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출발했다. 새벽 비행기라(조금이라도 싸게 가려면 그렇지 뭐) 동이 트기도 전에 남편을 깨워 공항리무진 버스정류장에서 헤어졌다. 이렇게 긴 여행은 처음이라 그런가, 가고 싶은 데 가기 싫은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왜인고하니 내가 반려랑 이렇게 길게 헤어지는 게 10년 만에 처음이더라고. 그동안 관계의 안정성에서 오는 마음의 위안이 컸나 보다. 이 기분 뭔가 했더니 교환학생 때 그 기분이다. 폭우가 그쳐서 그런가 공기가 딱 그때 냄새야.
부다페스트는 친구 K가 살고 있는 곳으로 후반부에 한번 더 들를 장소다. 그땐 알프스자락, 뚜르드몽블랑 트레킹을 마치고 조금은 너덜너덜해져서. 그래서 원래 어쩌려고 했냐면 며칠간 친구랑 회포나 풀면서 슬렁슬렁 다니려 했다. 근데 뭐 인생이 내 맘대로 되나요. K가 사정이 생겨서 며칠 더 혼자 지내게 되었다.
김숙이 유튜브에서 추천했던 경추목보호대를 목에 끼고 정말 잘 잤다. 이게 잘 때도 잘 때지만 무거운 짐 이고 지고 갈 때도 목에 무리가 안 가서 좋더라. 현지시간 7시가 지나고부터는 기를 쓰고 깨어있었다. 시차 적응을 한방에 하고 싶어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달러 계좌와 연결된 체크카드로 포린트를 조금만 뺐다. 한 20만 원어치? 남으면 후반부에 또 쓰지 뭐. 시내로 가는 버스는 뙤약볕 직방이었다. 에어컨을 틀어주지 않는, 좌석을 확보하지 못한, 40분간의 라이딩은 고역이었다. 내려서 얌전히 K를 기다렸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내놓지 않으면 세상을 뒤엎어버리고 싶단 맘은 대접받은 얼음물 하나로 사라졌다.
다음 날, 새벽같이 깨서(뭐 그래도 5시면 선방 아닌가) 짐정리하고 영상 편집하고 멍하니 생각해 보니 살아보는 여행 그거... 딴 게 아니고 그냥 백순데? 그냥 한국백수에서 유럽백수 돼버림. 근데 그거 아시죠? 백수도 삶 가꾸기 나름인 거. 세상에서 제일 잘해 먹는 유럽백수 돼야지. K를 배웅해 주고 식재료 사 와서 요리해 먹고 뒹굴거리니 일하느라 바쁘면서도 잘 챙겨 먹었냐 안부를 물어왔다. 다정함에 죽어버릴 것 같아. 세상사람들이 이만큼씩만 다정하면 세계도 지구도 평화로울 거야. 밤늦게 퇴근 후 맥주를 함께 했다. 번개가 치고 제법 비가 많이 내리는 서울이 생각나는 날씨였다.
다음 날, 날이 좀 선선해졌으니 모다? 온천이다. 남들 다 가는 세체니온천 과연 유럽의 휴양지 같고 좋았는데 더 좋았던 건 현지인 추천코스, House of music이었다. HANGDIMENZIÓK - ZENEI UTAZÁSOK TÉRBEN ÉS IDŐBEN 전시를 봤는데 헤드폰을 쓰고 음악사를 따라가는 참여형 전시였는데
여행은 역시 덕질을 증폭시키는 것. 그레고리 찬트(음대 합창수업), 중세음악(왜인지 상식이죠), 헨델 바흐 어쩌고 저쩌고들 (피아노 학원에 만화로 읽는 모차르트 하이든 바흐 있죠??? 허구한 날 읽었던 사람), 민족주의(리스트=제 마지막 피아노 교습곡이었고요), MTV(80년대 음악 덕후입니다. 마침 비행기에서 <엘비스> 봤고 British Invasion이라든가 마돈나 브리트니스피어스... 세상에 강남스타일은 여기에도 나와요), Moog(전자음악 지망생이죠), Fender(밴드 해봤으면 뭐....) 다 이해하는 교양인(오타쿠)이 저더라고요? 흥분된 마음으로 구경을 마쳤다.
