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타냥과 재회
라울은 라 페르 백작의 저택 정원에서 나무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이는 지친 기색 없이 열심히 자신의 ‘훈련’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이의 자세는 어설펐지만 집중력과 기세만큼은 제법 진지했다.
달타냥은 말을 타고 라 페르 백작 저택에 도착해 정원에서 이 모습을 목격했다. 그는 아이의 검은 머리와 푸른 눈을 보며 순간 숨을 멈췄고 가슴이 갑자기 두근거렸다.
“꼬마야.”
달타냥이 말을 타고 가까이 다가가자, 아이는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누구세요? 여기는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에요.”
달타냥은 미소를 지으며 말에서 내렸다. 아이의 당돌한 태도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하여 미소가 절로 났다.
“난 달타냥이야. 라 페르 백작님을 만나러 왔는데 너는 누구니?”
아이는 칼을 내려놓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대답했다.
“난 라울이에요. 여긴 제 아버지의 집이에요.”
라울. 달타냥은 아이를 보는 순간 모든 조각이 맞춰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이의 검은 머리는 아토스를, 푸른 눈은 아라미스를 떠올리게 했다. 아이는 단정하고 기품 있었으나 개구쟁이의 모습이 가득했다.
“그래 라울.” 달타냥은 무릎을 꿇고 라울과 같은 눈높이가 되도록 하였다.
“너의 아버지 라 페르 백작님은 지금 어디 계시니?”
“아버지는 지금 건물 뒤쪽에 계세요. 금방 오실 거예요.”
라울은 태연히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달타냥을 의심의 눈초리로 관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저씨! 저희 아버지를 아세요?”
달타냥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고말고. 너희 아버지와 나는 오래전부터 친구였단다. 아주 소중한 친구.”
그 순간 멀리서 익숙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달타냥이 고개를 돌리자 아토스가 저택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달타냥을 보자마자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달타냥?”
“아토스.” 달타냥은 천천히 일어서며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에요.”
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달타냥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아라미스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수도원을 찾아갔어요. 무덤을 보고 혹시 아토스가 꾸민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여기에 왔죠. 그런데......"
그는 라울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여기에 이런 아이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아토스는 고개를 숙이며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라울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라울, 이분은 내 오래된 친구다. 너도 인사를 해야지.”
라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달타냥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저씨.”
달타냥은 라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마음속은 복잡했지만 한편 안도감이 밀려왔다. 아토스와 아라미스의 아이. 그는 이 사실을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아토스가 한 발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달타냥,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자. 할 말이 많을 테니.”
달타냥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토스와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라울은 그들을 따라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달타냥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아직 자신의 존재가 어떤 비밀을 품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달타냥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라울... 네 부모님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꼭 알려주겠다. 너의 부모님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 말이야.’
아토스는 라울을 뒤로하고 천천히 저택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달타냥은 그의 뒤를 따라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고 정갈한 집안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아토스는 낮게 속삭이듯 말했다.
“달타냥. 내가 아라미스의 죽음을 가장한 이유를 이해해 줘야 한다.”
달타냥은 멈춰 서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아토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어갔다.
“아라미스는 총사대를 떠나 수도원에 들어갔지. 수도원에 들어가서 아라미스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어. 하지만 수도원 또한 그다지 안전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그곳에서 라울이 태어났고... 하지만 혹여나 남은 철가면의 잔당뿐 아니라 그녀가 파헤쳤던 음모에 연루된 자들 그 누구든 아라미스의 흔적을 찾으려 했을 거야. 그래서 우리는 아라미스를 죽은 것으로 가장했고 이곳으로 왔어.”
달타냥은 잠시 침묵했다.
아토스는 말을 이었다.
"아라미스는 여기 오기 위해 스페인을 거쳤어야 했어. 스페인에서 귀족의 양녀로 신분을 바꿨어.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스페인의 귀족에게 양녀로 들어갔다가 프랑스 수도원에서 교육받은 여성으로. 이제는 아라미스와 르네 드 뤼시 모두 없는 사람들이 된 것이지."
그는 아토스의 말을 들으며 그들의 선택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했다.
