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진은 차가운 골목 바닥에 누워 있는 '또 다른 자신'을 바라보았다. 시체가 된 ‘윤하진’의 얼굴은 공포와 고통이 뒤섞인 채 멈춰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이미 붉은 피로 흥건했고, 땅 위로 실핏줄처럼 퍼져 나가는 핏자국은 새빨간 그림을 그리는 듯했다. 마치 이 골목 전체가 거대한 캔버스가 되어, 잔혹한 예술을 완성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광경을 목격하고도, 정작 하진은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이미 정신은 한계까지 몰린 상태.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려는 순간, 피 묻은 칼을 쥔 ‘또 다른 하진’이 묘한 눈빛으로 다가왔다.
“그래, 이 지옥 같은 광경이 네가 끝내 마주해야 할 운명이지.”
그 목소리는 비틀린 비명처럼 들렸다. 하진은 숨을 삼키며, 손에 쥐고 있던 열쇠를 본능적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등 뒤로는 여전히 키 큰 그림자와, 이전 골목에서 만났던 ‘또 다른 윤하진’. 즉, 세 번째 ‘하진’이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그러니 지금 골목 안에는 총 네 인물이 존재하는 셈이다.
시체가 된 ‘하진’
칼을 들고 서 있는 ‘하진’
뒤에서 지켜보는 ‘또 다른 하진’
열쇠를 쥐고 있는 ‘현재의 하진’
하나의 육신에서 파생된 네 갈래의 존재, 그것이 지금 이곳에 동시다발로 모여 버린 것이다.
피투성이 칼을 쥔 ‘하진’이 몇 걸음 다가오자, 하진은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등 뒤에 닿았던 문의 표면도 이미 사라진 듯, 손을 뻗어도 걸리는 것이 없었다. 그녀의 발뒤꿈치가 바닥의 금이 간 아스팔트를 긁고 지나가며 거친 소리를 냈다.
“왜 자꾸 도망치려 하는데?”
칼을 쥔 ‘하진’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눈동자엔 선명한 광기가 서려 있었다.
“네가 여기로 온 이상, 돌이킬 길은 없어.”
“돌이킬 수 없다는 건 알아. 하지만…!”
하진은 숨을 몰아쉬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선택’이라는 단어가 뇌리를 치고, 동시에 그녀의 손바닥에선 열쇠가 덩달아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난, 더 이상 이 광경에 갇혀 있고 싶지 않아.”
그 순간, 뒤편에서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키 큰 그림자였다.
“그렇다면 결단을 내려라. 네가 피한 ‘진실’이 이 앞에서 춤추고 있잖아.”
하진은 짧게 숨을 들이마시고, 골목을 둘러봤다. 곧장 눈에 들어온 것은 벽에 새겨진 괴이한 문양들. 얼핏 보기에 낙서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기하학적인 형태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그녀를 여기로 불러들인 ‘의식’인지도 모른다. 혹은 ‘F. Ko’라는 존재가 이 모든 걸 계획했는지도.
“후후후….”
이번에는 시체가 된 ‘하진’의 머리맡에서, 이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진은 등에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 웃음을 내뱉은 건 죽은 시체가 아니라, 그 시체를 내려다보던 ‘또 다른 윤하진’이었다.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띠며 죽은 ‘하진’을 마치 한낱 피조물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참, 기묘하지. 나도 나지만, 이 아이도 나야.”
그녀는 손끝으로 시체의 뺨을 살짝 건드렸다. 차디찬 살갗이 그녀의 손길에 한껏 움츠러들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저 칼을 든 애도 나고, 너 역시 나지.”
하진은 그런 광경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려 애썼다. 이 기이한 상황은 마치 꿈에서나 벌어질 법한 초현실적인 장면이었으니까. 수많은 ‘윤하진’이 한곳에 모여 서로에게 비극을 초래하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재밌는 건,”
‘‘또 다른 윤하진’이 손을 거둬들인 뒤, 하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린 전부 다르다는 거야. 선택이 달랐고, 그 결과도 달라. 결국 그 끝이 지금 여기에서 교차했을 뿐이야.”
