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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보식 Dec 19. 2020

< 길 위의 명상 >

17. 단순함과 고요함_곶자왈 비자림



   인간의 영혼을 본능의 차원에서 본성의 차원으로 고양시킨 다음 영혼의 방향을 낚아채서 마침내 자신만의 길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나는 무엇을 위해 태어난 사람인가. 나는 무엇으로 의미 있는 살아있음을 스스로에게 입증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내 삶의 목표와 방향을 찾기 위해 먼저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되는지 그리고 무엇을 준비하면 되는지부터 알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모든 것을 제쳐두고 자기 자신에만 집중할 수 있는 내 안팎의 고요함을 구비해야 했다. 고요함을 구비하기 위해 번잡스러운 도시를 떠나 그동안 나의 관심을 분산시켜왔던 사방팔방으로 펼쳐진 시선과 세상의 모든 자극들에 탐닉하는 나의 감각들을 거두어 삶을 최대한 단순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 준비과정들을 위해 제주도의 자연 속 길들을 수없이 그리고 오랫동안 걸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그녀는 1946년생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행위예술가다. 젊은 시절 연인인 율라이와 함께 5년간 밴 한대를 구해 그 좁은 공간에서 지내며, 서로 사랑하고 함께 일하고 또 여행을 했다. 돈이 없어 양목장을 찾아가 우유를 직접 짜서 얻고 기름과 샤워할 곳을 찾아 여기저기 주유소를 찾아 헤매는 시절을 그렇게 보냈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고 원하는 모든 일들을 거침없이 시도하는 삶을 살았다. 먹고 사는 것과 사랑하는 것과 일하는 것 이외에 그 무엇에도 두 사람의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는 삶을 살았다. 그 시간이 지나자 마리나는 자신이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명확히 알게 되었다. 5년간의 밴을 타고 다니는 노마드식 생활을 통해 지극히 단순하고도 미니멀한 삶을 살았고 마침내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았다. 그 이후에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미친 듯이 살았다.

  그렇게 미친 예술가로 불리기도 하던 세월이 한참 흘러 2010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초대를 받았다. 마리나는 3개월 동안 전시실 한가운데 마련된 의자에 앉아 온종일 꼼짝 않고 바로 앞에 마주 앉은 관람객과 눈을 맞추며 가만히 응시하는 것을 행위예술로 하는 전시를 했다. 겨우 며칠 또는 몇 주가 아니라 무려 3개월 동안 하루 온종일 그렇게 했다. 전시회 기간 동안 총 850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했으며, 마리나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말없이 바라보는 퍼포먼스에 직접 참가한 사람의 숫자가 무려 1000명을 헤아렸다. 마리나를 만나기 위해 매일매일 MOMA 입구의 보도는 길게 줄을 선 관람객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설령 그녀와 직접 마주 앉아 바라보는 전시에 참여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곁에서 관람객으로 뮤지엄 바닥에 여기저기 주저앉아 몇 시간씩 마리나의 응시 퍼포먼스를 지켜보며 수많은 사람들이 울고 미소 짓고 위로를 얻고 또 영감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그녀에게는 매일 새로운 한계를 넘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태산 같은 자세로 흔들림 없이 고정되어 있는 가운데 지옥 같은 시간을 이겨내기 위해, 마리나는 자신만의 고요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울이 되어 상대방을 비추는 것으로 가만히 누군가를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주는 것, 마리나의 행위예술은 지금까지 어떤 예술도 시도하지 않았던 ‘직접 커뮤니케이션’ 그 자체였다. 어떤 매개체나 작품을 통하지 않는 관객과 바로 마주 대하는 직접성과, 관객과 현장에서 공존하는 시간과 공간의 현재성으로, 또 다른 예술을 시도하는 무지무지한 집중과 그에 따른 체력과 에너지가 필요했다. 아무런 움직임조차 없는 가운데 가만히 상대방을 응시하기라는 정적인 퍼포먼스와, 그 정적인 퍼포먼스를 이어가기 위해 자신안의 고요 속에서 마주한 관람객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만나고 또 포용하는 것으로 머물러야 하는 가장 적극적이고도 동적인 동시에 보이지 않는 내적 액티비티를 연결한 전시였다. 사사로운 인간의 움직임을 죽이고, 우주의 고요를 자기 자신 안에서 발견한 다음 그 우주의 모습으로 모든 이를 대하고 포용하는 극적인 사랑의 행위가 담겨있는 예술이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다. 오래전 5년간의 밴-노마드 생활을 마치고 발견한 마리나의 목표를 완성하는 순간이었다.  

