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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 속도 Jul 28. 2016

육지 - 내 분야에서 시니어가 될 테다

'시니어'가 바로 내가 항상 동경하던 기술을 가진 사람인 거 같아

처음 육지에 왔을 때 너무나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 놀랐다. 섬에 미련을 남겨둔 채로 겨우겨우 올라왔던 나는 이해가 안 갔다. 결국엔 좀 더 느린 리듬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만족하며 살려고 삶을 사는 게 아닐까? 그것도 모르고 앞으로 달려 나가는 바보들. 그런 못난 우월감+혼란스러움이 있었다.

곧 섬으로 이주하는 지인을 만났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너, 제주도로 가고 싶다고 말은 하는데, 사실 니 세계를 스스로 깨지 못해서 못 내려가는 건 아니냐"는 말을 들었다. 육지사람들을 내 마음대로 단정 지었던 바로 그 언어를 쓰고 있어서 놀랐고 억울했다. 섬에 있을 때 적극적으로 뭘 해 먹고살겠다고 움직였던 건 아니지만 아, 하긴 했다. 해녀학교 축제 때 구직광고를 내긴 했음.. 원주민들, 이주민들 여러 사람들을 보고 얘기도 나누며 고민도 많이 했다. 그때 낸 내 나름대로의 결론은, 난 나 스스로의 기술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억울했다.  그래 물론 새롭게 기반을 다져나가야 하니 아무래도 각오가 남다르겠지. 막막하기도 하고. 그래도, 그게 네트워크든, 노력이든, 한 길만 팠든, 우연히 그렇게 됐든 어쨌든 간에 고유의 기술이라고 할만한 걸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러지 않은 나 같은 사람보고 그렇게 말한다는 건 반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좋고, 아직 주니어고, 갈길이 먼데 이걸 버리고 오라 그래. 그날 나는 새벽까지 술을 마시며 아무 말이나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다. 그때 깨달았다.

아.... 나는.... 이 일이 좋고 시니어 기획자로 자라고 싶다.



지인과의 만남 직전에 UX와 관련된 외부 워크숍을 들었다. 워크숍을 요약하면 이거다.

UX-U=X 

헉, 밖에 나가서 사용자 리서치를 하고 그를 통해서 설계해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나는 UX Designer가 아니었구나. 그동안 오래되고 덩치 큰 제품을 맡아 구조와 히스토리를 살펴보고 숨이 찰 정도로 들어오는 요구사항을 어떻게든 정리해서 말이 되는 방향으로 제품을 끌고 나가는 데 모든 힘을 쏟았다. (내가 맡았던 제품은 B2B솔루션 제품이었다.) 영업팀의 수많은 요구사항을 어떻게든 우선순위에 따라 녹여내는 것이 중요했다. 기능이 시간 내에 구현되느냐가 최우선이다 보니 아무래도 UX는 뒷전으로 밀릴 때도 많았다. 그런 와중에 나름 프로젝트를 운영에 대해서는 많이 배웠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기특해할 무렵, 상사로부터 기획자로써 하고 싶은 분야를 정해야 한다는 평가를 얻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난 '무슨 소리야, 이렇게 바쁜데.'라고 생각했다. 아. 그렇구나. 나는 너무 주니어일 수밖에 없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구나.


외부 워크숍을 계기로 요즘 UX Designer들에게 핫하다는 새로운 도 배워보고 싶어 졌고

The Media Equation이라는 UX 분야의 유명한 책도 읽고 있다.(아직 읽을 책은 더 많다.)

꼭 보여주기 위한 멋있는 수치를 만들고 싶은 건 아니다. 유저 리서치를 수행하고 고민해보고 인사이트를 도출하고 설계하여 제품 전반적으로 완결적인 가치를 제공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워크숍을 다녀오면서 갑자기 내가 들춰봐야 할 레퍼런스가 쌓이면서 방향이 희미하게 정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좀 더 User와 가까운 제품을 만들어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음이 바빠졌다.


나는 섬의 리듬을 아는 육지 사람이다. 제주에서의 2년의 시간 동안 스쿠버다이빙 자격증을 땄고 해외 투어를 다녔다. 새벽에 일어나 출근 전에 서핑을 즐기기도 했고, 승마를 배우고 해녀학교에 입학하여 물질을 배우고 새로운 삶을 꿈꾸며 내려온 이주민들과 물질하며 가까워져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과 이야기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움직였고, 나한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줄곧 제주로 다시 돌아갈 기회만 엿보았다.


언젠간 다시 갈 수도 있겠지. 그런데 뭐, 그게 발리일 수도 있고 미국일 수도 있고. 육지냐, 섬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회사에 소속되어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분명한 건 언젠간 나 스스로의 기술이 생겨있을 것이다. - 나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라 하면 번역가, 프로그래머, 디자이너, 바리스타 등등.... 만 생각했고 나와 다른 길을 걷는 부러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진 않은 것 같다.-  한 분야의 시니어가 되는 것. 그게 바로 내가 그렇게 선망하던 기술을 가진 사람이 되는 길인 것 같다. 어떤 루트가 되든 상관없다. 더 큰 사람이 되어서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더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서 자유로워지고 싶다.


그래, 그럼 이제 어떡할까. 


나같이 섬과 육지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을 주니어 기획자들을 위해 생각을 정리해봤다. 결론은 없다. 아직 많이 방황하겠지만, 적어도 혼자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우리 같이 이리저리 부딪혀가며 시니어가 되어 봅시다. 어딘가에서 만나요.


이 글을 발행할 때만 하더라도 그 돌파구가 스타트업이 될 줄은 몰랐다.

스타트업과 관련된 얘기는 다른 매거진에서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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