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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보식 Mar 05. 2021

< 길 위의 명상>

19. 따로 또 같이_오름 따라비오름&쫄븐갑마장길



  회사로 향하는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내려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순간, 나 자신이 나를 떨어져 바라보는 시선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아무도 미소 짓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로 모두 두꺼운 옷깃을 세워 여미고 걸으며 주위에 한마디의 인사나 미소도 건네지 않은 채 바삐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 사이에 나도 끼여 있다. 9시 출근시간 전에 자신의 사무실 자리로 들어가는 것 이외에 아무런 생각도 영혼도 없는 사람들의 움직임과 그리고 그 무리 속의 내 모습은 마치 좀비와 같았다. 그냥 그렇게 사는 것 말고는 다른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의 사람들 같았다. 다르게 산다는 것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그래서 다른 생각을 포기하고 남들과 똑같이 사는 안전함을 택하고 자신의 영혼을 그 안에 그대로 바친 채로 내맡겨 버린 모습이었다.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게 아니었다. 내가 만약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아무런 경제적 어려움이 없이 자랐다면, 아버지의 강권으로 말미암은 선택 덕분에 세상의 정점에서 이익을 향유하는 소수집단에 편입되었다면, 대기업의 직장인으로 승승장구하며 한편 재테크에서조차 번번이 성공하여 더욱 넓은 집과 편안한 삶으로 계속되었다면... 그랬다면 나는 행복했을까. 그랬더라도 지금의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현실이 되어버리지 못한 현실을 가정하는 자체가 부질없을 수 있지만, 현재의 세상을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향에 대해 만약 그런 가정대로 살게 되었어도 나는 정말 행복했을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하지만 나에겐 다른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Wake up, Neo...”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깨우는 모니터 화면 글자처럼, 나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일이 오래전 생겨버렸고 그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 변화는 너무나도 느리고 전 방위적인 것이어서 처음엔 도대체 무엇을 의도한 그리고 무엇을 바라는 변화였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시작된 변화의 방향은 당연한 것이 결코 당연하지 않은 것임을 일깨우는 한결같은 메시지였다. 