‘선택’ 또다시 귀를 때리는 단어. 하진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오래전부터 이 단어가 자신의 삶을 쥐고 흔들었던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운명을 거스르는 선택, 나를 지키기 위한 선택, 그리고….”
그녀는 문득, 자신이 과거에 무언가를 ‘포기’했거나, ‘희생’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기억은 여전히 조각조각 날카로운 편린처럼 떠다니며 온전히 이어지지 않는다.
“…….”
어느새 칼을 들고 있던 ‘하진’의 발소리가 다시 울렸다. 하진은 가슴이 쿵쾅거리며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살인자로 보이는 그 하진이 바닥에 널린 핏방울을 밟으며, 바짝 다가와 있었다. 칼끝에서 핏방울이 톡 떨어져 그녀의 신발 코를 적셨다.
“너도 알고 있잖아. 내가 왜 저 애를 죽였는지.”
피 묻은 칼을 쥔 ‘하진’은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눈을 치켜떴다. 그녀의 정신도 이미 한계에 달한 듯 보였다.
“다른 내가, 다른 네가… 이 골목에서 벌어진 일들. 다 네가 시작한 거라고!”
하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데…!”
하지만, 뇌리를 스치는 단편적 이미지가 있었다. 어느 캄캄한 밤, 골목에서 들려왔던 발소리. 누군가가 그녀에게 ‘이 열쇠는 네 운명을 바꿀 열쇠다’라고 속삭였던 기억.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살인 사건들….
캠코더 영상 속에 담긴 72시간 뒤의 예고.
‘과연 내가 무얼 위해, 무얼 바꾸려 했던 걸까?’
머릿속이 어지럽고, 심장은 터질 듯 쿵쿵거렸다.
“사실, 난 기억이 명확하지 않아서…. 제발 알려줘. 내가 정말 무슨 선택을 했는지.”
하진은 호소하듯 칼을 쥔 ‘하진’을 바라봤다. 동시에, 열쇠를 살짝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 열쇠가… 네가 말한 모든 걸 시작한 증거라면, 그 실마리를 풀면 안 되겠어?”
하지만 살인자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 그녀가 들고 있던 칼날이 흔들리며, 나지막한 음성을 뱉었다.
“이미 늦었어. 돌이킬 수 없어…!”
“흥미롭군.”
그때, 골목 끝에서 지켜보던 키 큰 그림자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마치 어둠이 응축된 듯한 기운이 골목의 공기를 휘저었다. 바닥에 번진 붉은 문양이 일시에 꿈틀거리며, 문양의 선들 사이사이에서 검붉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그 그림자는 마치 성직자나 주술사를 떠올리게 하는 묵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72시간의 끝, 이 골목의 의식이 완성되려면, ‘하나’는 죽어야 하고, ‘하나’는 살아남아야 해.”
하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살아야 한다면? 이미 바닥에는 한 명이 죽어 있다. 그런데도, 또 누군가 죽어야 한다는 뜻인가?
고개를 들어보니, ‘또 다른 윤하진’ 역시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입니다, 하진 씨. 이건 나도, 저 칼을 든 애도, 죽어 있는 애도 아닌, 바로 네가 선택할 일이야.”
“내가…?”
하진은 손에 쥔 열쇠를 내려다봤다. 그 열쇠에서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빛이, 자신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것만 같았다.
“그 열쇠를 사용하면, 결국 네가 과거에 버린 기억들도 다 되살아날 거야.”
키 큰 그림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넌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깨달을 수 있지. 하지만 동시에, 너는 스스로를 저주할 수도 있어.”
듣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경고였다. 하진은 점점 알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과연 그 ‘진실’이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는 건 아닐까?
마침내 하진은 비틀거리며 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시체 하진’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얼굴은 평온한 듯하면서도 끔찍한 절망이 서려 있었다.
‘내가 이런 꼴이 되어버릴 수도 있단 말인가…. 아니, 이미 그런 운명을 마주했는데 또 다른 길이 있을까?’