“아라미스가 정말 죽었다고 믿을 뻔했어요. 여기로 찾아온 건 아토스의 장난을 알아챘기 때문이에요. 아라미스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왔으니까요.”
달타냥이 조용히 대답했다.
아토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너라면 반드시 여기까지 올 거라 생각했지. 아라미스는 지금 엘렌 드 라 페르 백작부인으로 알려져 있지.”
그때, 달타냥의 시선이 넓은 거실 안으로 향했다. 푸른 눈을 가진 금발의 한 여인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칼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칼을 부드럽게 휘두르며 자세를 조정하고 있었다. 움직임은 부드러웠고,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달타냥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저 사람이......”
아토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 아라미스다. 지금은 백작부인으로 살아가고 있어.”
달타냥은 여전히 믿기 힘든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금발의 머리가 햇살에 반짝였고 그녀의 푸른 눈은 깊고 강렬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전보다 훨씬 평온해 보였다. 달타냥이 기억하던 전쟁과 복수에 사로잡힌 아라미스와는 전혀 달랐다.
그녀는 달타냥과 아토스의 시선을 느낀 듯 움직임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칼을 내려놓고 천천히 다가왔다.
“달타냥!” 그녀는 부드럽게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는 예전과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달타냥의 마음이 순간 벅차올랐다.
“정말 당신이군요...”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까지 날 찾아온 걸 보니까 여전히 끈질긴 사람이군.”
달타냥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죽었다고 들었을 때 얼마나 믿을 수 없었는지 몰라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보니까 정말 다행이야.”
아라미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토스를 흘끗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어. 올리비에 백작님과 라울과 함께.”
달타냥은 아라미스의 과거와 비교하면서 이제 그녀가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이제야 알겠어요. 당신과 아토스 모두 정말로 행복해 보이는군요.”
아라미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라울이 뛰어오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며 손을 뻗어 그를 품에 안았다. 달타냥은 그들을 보며 마음속으로 진심으로 기뻐했다. 아라미스와 아토스는 마침내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맞이한 것으로 보였다.
아라미스는 오랜만에 달타냥과 결투 대련을 마치고 숨을 고르며 검을 내렸다. 칼날 위에 맺힌 땀이 햇빛에 반사되며 반짝였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강렬했고 움직임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달타냥도 검을 내려놓으며 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실력이 녹슬지 않았군요.” 달타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달타냥 넌 지금 총사대 부대장이야. 네가 우리보다 훨씬 더 뛰어나야 하지 않을까? 좀 더 연습해야겠는걸?” 아라미스가 가볍게 받아쳤다.
아토스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여전한 실력의 아라미스를 바라보았다. 무엇보다 예전 서로의 목숨을 지키던 동료가 다시 하나의 자리로 모여 있다는 사실이 아토스의 마음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시범을 지켜보던 라울이 아토스의 옆으로 달려왔다.
“아버지. 엄마랑 달타냥 아저씨 정말 멋있어요! 저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요?” 라울이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
“물론이야 라울.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검을 드는 이유는 잊지 말아야 한다.”
아토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높이 들었다.
“포르토스가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해도, 우리의 맹세는 변하지 않아.”
그는 깊은 목소리로 외쳤다.
“하나는 모두를 위해!”
달타냥이 그의 말을 이어받으며 자신의 검을 들었다.
“모두는 하나를 위해!”
아라미스도 미소를 지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아라미스의 눈에는 예전 총사대 시절의 추억을 생각하며 살짝 눈물이 고이는 것이 느껴졌다.
“자 라울. 너도 언젠가 네 칼을 들게 될 거야. 하지만 그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여야 한다,” 아토스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달타냥은 하룻밤을 라 페르 저택에서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그들에게 인사를 고했다.
다정하게 서로의 손을 잡고 안부를 보낸 아토스와 아라미스.
달타냥은 웃으며 인사하고 파리로 향했지만 여전히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하고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
"사랑해. 아라미스."
그는 멀리 떨어진 저택을 바라보며 아라미스를 떠올렸다. 자신이 사랑했던 강인하고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인 그녀.
끝. 다음 화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