  우리는 어쩌면 노예 일지 모른다. 막강한 기업의 이익에만 전념하는 무자비한 활동 아래, 어쩌면 우리 모두는 세대를 이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월급봉투와 맞바꾸고 있는 그런 노예 말이다. 미국은 남북전쟁 초반에 예상과 달리 남군이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북군이 초기 전투에서 남군에 연패를 당하고 돌아온 야영지를 방문한 링컨은 병사들을 만나면서 남군이 승리할 수 있는 요인을 찾을 수 있었다. 노예가 힘든 농사와 목화솜 재배하는 일을 하고 있어 남군은 오직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연전연승을 거듭했다는 것을 링컨은 깨닫는다. 링컨은 전쟁 초기 미합중국이 분열되지 않기 위한 목적으로만 북군에게 전투명령을 내린 것이었고 노예제도 자체를 폐지하려는 목적은 없었다. 하지만 전쟁 초기 연패 이후 병사들의 캠프를 들러 직접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남군의 승전보가 계속되는 이유가 노예제도 자체에 있었으므로 링컨이 애초에 목표로 삼은 바로 그 미합중국의 유지 자체를 위해서라도 노예제도 폐지가 아니면 남북전쟁의 승리는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 출처 : 도리스 컨스 굿윈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 링컨에게 일어났던 그날의 대전환이 나의 생각에서도 일어났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 누구도 몰랐던 사실이라는 환경 속에 오래 머물게 되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환경으로 인해 나와 우리의 삶이 어떻게 왜곡되고 뒤흔들리게 되는지 더욱 모르게 된다. 우리는 언제나 멀리 있는 어떤 근사한 행복의 이미지를 잡기 위해 매일 열심히 잘 살아야 하고 또 지금 그렇게 살고 있다는 환상과 착각에 사로 잡혀있다. 하지만 사실 그 당연한 것이 그렇지 않다. 막연한 행복이란 목적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던 그 생활의 터전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결코 그 실상과 진실을 알아챌 수 없는 곳에서 오랫동안 길들여지며 스스로 생각하거나 판단할 수 없는 기계적인 영혼이 되어 버린 채 노예처럼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 노예의 모습을 약간 비틀어서 이야기 해보자. 현대사회의 최고의 성공 목표가 되어버린 ‘부자’가 되기 위한 비법만 들춰봐도 알 수 있다. 그 비법은 이미 공공연히 알려져 있지만 너무 평범해서 아무도 믿지 않는 비밀이다. 돈을 많이 버는 부자가 인생의 목표가 결코 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부자가 되려면 우리가 밥 먹고 잠자는 일상의 습관처럼 두 가지를 매일 거르지 않고 해야 하는 게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하나가 독서이고 또 하나가 운동이다. 에이! 하고 손사래를 치면서 그런 게 부자가 되는 방법이라면 누가 부자가 안 될 거냐고 반문하겠지만 실상은 전혀 반대다. 독서와 운동 두 가지가 부자가 되는 첩경임에도 모두 다 부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실제 그걸 매일 하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독서는 새로운 정보의 창구이며 새로운 사업의 기회로 이어 줄 보물들로 가득 찬 영감의 보석상자이다. 돈을 벌려는 사람은 그리고 이미 돈을 벌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일구어가고자 하는 현재 자신의 일에 사활을 걸고 있으므로 모든 촉각을 집중해 정보를 수집하고 경영전략을 수시로 수정 보완하며 때에 따라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사업으로 전환을 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에 따른 필요한 정보와 유연한 대처방안과 획기적인 전환법에 대한 모든 영감과 대응책을 독서하는 동안의 생각을 통해서 획득한다.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이거나 인간의 행동과 그로 인한 문화와 역사는 모두가 거미줄처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대부분의 돈을 벌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기업가 내지 경영자는 독서를 무소불위의 힘으로 여기며 늘 곁에 책을 두고 틈나는 대로 펼쳐 든다. 돈을 벌기 위해 생각을 얻고 또 자신만의 다른 생각을 할 목적 때문이다. 두 번째인 운동은 그런 생각을 하기 위해 필요하다. 그리고 현재 또는 미래의 기업을 운영하기 위한 실질적으로 요구되는 체력, 정신력, 추진력 그리고 지구력 등을 얻기 위해서이다. 고강도의 집중력과 인내력을 요구하는 현대 이익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전인적인 수준의 심신의 건강함이 요구되는데 바로 이것을 위해 거의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저마다의 운동을 계속하는 것이다.