시체의 손목 근처에는 뭔가 작은 종잇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피로 얼룩져 흐릿했지만, 글씨가 있는 듯했다. 하진은 차마 맨손으로 잡을 엄두가 안 났지만, 이 단서를 그냥 지나치면 안 될 것 같았다. 결국 정신을 가다듬고 살짝 집어 들었다.
[F. Ko – 1995년 11월 27일, 새벽 3시]
겨우 알아 본 문장은 ‘F. Ko’란 이름과 과거의 날짜, 시간이었다. 하진은 순간, 전에 카페에서 주운 낡은 사진 뒤에 적혀 있던 날짜를 떠올렸다. ‘1995년 11월 27일 새벽 3시.’ 그것은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었다.
“설마, 1995년의 사건과 지금이 이어져 있다는 거야?”
그녀는 들고 있던 종잇조각을 다시 살폈다. 피가 너무 많이 묻어서 더 이상 확실한 문구는 찾아내기 어려웠지만, 이쯤 되니 ‘F. Ko’라는 이름과 ‘과거의 사건’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이제 그만!”
기척을 느낀 하진이 고개를 들자, 피투성이 칼을 든 ‘또 다른 하진’이 마치 숨이 턱까지 차오른 듯 헐떡이며 몸을 숙이고 있었다. 살인 직후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지만, 동시에 극도의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내가… 내가 이 모든 걸 망쳤어. 난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녀는 칼자루를 잡은 손을 꼭 쥐며 고통스럽게 중얼거렸다. 피 눈물이 섞인 뺨이 떨렸고, 눈동자는 허공을 헤맸다.
“결국 네가 여기까지 와버렸잖아. 네가 나타나면, 난.”
하진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칼 든 하진을 바라봤다. 하지만 더 묻기도 전에, 뒤에서 그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렸다.
“너희는 어차피 하나다. 어떤 길을 걷든, 결국 같은 시작에서 비롯된 다른 결말들이지.”
키 큰 그림자가 손을 들어 바닥의 문양을 가리켰다. 이제는 문양이 핏빛에서 짙은 검은색으로 변해갔고, 테두리는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네 열쇠가 이 의식을 마무리할 거다. 결판을 지어라.”
그 불길한 촉박함에 하진은 극심한 갈등에 빠졌다. 하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직감이 들었다. 쓰러진 ‘하진’의 시체,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하진’, 옆에 서서 미소 짓는 또 다른 ‘하진’. 지금 이 골목은 비현실적인 악몽이자, 자신의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현장이었다.
‘내가… 이 열쇠로 뭘 해야 할까?’
하진은 심호흡을 하고, 손안의 열쇠를 천천히 살펴봤다. 열쇠 표면에 새겨진 복잡한 문양 사이로, ‘F. Ko’라는 작은 글씨가 어렴풋이 번져 있었다. 그리고 열쇠가 빛을 뿜어낼 때마다, 어두운 골목이 순간적으로 푸른 섬광에 물들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열쇠를 돌리면, 이 순간이 다시 변할 수도 있고, 혹은 영원히 결정될 수도 있다는 것. 이 골목은 ‘시간의 미로’와 같았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수많은 갈래의 윤하진 중, 최종적으로 어떤 길을 택할지, 그것이 열쇠를 통해 결정될 게 분명했다.
‘이제 선택해야 해. 더 이상 물러나지 않을 거야.’
하진은 굳게 결심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찾듯 주위를 둘러봤다. 그녀가 열쇠를 꽂을 문이 어디에 있을까. 문은 이미 들어올 때 닫혀버렸고, 벽에는 괴이한 문양들뿐이다.
그러나 시선을 돌린 바로 그 순간, 바닥 어딘가에서 ‘찰칵’ 하고 금속이 헛도는 소리가 들렸다. 얼핏 보니, 시체로 쓰러진 ‘하진’ 가까운 곳에 작게 움푹 패인 틈이 있었다. 마치 열쇠 구멍 같았다.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메탈 부품이 눈에 띄었다.