   

  날 때부터 어떤 분야에 천부적인 자질을 발현하는 신동이나 영재들과는 거리가 먼, 나같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에겐 자기 자신이 무엇을 바라고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지를 발견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요즘 같이 혼란스럽고 빠른 속도의 세상을 살면서 자신의 바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일 수 있게 가만 놔두지 않는 주위의 모든 당김과 유혹들을 우선 모두 잠재워야 한다. 우리를 혼란케 하는 모든 물건과 장치와 장식품과, 더불어 세상의 일방적인 요구와 세상의 단편적인 시선에서 철저히 벗어나야 진정으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어쩌면 나아가 내가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해답에 이를 수 있다. 행위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삶을 보면서, 자신을 알게 되고 그런 다음 세상 속 사람들과 만날 수 있게 되기까지 그것을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단순함’과 ‘고요함’을 찾아가고 감내하는 여정이 우리에게도 저마다의 모습으로 시도되어야 함을 알았다. 내게 있어 ‘단순함’은 도시의 분주함과 번잡스러움을 벗어나 제주도의 자연으로 들어와 특별할 것 없는 시골의 일상을 살아가는 것으로 찾아졌으며, ‘고요함’은 제주도의 자연 속을 오래 그리고 천천히 그리고 말없이 걷는 날들의 반복 위에서 만나졌다. 마리나가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가운데 마주 보는 것으로써 예술행위의 승화를 이루기 위해 그녀 안의 고요함을 찾아냈던 것처럼,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찾기 위해 나 또한 고요함과 더불어 아무런 움직임 없이 한참을 버텨낼 수 있을 만큼의 체력과 에너지를 만들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채식을 하면서 몸을 더욱 가볍고 편안하게 그리고 평화롭게 할 수 있었다. 몸이 가벼워지자 마음도 따라 가벼워졌다. 가볍게 되었다는 의미는 원하는 대로 내가 하고자 하는 바를 즉시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고, 편안하고 평화롭게 되었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에 가만히 오랫동안 관심과 에너지를 모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게 나는 몸과 마음을 원하는 곳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되고서야 세상 밖 여행을 향해 내가 원하는 대로 떠나고 머물 수 있게 되었고, 또한 레이저와 같은 시선으로 세상 속의 많은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들이 펼쳐진 책 속의 수많은 길들로 떠나는 독서여행도 가능해졌다. 나에겐 내 삶의 목표를 찾기 위해 세상 밖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두발 여행과 세상 속 사람들의 이야기 속으로 떠나는 책 읽기 여행이 모두 필요했으며, 그리고 그런 나만의 여정을 떠나기 위해 무엇보다 삶의 단순함과 고요함을 갖추어야 했다. 

  도시를 떠나 제주도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 제주의 자연 속을 오래 걷고, 채식을 하며 건강한 눈과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세상과 책 속으로 여행을 하게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에서의 전제조건인 단순함과 고요함에 이르는 과정은 마치 나만의 호흡을 찾는 것과 같은 노정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영향 받거나 방해받지도 않는 흔들림 없는 평화로운 숨결을 갖게 되기 위해, 떠나고 걷고 비우고 또 가볍게 하는 것으로 점점 더 나만의 호흡으로 다가가고 깊어질 수 있었다. 나만의 단순함과 고요함을 찾는다는 것 그리고 나만의 호흡을 갖는다는 것은 그제야 세상과 그 안의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할 자세를 갖추게 됨을 의미한다. 내 삶의 목표와 방향을 찾는다는 것은 세상과 그 안의 사람들을 어느 누구와도 똑같을 수 없는 나만의 개성 있는 방식으로 만나고 또 사랑한다는 의미와 맞닿아 있다. 하지만, 뜻밖에도 삶의 목표와 방향을 찾는 것은 단순함과 고요함을 찾고 그곳에서 나만의 호흡으로 머무르면 자연스레 떠올라 알게 되는 것이므로, 그 목표와 방향을 찾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 안에 깊게 숨어 있는 자신의 개성이 표면으로 드러나 발현될 수 있도록 자기 자신과 주위의 모든 외적 동요와 번잡스러움을 제거한 상태에 이르고 또 머무르는 것 자체를 우선의 목표로 삼으면 되는 것이었다. 점점 더 내안의 목소리가 오랫동안 함께하며 인도해왔던 곳으로 가까워져 가고 있음을 느꼈다.  