  한편, 그들에게서 월급을 받고 계속해서 반복되는 적당한 편안함에 안주하며 소박한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은 독서와 운동을 잃고 산지 오래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업가가 책을 읽고 운동을 하며 스스로 세상을 탐색하고 스스로 새로운 생각을 끝없이 해야 하는 동안, 대부분의 우리는 기업가가 만들어놓은 이익창출을 위한 온갖 시스템의 일부분을 떠맡아 계속해서 일정한 수익(월급봉투)이 창출되도록 부속품 역할을 하느라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 전부를 쉬지 않고 계속 쏟아 붓고 있다. 그런 생활에 길들여지다 보면 더욱더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급여에 얽매이게 되고, 나아가 월급봉투의 두께에 맞게 아예 생활수준과 소비수준을 맞춰가고, 마침내 그런 수준을 지속하기 위해 매달의 봉급에서 헤어날 수 없는 스스로의 굴레에 고착화되는 것이다. 자신의 굴레에 갇혀 자신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한 생각하는 시간의 확보와 그 생각으로 새롭게 대처해야 할 움직임을 뒷받침해줄 건강과는 점점 더 거리게 멀게 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해 오로지 기업가를 더욱 돈 벌게 해주는 충실한 하부구조의 부품 역할에 매몰되어 가는 것이다. 그런 시스템의 특징은 스스로는 잠시 행복하다고 느끼나 스스로의 삶을 사는 방법과 방향을 종국에는 잃고 만다. 돈을 벌고 돈을 쓰는 다람쥐 쳇바퀴와 같은 생활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사이, 인간 본연의 깊은 충만감인 진정한 행복과는 멀어지게 되고, 그렇게 발생하는 소외감과 외로움을 메꾸기 위해 역으로 쉼 없는 소비와 의존적인 사랑에 더욱 매이게 되는 것이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반지원정대가 마침내 먼 길을 떠나 그렇게도 버리려 안간힘을 써야했던 그 반지처럼, 돈과 사랑이라는 가장 짜릿하고 유혹적인 두 가지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현대의 문명 시스템의 생활에 매몰되면 매몰될수록, 더욱더 많은 돈과 더욱더 자극적인 사랑에 목마르게 된다. 그런 부류의 돈과 사랑은 강력한 청량음료처럼 결코 궁극적인 갈증을 해소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이 사라지고 노예로 남의 삶의 일부를 대신 살고 있는 한, 영혼의 자리와 현실 사이에 버티고 있는 만나 질 수 없는 커다란 간격 안에서 더욱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목마름에 시달리며 살게 되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의 결론은 비참하다. 모두가 돈 벌고 돈 쓰는 것으로만 살아가는 가운데, 대학 가고 취직하고 결혼해서 잘 먹고 잘살다가 어느 날 병원에서 혼비백산하며 죽게 되는 누구랄 것도 없이 똑같은 복제품처럼 동일한 삶처럼 살다 죽는 일이 바로 현재의 도시 문명의 단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 문명의 중독성과 최면술은 너무나도 지독해서, 진실을 알고 깨어나 자신의 삶이 환상 속에 있었던 것임을 자각하기 전까지는 헤어나지 못한 채 좀비와 같이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을 그저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던 중에 나는 돌연 아이의 아픔을 통해 깨어나라고 일어나라고 정신 차리라고 하는 소리를 벼락을 맞듯 듣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와야 했으며, 그곳에 벗어 나와 나만의 길을 찾아야 했고, 또 다른 이들도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영혼을 흔들어 깨워 자기만의 자리로 돌아가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삶의 궤적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 내 삶의 존재 이유이며 삶의 방향임을 뒤늦게 알아차리게 되었다. 홀로 먼저 서는 일과 그리고 다시 돌아가 깨어나려는 다른 이들과 함께 그들에게 주어진 저마다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소명이었음을 아주 느리게 조금씩 알아갔다. 그것이 2003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내안의 목소리가 나에게 전하고자 했던 내 삶의 본래 궤적이었고, 그렇게 내 삶의 본래 궤적을 찾아서 그 궤적의 비어있던 나의 자리에 다시 내가 주인으로 들어가 살아내야 하는 인간의 책임이 있음을 알려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 자각이 있은 후, 어떻게 나 스스로를 우뚝 세울 수 있는지 그런 다음 어떻게 주위와 함께 다 같이 살아갈 수 있는지 더 이상 나를 이끌어줄 스승이 계시지 않았으므로, 그때부터 하나하나 나를 다시 일깨워줄 살아있는 삶의 롤모델을 찾아 나섰다. 책 속에서 삶 속에서 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만나기 시작했다. 13세기 20세 때 회심 이후 가난과 기도의 성자로 살아간 성 프란체스코, 18세기 일본 에도시대 50세의 나이에 거상을 길을 접고 두발로 걸으며 일본 전도를 그려낸 천문측량학자 이노 다다타카, 19세기 분열된 전국의 대화합을 이끌어낸 메이지 유신의 주춧돌이 된 전략 협상가 사카모토 료마, 19세기 침몰한 배에서 27명의 동료와 함께 전원 생환해낸 남극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 경, 19세기 인류의 삶의 방향을 탐구한 러시아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 20세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인 나눔의 기업가 유일한 박사, 20세기 자립 및 생태공동체의 선구자 스콧&헬렌 니어링 부부, 그리고 20세기 아이들의 성자라고 불렸던 미국 방송인 미스터 로저스가 있었다. 그들의 삶 속에선 결코 돈과 성공이 삶의 목적이 아니었다. 그들의 삶 속에선 결코 자기 자신과 가족만을 위한 이기심이 발붙이지 못했다.