“저기…?”
하진은 무릎을 굽혀가며 허리를 숙였다. 틈새는 작고, 핏물과 먼지로 뒤섞여 있지만, 자세히 보니 진짜 ‘열쇠 구멍’ 같은 형태였다. 이것이 ‘F. Ko’가 만들어 낸 장치일까?
“설마, 이 땅에 열쇠를 꽂으라는 거야? 여긴 시체가….”
손이 떨렸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 똑같이 지켜보는 ‘칼 든 하진’과 ‘또 다른 하진’, 그리고 그림자의 시선도 느껴졌다. 모두 숨을 죽인 채,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확인하려는 듯.
결국 하진은 결심했다.
“그래, 여기서 망설이면 영영 못 나가.”
그녀는 열쇠를 틈새에 맞춰 천천히 집어넣었다. 딱 들어맞는지, 미세한 금속음이 진동하듯 울렸다. 그리고 힘을 주어 돌리자, 구멍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마치 커다란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처럼.
“꽉!”
열쇠가 한 바퀴 돌아간 순간, 골목 전체가 무너지듯 흔들렸다. 바닥에서 시작된 진동이 벽으로, 가로등으로, 그리고 하늘까지 번져나갔다. 핏빛 문양은 시커먼 연기를 피워 올리더니, 새까만 그림자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졌다.
하진은 중심을 잡으려 애썼다. 옆으로 쓰러질 뻔한 몸을 버티며, 정신을 겨우 부여잡는다. 어디선가 귓가를 찢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고, 골목의 조명이 깜박이면서 폭주하듯 빛을 쏟아냈다.
“저…저게 뭐야!”
피투성이 칼을 들고 있던 ‘하진’이 경악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자 ‘또 다른 윤하진’도 얼어붙은 듯, 몸이 한순간 일렁였다. 마치 TV 화면 속 노이즈처럼, 그녀의 형체가 흔들리고 빛에 휩싸였다.
“안 돼…!”
칼 든 하진 또한 형체가 점점 희미해져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섬광에 의해, 이 골목 속 모든 ‘겹쳐진 윤하진’들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미 죽어 있던 시체 또한 붉은 핏자국을 남긴 채 기포처럼 증발해버리듯 빛 속으로 녹아들었다.
하진은 그 광경을 넋 놓고 지켜봤다. 눈앞에서 잔혹했던 살인 현장이 점점 사라지고, 세 명의 ‘자신’도 빛에 삼켜져 흔적 없이 지워져 가고 있다.
“결국, 이게… 운명인가.”
키 큰 그림자의 음성이 마지막으로 울려 퍼졌다.
“너는… 진실을 마주할 자격이 있다. 스스로 깨어나, 네가 만든 세계에서.”
그가 무어라 말을 이었지만, 더는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귓속에서 삐 소리만 아득히 울렸고, 눈에는 강렬한 백색광만 가득 찼다. 모든 게 ‘처음’으로 돌아가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엄습했다.
다음 순간, 윤하진은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 거세게 숨을 내뱉었다. 몸이 축 늘어져 소파에 쓰러져 있었다. 거실 천장 조명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평범하고 익숙한 광경. 어쩐지 허탈한 기분마저 들었다.
한동안 멍하니 누워 있다가, ‘혹시 여기가 또 다른 환영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재빨리 일어나 거실을 둘러봤다. 딱히 달라진 것은 없어 보였다. TV, 테이블, 방 한쪽 구석에 놓인 화분까지 그대로다. 다만, 심장이 쿵쿵 뛰고 땀으로 범벅이 된 몸 상태가 모든 게 ‘단순한 꿈’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식은땀을 닦았다. 캠코더… 그렇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그녀가 처음 택배로 받았던 낡은 캠코더가 놓여 있었다. 여전히 얼룩 하나 없이 말끔해 보이는 표면, 그리고 그 옆엔 ‘72시간 후’라고 적힌 작은 메모….
