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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회. 끝에 다다른 문

by 몽골왕자 Jan 03. 2025

윤하진은 마지막 문을 통과하며 거세게 밀려드는 어둠에 눈을 가늘게 떴다. 하얀 공간에서 빠져나온 직후라, 암흑은 더욱 짙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는 뒤로 돌아갈 수 없었다. 손에 꽉 쥔 열쇠는 희미한 빛을 내뿜으며 길을 안내하는 듯했다.


주변의 공기가 한층 서늘해졌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골목 풍경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낮은 담벼락이 이어지고, 위태로워 보이는 가로등이 간헐적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 곳이지만, 어쩐지 이미 여러 번 겪은 장면처럼 기시감이 밀려왔다.


“여긴… 어디지?”


하진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골목을 살폈다. 아스팔트가 군데군데 갈라진 바닥, 벽에 삐뚤빼뚤 칠해진 낙서, 그리고 멀리서 새어 나오는 환한 빛까지—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과거의 기억과 맞물리는 느낌이었다.

그때,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는 듯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화면을 켜자 시계가 새벽 2시 5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72시간… 이제 얼마 안 남았어.”


그녀는 정신없이 달려온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어느새 3일이 거의 지나가고 있었다. ‘72시간 후’라는 메시지가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지만, 그 진정한 의미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단지, 뭔가 결정적인 사건이 임박했음을 예감할 뿐이었다.


하진은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꼭 쥐고 골목 끝을 향해 걸었다. 낡은 가로등이 간신히 골목을 비추고 있어 주변은 희뿌옇게 보였지만, 그녀의 시야가 점차 어둠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몇 걸음 옮기자 골목 안쪽에 두 인물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하나는 키가 크고 왜소한 그림자, 다른 하나는 그보다 작지만 묘하게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하진은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누구… 거기 누구 있어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자, 작은 실루엣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순간, 하진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 사람은…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영상 속에서 마주쳤던 ‘또 다른 윤하진’과도 닮은 모습. 하지만 이번에는 전과 달리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큰 그림자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없었다. 마치 두 사람 모두 하진을 오래전부터 기다려왔다는 듯, 골목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었다.


“설마… 네가 진짜 나를 죽인 그—”


하진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자기와 똑같은 얼굴을 한 인물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여기까지만 와.”


낯선 목소리였지만, 동시에 자신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그 오묘한 이질감에 하진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손에 쥔 열쇠가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 느껴졌다.


그때, 하진의 손에 반응하듯 열쇠에서 희미한 빛이 번쩍였다. 골목 벽 곳곳에 새겨져 있던 낙서들이 서로 이어지며 붉은색 문양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된 의식에 쓰이는 기호처럼, 골목 양옆으로 빛나는 선이 펼쳐졌다.


“뭐지… 이건…”


하진은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벽에 떠오른 문양이 서로 연결되자, 골목은 순식간에 거대한 ‘의식의 무대’가 된 듯했다.


그리고, 그 의식 한가운데에 자신과 똑같이 생긴 ‘또 다른 윤하진’이 서 있었다.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하진의 열쇠를 바라봤다.


“그 열쇠… 결국 네 손에 갔네.”


“무슨 말이야? 이 열쇠가 대체 뭐길래…”


하진의 질문에도 그녀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키 큰 그림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림자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F. Ko가 널 여기까지 데려왔겠지. 운명을 거스른 대가를 네가 치를 준비는 됐나?”


낮고 울리는 목소리였다. 마치 수십 년 동안 비밀을 숨겨온 자가 내뱉는 듯한, 묵직하고 건조한 울림.


“당신들… F. Ko를 아는 거예요? 그 사람은 도대체 뭔데—”


하진의 말이 끝나기 전에, 그림자가 냉소 섞인 웃음을 내뱉었다.


“F. Ko라… 그 자는 단지 안내자일 뿐이다. 진짜 문제는 네가 무엇을 선택했느냐는 거야.”


하진은 순간 등줄기를 타고 차가운 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선택’이란 단어가 가슴 깊이 내려앉았다. 자신이 잊었던 과거, 골목에서 벌어졌던 살인, 그리고 이 열쇠—모든 것이 스스로 했던 ‘선택’의 결과였다면?


“내가… 뭘 선택했다는 건데?”


하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또 다른 윤하진’이 한 걸음 다가섰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똑같은 얼굴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또 다른 너를 희생시키겠다고 결심했어.”


그녀의 말에 하진은 숨이 막히는 듯했다. 동시에 머릿속에서 과거의 파편들이 다시 폭발했다. 피투성이가 된 칼, 쓰러진 자신, 그리고 캠코더에 남겨진 끔찍한 장면들….


“그게… 진짜로 내가 원하는 결과였을까?”


하진의 물음에 돌아온 것은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설령 원치 않았어도, 이미 선택한 이상 되돌릴 수 없어.”


그 순간, 키 큰 그림자가 다시 나섰다. 그는 마치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골목 바닥에 형성된 붉은 문양이 더 선명해졌고, 바람이 불지도 않는데도 주변의 공기가 소용돌이쳤다.


“72시간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네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나? 네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 그 살인은 왜 일어났는지. 모든 ‘결말’을 네가 선택해야 해.”


“결말…?”


하진은 열쇠를 들여다봤다. 열쇠는 여전히 숨을 쉬듯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안에도 알 수 없는 결심이 자리 잡았다.


휴대폰 화면은 새벽 3시에 가까워졌음을 알렸다. ‘72시간 후’가 정확히 언제를 의미하는지 알 순 없었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하진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래… 어차피 도망칠 곳도 없고, 도망치고 싶지도 않아. 내가 무슨 일을 했든, 무슨 죄를 졌든, 이제는 마주해야겠어.”