  “누군가 아프다고 소리치면, 누군가 고통스럽다고 분노하면, 그건 나의 몸이 나의 마음이 외치는 절규라고 알아야 한다. 그 누군가가 만약 내가 사랑하는 이라면 더욱더 그래야 한다. 나에게 닿고자 하는 그의 마음이 나를 둘러싼 벽에 막혀 번번이 튕겨 나오고 그럴 때마다 절망하는 그 누군가는 바로 나의 거울이다. 나는 그때까지 그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고 그의 소리에 두려워하며 다가가길 주춤거린다. 누군가를 살리는 길은 내가 나를 만나는 길 뿐이다. 나를 통해 그가 연결되어 있으므로 내가 사는 것이 그가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에게 닿지 못하므로 누군가는 나에게 닿을 수 없어 절망하고 절규하는 것이다. 그 누군가가 바로 나이므로 누군가를 만나려면 내가 나를 만나야 한다. 본래의 내 모습으로 복원되어야 한다. 떨어져 외로웠던 우리가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 내 안의 상처가 누군가와 나사이의 벽이 되므로 누군가를 만나려면 내가 그 벽을 허물어야 하고, 그 벽은 안에서만 허물 수 있으므로, 그 벽이 만들어진 때로 돌아가 상처라는 벽을 만든 이와 대면해야 하고, 그렇게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야 한다. 어머니의 뱃속으로 들어가 사랑의 빛으로만 존재하던 그때를 기억하고 되돌아가야 한다. 그런 다음 그 빛의 힘을 소환하는 버튼을 되찾아 누군가에게로 다가가야 한다. 이제 괜찮다고 손을 내밀어야 한다. 이제 당신을 만났으니 괜찮다고, 그를 가만히 안아야 한다. 아무 말도 필요 없이 포옹해야 한다.” 마치 인생의 롤모델들이 일제히 일어나, 그들이 만들어 간 삶의 목표와 방향을 내안의 목소리를 통해 큰 소리로 나에게 외치는 듯 소리가 울려왔다.      


  오랫동안의 방황과 시행착오 끝에 코로나바이러스가 선물해준 혼돈 속의 단순함과 고요의 시간 속에서 지나온 55년간의 삶의 흔적을 가만히 뒤돌아 보고 있다. 무엇 때문에 그리고 무엇을 향해 그런 삶을 경험해야 했는지 보고 또 본다. 내안의 목소리가 나에게 전해주려고 애쓰고 있는 나침반의 방향과 지도의 좌표를 정확히 알고 싶었다. 본말이 전도되어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조차 도대체 알 수 없는 혼돈의 시대에, 당연한 것을 당연한 자리로 되돌려내는 한 사람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렇게 우선 나 스스로의 삶의 길을 되찾는 것이 내 삶의 목적이자 존재 이유였다. 그리고 그 회복의 원정길을 다른 이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삶의 여정에 기꺼이 안내자로 동행하는 것이 내 삶의 앞으로의 방향이었다. 우선 나 스스로 내 삶의 주인이자 지도자로서 홀로 우뚝 서야 했고, 그런 다음 그렇게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과 어울려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 나가야 했다. 내 삶의 구불구불한 궤적을 그려 놓고 조금 물러나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시간의 나만의 홀로인 자리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니, 그렇게 나의 목적과 나의 방향이 드러나 보였다. 수없이 반복되는 실패에서도 노예제 폐지라는 목적을 발견한 이후로 인생의 목적을 찾고 정치인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발견해낸 링컨처럼, 나 또한 세상 속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헤쳐 나가야 할 나만의 삶의 목적과 역할을 찾게 되었다.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이런 생각을 스스로 하게 되기까지, 도저히 이해 못할 행보를 감행해야 했고 그에 따른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하지만 이제 모래사장의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던 그 많은 일들이 불현듯 하늘로 튀어 오르며 허공에서 조각이 맞추어지듯 전체의 얼개를 홀로그램처럼 보여 주었다. 자신의 삶을 되찾은 본래 나 자신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홀로그램은 나의 다음 행보들을 보여주었고, 나와 함께 그런 시련의 터널을 지나며 수많은 다른 이들과 함께 조금씩 공동체를 이뤄가는 대장관의 모습 또한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홀로 선 이들의 함께인 공동체, 그것으로 새로운 문명으로 이끄는 삶의 방식인 새로운 인류문화를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모습이 선명하게 펼쳐졌다. 내가 나이어야만 하는 이유와, 그런 나의 닮음 꼴들일 또 다른 누군가와 함께 해야 할 이유가 거기에 수놓아져 있었다.  