‘말도 안 돼. 그 지옥 같은 골목과 내가 마주했던 죽음들은 다 뭐였지? 정말 꿈이었을까, 환영이었을까?’
하진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그제야 뭔가 묵직한 물체가 손에 쥐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열쇠…. 진짜 열쇠를 아직도 쥐고 있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손을 펼쳐 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빈손이었다.
멀쩡한 손바닥에 마른 땀자국만 선명했다. 한참을 노려보았지만, 열쇠의 흔적조차 없었다. 다만, 손바닥이 조금 따끔거릴 뿐….
“이게 대체 뭐지….”
하진은 혼란스러워하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심장이 진정되지 않아 숨이 턱턱 막혔고, 여기저기 욱신거리는 몸을 부여잡으며 테이블로 다가갔다. 택배 상자와 캠코더, 그리고 메모…. 모든 게 출발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문득, 그녀의 시선이 캠코더 옆 종잇조각에 멈췄다. 처음 봤을 때보다 조금 달라져 있었다. 맨 아래 구석에 빨간 잉크로 적힌 작은 문장이 추가되어 있었다.
“단 하나의 진실만이 너를 구원할 것이다. – F. Ko.”
‘F. Ko’ 또다시 이 이름. 하진은 소름이 돋았다. 지난 골목에서 봤던 문양, 낡은 사진, 1995년의 살인사건, 그리고 수많은 ‘윤하진’…. 전부가 이 이름과 연결된 듯한 기시감이 떠올랐다.
‘이제 어떡해야 하지?’
하진은 괴로운 마음으로 방 안을 서성였다. 과연 이 모든 사건의 끝은 어디일까. ‘내가 했던 살인’이 실제인지, 아니면 어떤 초자연적인 의식 속에서 벌어진 일인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한 건, 결말에 다다르려면 ‘F. Ko’라는 인물 혹은 존재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한동안 넋을 놓고 있던 그녀는 깜짝 놀라 전화를 확인했다. 낯선 번호였다.
“여보세요?”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자,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윤하진 씨… 맞죠? 죄송하지만,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시면 잠깐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이 목소리는 누구지? 생소하지만, 왠지 아는 사람 같은 느낌도 든다. 하진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구세요? 저… 아세요?”
상대방은 긴장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이름은… 일단 F. Ko라고만 해두죠. 당신한테 꼭 전해야 할 게 있어요. 중요한 자료와… 그 열쇠의 의미에 대해서.”
하진은 숨을 멈췄다. F. Ko라는 이름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을 때, 골목에서 겪었던 모든 기억이 한꺼번에 머리를 때렸다.
‘설마, 진짜 F. Ko…? 아니면 가짜? 그래도… 만나야겠어.’
“좋아요. 말씀해 주세요. 어디로 가면 되죠?”
당황스럽고 두려웠지만, 피할 수 없음을 하진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아마 이건 스스로 찾아 헤매야 할 마지막 실마리일지도 모른다.
상대방은 조용히 주소를 알려줬다.
“오늘 밤 자정까지 시간이 있어요. 그 전에 꼭 오셔야 합니다. 안 그럼, 영영 놓칠지도 모르니까.”
뚜뚜뚜—
전화를 끊자마자, 하진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이 떨렸다. 골목에서 죽어가던 ‘또 다른 나’, 칼을 들고 절규하던 ‘또 다른 나’, 그리고 그 모든 걸 지켜보던 자신….
‘72시간의 끝이 지났어도, 이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일지도.’
결심을 다진 하진은 가방에 캠코더와 메모지를 챙겼다. 그리고 문을 나서며 다짐했다.
‘이번에는 절대, 뒤로 물러서지 않을 거야.’
무언가 알 수 없는 미래가 그녀를 기다린다 해도, 지금은 그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과연 ‘F. Ko’를 만나는 순간, 이 기묘하고 충격적인 사건의 실체가 드러날 것인가. 더 큰 진실이 눈앞에 펼쳐지려는 듯, 하진의 가슴은 이미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