부분의 우리가 아프거나 죽는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멀쩡하고 어제와 다를 바 없이 생생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나는 아이의 아픔과 세상의 아픔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그 두 아픔의 큰 정체와 이유를 밝혀야 하는 숙제를 제우스가 내린 아틀라스에게 내린 형벌처럼 두 어깨로 고스란히 받치고서 신음하게 되었다. 그동안 배운 나와 우리의 상식과 이성으로는 도대체 이것 또는 저것의 해답을 내놓지 못하거나, 아니면 겨우 나와 우리의 수준에서 그럴싸한 대답을 내놓고 잠시 동안 안주하며 버거운 짐을 떠받치기 위해 다음 숨길을 고를 뿐이었다. 아이의 아픔으로 나는 나의 삶의 목적과 방향을 찾아야 한다는 내안의 목소리를 들었고, 거기에 이어져 지구의 아픔으로 우리는 우리 인류문명의 새로운 방향을 찾아야 한다는 영장류 전체를 대변하는 목소리를 희미하게 듣고 있을 뿐이다. 나에게는 지금까지 살아온 방향과 전혀 다른 방향에로의 삶이 요구되었고, 우리에게는 인류가 지금까지 치달아온 문명의 방향과 전혀 다른 역사의 전개가 요구된 듯하다. 하지만 요구된 새로운 길들은 너무나도 불가역적일 만큼 지난 삶과 문명의 흐름이 도도하고 굳건했기에, 그걸 되돌려야 한다는 나와 우리 안의 목소리는 끝없는 갈등과 혼란의 증폭제일 뿐이었다. 나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내안의 목소리를 따라 삶의 방향을 틀었고, 그에 따라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삶을 사는 것 자체가 혼돈이었지만, 내안의 목소리가 어디로 나를 향하게 하는지 점점 더 명확해져 가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지구 차원에서 현 인류 전체가 이미 다가온 그리고 앞으로도 다가올 혼돈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문명의 흐름을 거슬러 새로운 방향으로의 문명 모색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또한 점점 더 분명해져 갔다.

  그동안 일정한 방향과 더해가는 속도로 안정성을 유지하고 있던 개인의 삶과 인류의 삶 전체에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자, 지옥과 같은 혼돈으로만 존재했던 삶과 시간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견고한 박스 속에 들어있는 물체가 딱딱한 고체라면 박스가 흔들릴 때마다 그 안의 고체는 박스 안에서 부딪히며 산산이 부서져나갈 것이다. 하지만 만약 박스 안의 물체가 액체이거나 더 나아가 새의 깃털 같은 기체로 있다면 아무리 박스가 크게 흔들려도 그 안에서 출렁이거나 일렁일 뿐 특별히 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고 우리는 변하지 않는 딱딱한 고체덩어리를 고집할 것인가 유연하게 흔들리며 이 변화의 시간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맞이하는 액체로 또는 기체로 화(化)할 것인가를 지혜롭게 선택해야 하는 시점에 와있다. 우주 자체가 거대한 카오스이며, 동시에 카오스를 품고 있는 어떤 질서 내지 섭리로서의 코스모스이기도 하단 걸 상상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도 그와 다를 것이 전혀 없다. 우리 인간 모두는 우주의 축소판인 소우주이기도 하므로 그렇다. 삶 자체가 고통과 혼란의 한 가운데에서 평화와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며 나아가는 힘겨운 날갯짓이므로, 거대한 전환을 요구하는 변환의 시간이 고통과 시련의 옷을 입고 다가오는 것을 저항하지 말고 기꺼이 맞이하며 굳어진 몸과 마음과 영혼을 모두 유연하게 그리고 나풀거리게 힘을 빼야 한다. 그렇게 혼돈을 맞이할 준비가 된 이들에게는 혼돈의 이름으로 다가오는 이전에 없는 새로움의 창조를 경험하는 것이 마치 선물처럼 여겨질 것이다. 나는 아이의 아픔과 지구의 아픔으로 다가온 혼돈을 그렇게 생각하고 아무런 저항 없이 모두 있는 그대로 기꺼이 내맡기고 또 기꺼이 맞이하는 삶의 자세를 선택하기로 했다.       