   

***   

  

열여덟 번째 길오름 (따라비오름&쫄븐갑마장길)     

   

  바람 많기로 소문난 제주도 표선면 가시리에는 갑마장이라고 하는 옛날 나라의 임금님께 진상하던 으뜸인 말들을 키우던 넓은 초목지가 유명하다. 지금도 3~4월이면 가시리 갑마장이 있는 곳으로 가는 양 길가에 유채꽃과 벚꽃이 흐드러진 가로수길이 10리 남짓 펼쳐져 봄날 여행객의 마음을 잡아끄는 곳이어서 명성이 자자하다. 하지만 내겐 유채꽃과 벚꽃보다 이곳을 찾는 이유가 따로 있는데 바로 따라비오름을 중간에 품고 있는 10km의 쫄븐갑마장길 때문이다. 오래전 국제트레일 러닝대회 10km 구간에 참가하면서 알게 된 코스였는데, 제주올레 바당길, 한라산 숲길, 곶자왈, 오름 전체를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로 사랑하며 즐겨 찾는 보물 같은 길이다. 보통의 경우 제주의 오름은 오름 아래 입구가 있고 거기서부터 15~20분 남짓 짧은 등산을 한 다음 분화구를 따라 정상의 경관을 한 바퀴 둘러보고 마무리되는 것에 비해, 이곳은 쫄븐갑마장길 코스를 따라 원을 그리듯 한 바퀴를 크게 돌아 동백나무가 흐드러진 온난대숲-편백숲-억새오름-삼나무숲으로 이어지는 구간마다 탄성을 지르게 하는 아름다운 길들이 마치 일부러 짜깁기해서 정열해 둔 것처럼 연이어 펼쳐진다. 출발 이후 1시간 남짓 못되어 따라비오름 정상에 올라보면, 멀리 서북쪽으론 수줍게 솟아 오른 한라산 백록담과 수많은 오름들의 물결이 일렁이고 동남쪽으론 연이은 오름들 물결 너머 성산일출봉과 우도 쪽 바다가 360도 파노라마뷰로 보인다. 그리고 세 개의 분화구가 맞닿아 연결된 반대쪽 분화구 정상을 통해 다시 북쪽으로 이어지는 삼나무 잣성길을 한눈에 들어온다. 마치 반세기 넘게 살아온 나의 삶처럼 숨어있던 오르막 내리막 숲길과 계곡이 아련히 보이고 오름 정상으로 이어지는 숨 가쁜 나무계단길과 잣성길로 내려가는 아주 가파른 오름 능선길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지고 동시에 또 엷은 미소도 지어진다. 그 구비마다의 이야기가 어디서 어떻게 연결되며 나를 어디로 데려오려 한 것이었는지 그 길 안에서는 결코 알 수 없었지만, 중간에 포기하지 않아 마침내 한눈에 지나온 길과 지나갈 길을 바라보게 되는 순간에 서서는, 지금 이 자리까지 오도록 한 번도 나의 곁을 떠나지 않았을 것 같은 내안의 목소리에게 정말 고맙다고 크게 외치고 싶어진다. 삶은 살아내는 것 자체가 목적이다. 삶을 버리지 않는다면 누구나 당도하게 되는 어느 지점에서 돌이켜보아 살아왔던 지난 길이 이야기하는 의미를 알게 되고 또한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동안 어떻게 또 다른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삶은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축복 같은 선물 그 자체이다. 그 길을 완주해낸 이들은 그 길을 걸어낸 기쁨을 만끽하며 행복한 기억으로 지난 삶을 떠올리게 된다. 잊지 못할 아름다운 영혼의 흔적을 갖게 된다. 