3개월은 참 긴 시간이라 세우지 못한 계획을 마무리했다. 에어비엔비는 아무래도 나 홀로 여행자에게는 예산이 안 맞네... '민다'를 통해 한인민박을 예약하고 일정이 확정되지 않아 남겨두었던 세비야의 호스텔도 예약했다. 요새 호스텔 그다지 싸지 않네? 학창 시절 땐 2,3만 원 선이었던 거 같은데. 그래도 호텔보다야 뭐 반값 이하니까. 빨래를 했다. 후반부에 가지러 올 짐을 잘 정리해서 한편에 남겨두고 요리를 많이 해 먹으며 지냈다.
아침마다 한 편씩 편집해서 유튜브를 올렸다. 요즘 미드저니, D-id 같은 AI툴이 유행이잖아. 미리 움짤을 많이 만들어놔서 금방금방 편집했다. 마침 갭이어를 가지면서 할 말도 많아져서 생각나는 대로 이것저것 영상을 찍어냈다. 친구는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너는 '그냥 해보지 뭐'를 참 잘한다고. 뭐 하는김에 '기록'도 해보지 아니냐고. 맞다. 맞는데 많이들 봐주셨으면 좋겠다. 부다페스트 이후 일정부터는 컴퓨터가 없을 예정인데 그래서 더 열심이었다. 앞으로의 기록은 어떡할지 좀 생각해 봐야겠다. 조회수도 오르고 막 재미붙이 기도 했고 이게 쌓이면 또 하기 싫어질 텐데 싶고(고프로에 5년 치 다이빙 영상 쟁여둔 사람......여행 갔다와서 꼭 정리해야지.)
K와 헤어지고 동네와 좀 떨어진 호스텔에서 하루 지냈다. 추천해 준 헐라슬레(민물매운탕)를 먹으러 그레이트 마켓홀에 들렀다 부다성을 갔다 와 한참 쉬다가 털레털레 나와서는 마법 같은 나만의 야경 명소를 만나고
다음날, 조식 먹고 체크아웃 후 어슬렁거리다 못 본 책과 영화를 남겨두고
공항 근처에서 잤다. 가는 길에 버스 티켓을 못 구하겠어서(아니 일반, 공항 버스 말고 또 뭐 딴게 있어요??) 지하철 종점에서 Bolt앱으로 택시를 타느라 지출이 좀 늘었다. 저가항공은 참, 다 좋은데 애매한 시간대가 많단 말이지. 이렇게 쓰는 숙박비 치면 또이또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비빌구석이 정말로 하나 없는 도시로 떠날 채비를 마쳤다.
쇼핑리스트
유심, 보다폰. 유럽에서 다 쓸 수 있댔다. 그러려면 로그인이 돼야 되는데 자꾸 에러가 났다. 왜인지 현지인 K 폰으로 했더니 해결되었다.
파프리카가루. 헝가리에서 유명하단다. 다른 도시에서도 뭐라도 해 먹으려고 작은 걸로 쟁임. 이거 패키지도 그렇고 관광객용인데 다 쓰면 리필은 현지인용으로 해야지. 아마도 이탈리아에서는 올리브유나 발사믹 크림을 쟁이지 않을까. 이집트 일정까지 잘 쓸 거 같아.
빈티지 가게에서 산 안 빈티지 옷. 이탈리아 가는 데 어떻게 안 사요.
해 먹은 것
계란, 에멘탈 치즈, 페타 치즈, 토마토, 오이, 빵, 납작 복숭아로 이것저것.
딜, 휘핑크림 추가해서 오이샐러드도. 돈 아끼려면 역시 뭘 좀 해 먹어야죠. 요렇게 해서 3.5일 해 먹었다. 외식 두 번, 펍 한번 빼고는 쭉 해 먹음. 호스텔에서 보니까 다들 파스타 해먹더라. 이탈리아에서는 아마도!
여기는 꼭!
지출
한 끼 정도 사 먹으니까 식비만 하루에 3-4만 원 정도는 쓰는 것 같다. 관광하면 여기에 +5만 원 정도? 일주일 동안 유심 5만 원 포함 40만 원 정도 썼네. 이탈리아는 더 비싸겠지? 자주 해먹어야지.
여행기는 유튜브로도 볼 수 있습니다.(정주행)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PXpa72s0GzfH8ucPtG-br0FBOuK-zA6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