***            

        

열일곱 번째 길곶자왈 (제주도립곶자왈공원     

  

  제주도립곶자왈공원은 2012년 제주도가 주체가 되어 제주 영어교육도시가 있는 제주 남서쪽 지역 일대 약 50만 평의 대자연을 공원으로 조성한 공원이다. 자연은 인간의 손이 더해지는 순간 그 가치를 훼손하고 파괴되어 가기 마련인데, 지자체와 함께 곶자왈을 지키고 보전해온 전문가들이 오랫동안 정성을 들여 그 본래의 아름다움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보다 많은 사람이 제주의 진면목인 곶자왈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손길로 잘 정비해 둔 곳이다. 제주도립곶자왈공원은 전체가 약 5개의 산책코스로 구성되어 있는데, 시간이나 체력에 맞게 어느 코스를 이용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총 거리 약 4.5km에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되는 코스가 가장 긴 코스이므로 넘어질 위험이 있는 노약자나 장애인이 아니라면 탐방안내소부터 시작해 갈림길에서 어느 방향을 택하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어있는 최장코스를 추천하고 싶다. 탐방안내소부터 갈림길까지는 짧지만 나무데크로 길이 연결되어 안전하게 곶자왈의 신비로움을 경험할 수 있으므로 휠체어를 이용해도 산책 가능한 곳이며, 갈림길에서 왼쪽 전망대까지는 코코넛 껍질로 짠 카펫이 잘 깔려있어 노약자라도 큰 위험 없이 접근 가능하다. 곶자왈이 돌밭이라고 너무 어렵게 여기지 말고 내처 조금 더 가보길 바란다.    

   

  제주도의 곶자왈은 그곳 자체가 혼돈의 상징 같은 장소이다. 사시사철 푸른 녹색 이끼에서부터 열 가지가 넘는 다양한 고사리가 오래전 화산 폭발로 용암이 흐르다 굳어버린 돌밭 위로 형성된 잡목 숲의 아래층을 숲 전체에 카펫을 깐 것처럼 덮고 있고, 그 위에는 수십 종 어쩌면 수백 종에 이를지 모르는 온갖 식물들이 군무를 하듯 숲의 중간을 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또 그 위로 가장 높은 곳엔 마치 영화 아바타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생명나무들처럼 키 큰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도시에서 가까운 육지의 숲에 익숙한 이들은 이곳에 들어서면 전혀 다른 세상으로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처럼 생경한 이 숲의 향연에 어안이 벙벙해지며 한참을 두리번거리게 된다. 그 생경함과 놀라움의 원천은 바로 곶자왈을 이루는 이곳 용암 돌밭 잡목 숲의 다양성 때문이다. 숲으로 들어가 한참이 지나서야 세세한 하나하나의 생명들이 구별되기 전까지 그 다양성은 혼돈 그 자체이다. 그래서 다양성이라고 설명하는 그 혼돈을 간직하고 있는 곶자왈은 모든 것이 어떤 것이어도 모두 다 괜찮은 사랑과 용서의 장소이기도 하다. 곶자왈의 자연의 품으로 거듭 들어가게 되는 것은 마치 어머니의 품 안으로 찾아 들어가는 아이들의 쉼 없는 몸짓과 같이 그곳이 사랑으로 응집된 용서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누구든지 받아들이는 사랑의 모습이 용서의 진정한 의미이기에, 그 사랑과 용서의 정의가 제대로 발현되는 최적의 장소가 곶자왈의 자연으로 있다. 