   

***     


열여섯 번째 길곶자왈 (비자림   

  

  이번 열여섯 번째길은 비자림이다. 비자림으로 들어가 보면 수천 그루의 비자나무가 군락지로 곶자왈 한 가운데 조성되어 한라산 숲길이 아닌 곶자왈 편에서 소개하는 게 더욱 어울린다. 비자림(榧子林)의 비자나무는 얼핏 보면 주목나무 잎처럼 생긴 듯하지만, 한자인 비자나무의 ‘榧(비)’에서처럼 잎이 난 모양이 참빗의 양쪽 솔처럼 좌우 옆으로 대칭을 이루며 자라서 쉽게 구별할 수 있다. 비자나무는 예로부터 목재가 좋아 고급 바둑판의 재료로 애용되었으며, 그 열매는 소독 성분이 강해 구충제로도 많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한라산의 숲치고 치유의 숲이 아닌 곳이 어디 있을까만 비자림은 비자나무숲만의 특별한 멸균 성분과 피톤치드로 치유의 숲 중 으뜸으로 꼽는 곳이다. 

  비자림 산책로가 긴 코스의 경우에도 불과 3.2km밖에 되지 않고, 산책로 또한 스코리아(화산송이)로 깔려져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1시간 내지 1시간 30분 동안 전혀 힘들지 않은 가운데 최고의 힐링시간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최근 들어 제주도 한 달 살기가 다시 증가하는 추세인데, 많은 사람들이 비자림 인근에 거처를 마련하고 아침저녁으로 가족이 함께 호젓하게 산책을 하며 도시에서는 꿈꾸지 못할 제주도만의 특별한 휴식을 보내고 있다. 특히 요즘같이 국민의 1/3이 암환자가 되어 고통을 겪고 있는 시대에 수술이나 항암치료를 마치고 충전과 회복을 위한 목적으로 많이 찾는 이들에게 비자림이 제주 치유의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저절로 연신 고개가 끄덕여진다. 몸이 특별히 나쁘지 않더라도 누구든지 비자림 산책로를 걷고 있자면 서둘러 내딛던 걸음을 멈추고 비자림의 숲 경관에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수백 년 된 비자나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몇 사람이 둘러싸야 겨우 손이 맞닿을 정도로 아름드리 비자나무들이 사방팔방으로 하늘 가득 나무줄기를 펼쳐놓은 자태에 입이 벌어져 다물 줄 모른다. 오래되고 높게 자란 비자나무의 위용 아래 대한민국 어느 숲 속에서도 보지 못하는 신비한 광경을 마주한 이들은 기대 이상의 감동으로 몇 번이고 다시 찾게 되는 곳이다.        

  산책로의 2/3 지점쯤에 8백 년이 넘은 천년기념물로 지정된 최고 최대의 비자나무를 만나면 그런 감동이 피날레에 이르고 천천히 나머지 길을 걸으며 남은 짧은 길을 아쉬워하게 된다. 비자림은 시간이 없어 제주도 길을 딱 한 곳만 걸어야 할 경우에도 주저 없이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제주 곶자왈과 제주 숲을 동시에 품고 있는 보물 같은 장소다. 사계절 언제든지 좋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비나 눈이 와서 사람들이 뜸할 땐 더욱더 장관인 비자림을 만날 수 있다. 몸과 마음이 무겁고 번잡스러워져 다시 단순하고 고요한 나만의 호흡을 되찾아야 할 때마다 가고 또 가게 된다.     


* 찾아가는길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제주도 동쪽 구좌읍 평대리에 있는 비자림으로 가는 260번 버스를 타면 1시간30분경 소요된다.    

  

* 주위추천명소 

    

- 시흥 해녀의집

비자림을 들린다면 차량으로 20분 거리의 <시흥 해녀의 집>에 들러 명물 조개죽이나 전복죽을 점심으로 권한다. 제주도엔 해안가 마을 곳곳에 물질하는 해녀할망들이 직접 채취한 해산물들로 식당을 운영하는 해녀의 집들을 만나 볼 수 있는데 그 중의 최고인 곳이다. 지금은 비건채식 때문에 나를 위해 들르지는 않지만 지인과 함께 비자림이나 제주의 동쪽을 가게 되면 일부러라도 꼭 들러 이곳 음식을 맛보게 한다. 개인적으로 제주도의 향토별미 맛집 다섯손가락안에 꼽는 곳이다. (064-782-9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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