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페르 영지에서의 삶은 안정적이었다.
아토스와 아라미스는 언제 닥칠지 모를 위험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라울은 만 네 살을 앞두고 있었다. 라울과 함께하는 나무칼 놀이는 두 사람에게 기쁨을 주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고민이 있었다. 아이를 하나 더 낳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라미스가 라울을 낳은 뒤, 아토스는 더 이상 그녀가 임신하는 것을 꺼려했다.
몇 년 전 영지의 한 여인이 아이를 낳다 목숨을 잃은 사건이 그의 마음에 깊이 남아 있었다. 그 여인의 죽음은 영지 전체를 슬픔에 잠기게 했고 아라미스는 백작 부인으로서 유가족을 위로하며 필요한 물품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주민들은 그녀의 따뜻한 마음에 칭송했다. 그러나 아라미스조차 그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깊은 아픔을 느꼈다.
아토스는 이러한 아라미스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같은 위험을 겪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는 둘째 아이를 가지는 것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늘 조심했다. 둘이 사랑을 나누는 순간에도 아라미스가 임신하지 않도록 배려하며 자신을 통제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둘째 아이를 염두해 둔 마음과 아라미스의 건강에 대한 걱정이 얽혀 있었다.
아라미스는 창가에 앉아 바깥에서 라울이 신나게 뛰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무칼을 휘두르며 “내가 아빠처럼 싸울 거야! “라고 외치는 라울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서 라울에게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피어올랐다. 한편으로는 작은 딸이 있으면 머리를 땋아주고 곁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스쳐 갔다.
아토스 역시 라울을 데리고 검을 잡는 자세를 알려주다가 문득 아이의 형제에 대한 생각에 잠기곤 했다. 라울에겐 남동생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라미스를 닮아 지혜롭고 다정한 딸을 품에 안는 상상을 하면 마음이 따뜻해졌다. 하지만 그는 늘 마음속에서 갈등했다.
“하지만... 확신하기 어려워.”
로잔 부인은 라페르 영지에서 백작부부를 가까이에서 섬기며 4년 가까이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부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아라미스를 인정하고 좋아하게 되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라페르 백작과 그의 부인은 겉보기에는 누구보다 안정적이고 조화로운 관계처럼 보였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백작과 백작부인이 서로에게 예의를 지키며 품위 있는 태도를 보였지만, 둘만의 자리에서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로잔 부인의 눈에는 백작부인이 백작을 대하는 태도가 지나치게 격이 없어 보였다. 물론 그들이 결혼 전 오랜 시간 함께했던 인연이 있었다 해도 6세 이상의 나이 차이를 생각하면 백작부인이 좀 더 공손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라미스는 사적인 자리에서는 거리낌 없이 백작에게 반말로 이야기하고 때로는 장난스러운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더 큰 의문은 라페르 백작의 태도였다. 백작은 부인을 지나치게 사랑하고 그녀에게 의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부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다거나, 몸이 좋지 않을 때면 백작은 초조해하며 전전긍긍했다. 로잔 부인은 그런 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백작님은 분명 강하고 냉철한 분이신... 왜 부인 앞에서는 이렇게 약해지시는 걸까?’
그녀는 백작과 부인의 과거, 특히 총사대 시절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이 둘의 관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로잔 부인은 종종 백작부인을 관찰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곤 했다.
‘라페르 백작님이 이렇게 부인을 사랑하시는데, 백작부인은 그 마음을 전부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아니면 백작 부인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무언가 다른 마음이 있는 걸까?’
이 모든 생각에도 불구하고 로잔 부인은 부부의 사적인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어느 날 로잔 부인은 차분히 아토스에게 물었다.
“백작님. 왜 그렇게 부인을 특별히 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너무 주제넘은 질문일까요?”
아토스는 그 말을 듣고 허허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로잔 부인. 그게 이상할 것도 없지. 내가 엘렌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차분하지만 약간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녀는 내 동생 같으면서도 제자이고, 때론 누나 같기도 해. 그리고... 영원한 사랑이지. 뭐랄까. 내 삶에 그녀가 없는 건 상상할 수 없어.”
아토스는 말끝마다 주절주절 이야기를 덧붙이며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내 목숨을 자기 목숨처럼 지켜준 생명의 은인이야. 내 목숨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오로지 그녀 덕분이라고.”
아토스의 눈빛은 한없이 따뜻하고 진지했다. 그가 백작부인을 이야기할 때 보이는 기쁨과 자부심은 평소의 냉철한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런 모습을 본 로잔 부인은 마음속으로 '백작님도 참 바보 같으시네...'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걸 보니 부인께서 백작님께 정말 소중한 분이라는 건 알겠어요.”
로잔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마무리했지만, 여전히 완전히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저 백작이 백작부인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지를 느꼈을 뿐이었다.
“참 백작님도... 어쩔 수 없는 사랑꾼이시군요.” 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미소 지었다.