  그래서 살아가는 대목 대목마다 힘겨움에 짓눌려 숨쉬기조차 어려울 때 나를 살리는 유일한 행위는 어떤 판단과 단죄도 없는 곳에서 빛을 찾지 못해 절망에 허우적거리는 나의 영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용의 공간인 자연을 찾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자신의 전부를 맡기고 자연이 그 온전한 전체의 맡김을 그대로 품어 안는 순간에서 나는 생명의 호흡이 다시 가능해졌으며 절망의 나락에서 다시 빛을 찾으려는 의지가 찾아와 고개를 들고 시선을 다르게 이동하게 되었다. 모든 것의 정화가 가능한 곳은 절대순수의 사랑 에너지만으로 가능한 모성과 자연으로 지구상에 존재하게 되며, 그것 자체가 우주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곳이므로 광활한 우주의 어느 별에서 지구를 찾은 우리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어머니와 자연 안에서 우주의 본질을 조우하며 용서와 휴식과 충전과 새로운 시작이 가능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자연을 찾는 것은 우리가 태어난 어머님의 뱃속으로 회귀하는 것이며, 생명으로 태어나기 전 우주의 본성으로 존재했던 본래의 상태로 환원되는 것이다. 영원의 에너지인 사랑이 흐르는 그 공간에서 우주 전체를 구성하는 사랑의 기운으로 재충전되기에 우리는 다시 절망과 아픔에서 다시 살아갈 용기와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자연을 찾고 그곳에서 자연과 교감을 나누며 걷고 또 머무르는 행위는 그런 끝없는 회귀의 몸짓이다.                     

 

“아 자비여 아 신성한 인간성이여!     

아 용서, 연민, 그리고 동정이여!      

내가 만일 순결하다면 난 결코 그대들을 알지 못하였으리.     

내가 만일 오염되지 않았다면 난 결코 그대들의 신성함을 찬송하지 못했으리라, 그대들의 위대한 구원을 기뻐하지 못했으리라.”  


- 이종민 <변증법적 상상력,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세계> 중에서     


  제주도로 내려와 제주의 바다와 한라산의 숲과 그 사이 오름과 곶자왈을 만나고 그 속을 걷고 헤매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코 사랑과 용서를 만나지 못했을 것을 직감한다. 나에 대한 원망과, 그에 대한 원망과, 세상에 대한 원망 속에서 끝없이 분노하고 좌절하며 죽어갔을 것이다. 나의 미숙함과 실수들을 다시 바라보고 마찬가지로 그의 미숙함과 실수들을 돌이켜 보고, 나와 그로 함께 어우러진 세상의 미숙함과 실수들을 전체로 관망할 수 있기까지 걷고 또 걸으며 용서의 본질, 사랑을 거듭 깨달아야 했다. 다시 나를 사랑할 수 있기까지, 다시 그를 사랑할 수 있기까지, 다시 세상을 사랑할 수 있기까지, 돌아선 등을 되돌려 모두를 마주하고 우선 껴안을 수 있어야 했고, 그런 다음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등을 토닥일 수 있는 용서를 배워야 했다. 그렇게 내 안의 에고를 벗어난 본성의 자리가, 지구 안에 우주의 고요를 품은 자리가 제주도의 곶자왈이라는 또 다른 대자연의 품 안에서 숨은 보물상자처럼 항상 머물러 있어 왔다.      


* 찾아가는길     


교통편은 자가차량이 없을 경우, 제주시와 모슬포 운진항간을 오가는 151번과 255번 버스를 이용하면 영어교육도시 정거장에서 하차해서 5분 남짓 도보거리의 탐방안내소를 만날 수 있다. 제주도립곶자왈공원은 최근 코로나바이러스뿐만 아니라 다양한 제주도의 날씨 여건에 따라 운영지침을 그때그때 변경하여 출입 여부나 사전예약제를 적용하므로 가기 전에 탐방안내소(064-792-6047)로 미리 확인해보고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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