그녀는 스스로 다짐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그때, ‘또 다른 윤하진’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에 닿으려 했다.


“마지막 질문을 할게. 이 열쇠를 네가 쥐고 있는 한, 언젠간 또다시 같은 선택을 반복할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겠어?”


“똑같은 선택을 다시 하게 된다면… 그건 정말 내가 원하는 미래가 아닐 거야. 이번에는 끝을 내야 해.”


하진은 힘을 주어 대답했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또 다른 윤하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작은 미소 속에는 묘한 슬픔이 배어 있는 듯 보였다.


“좋아. 그러면 ‘마지막 문’을 열 기회가 주어질 거야.”


그녀의 말이 끝나자, 골목 끝에서 둔중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어느새 안 보이던 철문 같은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촘촘한 문양으로 장식된 금속 문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저 문 너머에 네가 알고 싶은 모든 진실이 있어. 하지만 동시에 가장 무서운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키 큰 그림자는 사뭇 흥미로워 보인다는 듯, 팔짱을 낀 채 무표정한 얼굴을 지켜보고 있었다.


문 앞으로 다가간 하진은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걸 느꼈다. 아마 여기로 들어가면, 자신이 저지른 ‘살인’의 진짜 이유부터, 캠코더 속 예고된 운명의 결말까지 한꺼번에 마주해야 하리라. 그녀의 등 뒤에서는 ‘또 다른 윤하진’과 키 큰 그림자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마지막 문… F. Ko가 말했던 바로 그곳이군.”


그녀는 삼킨 침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열쇠를 문에 갖다 댔다. 문고리에 새겨진 문양과 열쇠의 형상이 완벽하게 일치했다.


찰칵—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문의 잠금이 풀렸다. 문이 열리려는 순간, 하진은 뚜렷하게 들릴 정도로 자신의 심장소리가 크게 울린다고 느꼈다.


“열어.”


뒤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가 명령하듯 말했다. 그것이 키 큰 그림자인지, ‘또 다른 윤하진’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진은 손잡이를 돌렸다. 문의 틈으로 스며 나오는 바람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그 바람에는 익숙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피인지, 혹은 오래된 먼지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차원의 공기인지 모를 기묘한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끝까지 가볼게.”


하진은 결심한 눈빛으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빛이 튀어나오며 골목을 덮었다. 눈이 부셔 뜰 수 없었고, 귀에서는 숨이 막히는 듯한 이명이 번졌다.


폭발적인 빛이 사그라들자,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시야를 회복했다. 그리고 문 너머 풍경을 본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거긴 다시 ‘그 골목’이었다. 캠코더 속에서 자신이 누군가를 칼로 내리쳤던 바로 그 장소—


피로 물든 벽과 쓰러진 시체, 그리고 칼을 들고 선 ‘자신의 모습’이 생생하게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영상이나 환영이 아니었다. 이 기괴한 장면이 실제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끔찍하게도, 시체가 되어 누워 있는 사람 역시 ‘윤하진’이었다.


앞에서 칼을 들고 선 ‘하진’과 바닥에 쓰러진 ‘하진’, 문 너머에서 지켜보는 ‘현재의 하진’까지. 이 골목 안에는 무려 세 명의 ‘윤하진’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하진은 앞서 겪었던 공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극심한 충격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곧 알 수 없는 힘이 그녀의 등을 밀었다. 더 이상 뒤로 물러날 곳도 없었다.


피투성이가 된 칼을 들고 있던 ‘또 다른 하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진을 쳐다봤다. 이미 눈이 광기에 물든 듯한 표정이었다.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숨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다.


“봐. 결국 이렇게 될 거라고 했잖아.”


그 목소리는 간헐적인 비명처럼 들렸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하진’의 가슴에서 붉은 피가 천천히 퍼져 나갔다.


윤하진은 온몸이 떨리는 걸 느끼며, 문득 머리를 스쳤던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72시간 후— 그 예고된 ‘죽음’의 현장, 어쩌면 지금이 바로 그 시점이 아닐까?


“누가 누구를 죽인 거지…? 아니, 내가 진짜 왜 나 자신을 죽이는 거야?”


그녀는 차가운 공포 속에서 간신히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이 골목을 빠져나오지 않는다면, 정말로 이 ‘비극’에 갇혀버리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삐걱—
뒤편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문 너머에는 ‘또 다른 윤하진’과 키 큰 그림자가 서 있었다. 그들은 길을 막아선 채, 결정적인 결말을 지켜보려는 듯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바닥에는 이미 죽은 자신, 눈앞에는 살인을 저지른 자신, 그리고 이 광경을 목격하는 ‘현재의 나’까지. 삼중의 ‘윤하진’이 모두 같은 공간 안에 존재하는 이 악몽 같은 상황.


“이제 선택해. 이 결말을 바꿀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일 것인지.”


키 큰 그림자의 목소리가 골목 위를 울렸다.


윤하진은 격렬하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애초에 여기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떤 죄를 범했는지 아직 모두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분명한 것은 있다.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


“어떻게든 막아야 해. 이 죽음을, 이 악몽을 끝내야 해…”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움켜쥐었다. 열쇠에서는 여전히 희미하지만 뜨거운 빛이 맥동했다. 마치 결말을 바꿀 마지막 기회가, 그녀의 손안에 있다는 듯—


그리고, 피에 젖은 칼을 든 ‘또 다른 하진’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두운 골목은 숨죽인 채 다음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72시간의 끝자락에서, 그녀가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


 ‘나’를 죽이고, ‘나’에게 죽임을 당하는 이 모순된 운명의 고리를 깰 수 있을 것인가.


갈라진 세계와 삼중의 ‘나’ 사이에서, 윤하진은 숨을 삼키며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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