  관광안내지도나 SNS 사진으로만 정상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러 오는 이들은 결코 알지 못한다. 그 정상에 이르는 길고 전혀 다른 방향에서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숲길이 따라비오름을 진주반지처럼 꿰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제주 오름의 여왕이라고 불릴 만큼 그 은은한 억새 오름의 황홀한 풍광을 만끽하는 방법은 오름 아래 주차장에 차를 놓고 급하게 돌아 올라와 정상에서 와하고 사진만 찍고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데 있지 않다. 아주 멀리에서 천천히 동백숲길을 지나고, 1년 내내 거의 말라있는 바위계곡을 내렸다 올라와 건너고, 다시 목장 위로 접어들어 오름 아래 편백나무의 올곧은 품격을 지나, 무릎이 팍팍해지는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르고 나서야 만나게 되는, 제주도 동쪽 전체의 하늘과 땅과 바다가 모두 연결되면서 사방팔방으로 뚫린 공간을 마주해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아무도 그렇게 다니지 않아서 굳이 왜 따라비오름을 이렇게 오르고 내리는 것일까 가끔씩 동행하는 이들이 묻지만 그때마다 따라비오름은 쫄븐갑마장길로 접어들다 만나고 다시 쫄븐갑마장길로 내려가 마무리 짓는 이 여정이 좋다고, 그래서 그 좋은 기억을 이렇게 나누고 싶어 그렇게 걸었던 길을 따라 지금 당신과 함께 걷는 것이라고 들려준다. 어쩐지 내가 살아온 길과 앞으로 내가 살아갈 길이랑 많이 닮아 있는 것 같아서이기도 하다.   

   

* 찾아가는길         

    

따라비오름 주차장으로 내비게이션을 찍고 따라비오름만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은 이 코스의 10분의 1도 모르고 가는 방법이므로 권하고 싶지 않다. 늦은 가을 억새가 만개할 때라면 더욱 좋겠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 정말 사시사철 아무 때고 언제라도 최고인 걷기 구간이다. 조랑말박물관 주차장으로 내비게이션을 찍고 차를 주차한 뒤, 쫄븐갑마장길 도중에는 화장실이 없으므로 미리 조랑말박물관에 있는 화장실을 들른 다음 맨손체조로 긴장을 풀고 행복한 마음으로 트레킹을 시작하자. 시작점은 조랑말박물관에서 도로를 건너 바로 맞은편에 세워져 있는 쫄븐갑마장길 안내판이 있는 곳이다. 시계 반대방향으로 안내리본을 따라 따라비오름까지 1시간, 따라비오름으로 올라 이 능선 저 능선으로 옮겨 다니며 제주 동쪽 전역의 풍광과 바람을 천천히 음미하고, 다시 반대편 삼나무숲 잣성길을 따라 출발점까지 다시 1시간, 총 2시간 30분에서 3시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므로 체력과 시간 배분을 잘해서 제주 트레킹의 진수를 맛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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