영지의 물품을 정리한 서류를 보고 있는 아라미스를 바라보며 로잔 부인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백작부인. 제가 실례되는 질문을 하나 해도 될까요?”
아라미스는 서류를 만지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로잔부인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무슨 질문인데요?”
“백작님을 왜 그렇게 사랑하시는지 궁금해요. 이유가 있나요?”
아라미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당연하죠. 라울의 아버지고 제 남편이니까요.”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지만, 이내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다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제 친구이기도 하고요. 오빠 같을 때도 있고... 정말 훌륭한 스승이기도 해요. 무엇보다... 믿음직한 연인이죠.”
아라미스는 말을 이어가며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아토스와 함께한 시간들을 떠올리며 얼마나 그가 자신을 이해해 주고 감싸주었는지를 설명했다. 그러나 신이 나서 이야기하던 그녀는 갑자기 목이 메는 듯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울음이 터져 나왔다.
“백작부인, 무슨 일이세요?” 놀란 로잔 부인은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한참 동안 흐느끼던 아라미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내 모든 걸, 모든 상처까지도 받아줬어요. 아무 조건 없이. 심지어... 목숨을 걸고요.”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머릿속에는 지난 세월의 모든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자신을 위해 칼을 들고, 위험을 무릅쓰고, 때로는 대신 총을 맞고, 침묵으로 때로는 단호한 말로 그녀를 지켜준 순간들이 떠올랐다.
로잔 부인은 그저 조용히 그녀의 곁을 지켜주었다. 말로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분명히 느꼈다. 백작부인도 백작을 진심으로 그리고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날 밤, 침실 창가에 서 있던 아토스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로잔 부인의 질문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녀를 왜 사랑하냐는 질문. 그는 고개를 숙이고 창 밖을 바라보며 6년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의 아토스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오로지 사랑이라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 감정은 오랜 우정, 신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료로서의 우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복잡하고 마음이 아팠다.
그날의 기억은 뚜렷했다. 비무장 상태로 로슈포르 일당 10명의 습격을 당해 가격 당하고 가까스로 죽을힘을 다해 달타냥의 집으로 도망쳤던 날. 아토스는 이미 몸이 산산조각 났고 급소가 찔려 위급한 상태였다.
며칠 간의 의식 불명에서 희미한 채로 깨어난 순간, 자신을 간호하던 아라미스의 모습이 가장 먼저 보였다.
그녀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물수건으로 그의 이마를 식히고 약을 가져와 발라주며 상처를 돌보고 있었다.
그가 의식을 완전히 회복하고 몸을 겨눌 수 있었을 때 즈음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그녀가 약을 가지러 방을 나갈 때마다 살짝 다리를 절뚝이는 것이었다.
“다리는 왜 그래?”
그가 묻자 아라미스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별거 아니야. 그냥 조금 삐끗했어.”
그녀는 끝까지 아무렇지도 않다는 태도를 보였고, 아토스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지만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몇 주 후 그는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로슈포르 일당은 아토스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자객을 보낼 계획을 세웠다. 이 정보를 입수한 아라미스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홀로 그 자객들의 본거지로 잠입했다. 그녀는 목숨을 건 싸움 끝에 그들을 모두 처치했지만, 그 과정에서 아킬레스건 가까이에 깊은 부상을 입었다. 하마터면 걷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던 부상이었다.
대충 응급처치를 한 상태로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절뚝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의 상처는 제대로 돌보지도 않은 채 아토스의 간호를 이어갔다.
몇 주 후 그 사실을 알게 된 아토스는 간호를 하다가 옆에 의자에 기대어 자고 있는 아라미스의 다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이제는 흉터로 남아있었지만 그 상흔이 아라미스가 자신을 위해 감수한 고통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이제까지는 그저 우정 일 뿐, 목숨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동료에 대한 깊은 유대감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자객의 본거지로 혼자 쳐들어가 모두 처단한 그녀를 향한 감정이 단순한 동료애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라미스. 바보 같이.......”
아토스는 스스로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녀의 상처를 보고 눈물이 흐르던 그 밤.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깨달았던 것이다. 다만 그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아라미스가 총사대에 들어온 후 6년이라는 시간. 너무 오래 걸렸을 뿐이었다.
라페르 저택에서, 아토스는 침대 위에서 깊이 잠든 아라미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다리에는 여전히 그날의 상처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다리를 살펴보았다.
아토스는 손끝으로 그녀의 상처를 더듬으며 눈물이 맺혔다. 그날 그녀가 느꼈을 고통과 외로움을 그는 다 알 수 없었지만 그 상처는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지키고 싶었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감수했는지를 보여주는 증표였다.
그때는 그것을 우정이라 믿으려 사랑의 감정을 부정했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안다. 아라미스가 지닌 모든 몸과 마음의 상처조차도 그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아토스는 가만히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침대 옆에 앉았다.
“사랑해 아라미스...”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끝.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