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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회. 열리지 않는 문

by 몽골왕자 Jan 07. 2025

윤하진은 새벽까지 혼자 두꺼운 노트와 사진, 그리고 새로운 열쇠를 번갈아 살폈다.


분명 며칠 후에 ‘F. Ko’를 직접 만나기 전까지, 이 열쇠를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는 경고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은 계속 이 열쇠의 ‘용도’를 궁리하게 됐다.


“도대체… 뭘 열라는 걸까? 정말 봉인과 관련된 뭔가가 있을까?”


한편으로는, 문득 전에 봤던 그림 속 문구가 다시 떠올랐다.


"Don't open the door"


‘문을 열지 말라’고 했으면서도 또다른 열쇠가 배달된 상황.


이중적인 힌트가 지금의 혼란을 더 키울 뿐이었다.


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한숨을 내쉬었다. 온갖 자료와 사진은 눈앞에 펼쳐져 있고, 밤비 소리가 창문에 부딪혀 실내를 감돌았다. 밤은 깊어만 가는데, 마음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노트와 새 열쇠를 번갈아 살펴보는 동안, 하진은 문득 이상한 의문을 품었다.


얼마 전 자신이 겪었던 ‘골목에서의 체험’—캠코더 영상 속에서 72시간 뒤의 사건을 봤고, 실제로 그 ‘죽음의 순간’을 거의 체험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사건 후, 원래 가지고 있던 열쇠는 어느새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확실히 전에도 열쇠를 쥐었던 적이 있는데… 지금 내 손에는 없단 말이지.”


새로 온 택배 상자 속 열쇠는 전 것과 전혀 다른 형태였다. 이전 열쇠는 좀 더 오래된 디자인이었고, 이건 묘하게 현대적이면서도 기이한 문양이 섞여 있다.


‘혹시 이전 열쇠가 증발하듯 사라진 이유가, 이미 골목 속 의식이 한 번 끝났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이 새 열쇠는…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는 건가?


잠시 잠든 기억을 더듬자, 골목 끝에서 키 큰 그림자와 ‘또 다른 나(윤하진)’가 사라지며 모든 광경이 흩어졌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거실 소파에 쓰러져 있었고, 손엔 열쇠가 없었다. 마치 꿈처럼 흔적 없이 사라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열쇠… ‘두 번째 의식’을 부르는 장치 같은 걸까?”


하진은 뻐근한 목덜미를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그 시각, 휴대폰 화면이 부스럭 소리를 내듯 짧게 빛났다. 또다시 번호 미표시 메시지.


- 봉인 이전에, 스스로를 잃지 마라.


- 열쇠는 너를 시험할 것이다.


-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라.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라…?”


하진은 문자 내용을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이건 분명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가 지켜보며 조언이나나 협박을 보내고 있다는 뜻이었다. ‘가장 가까운 곳’이라니, 집 안이라는 뜻인가, 아니면 주변 골목?


그녀는 혹시 몰라 집 안 구석구석을 살폈다.


대충 훑어도 ‘이상한 문’이 있지는 않았다. 방 크기도 작아서 숨겨진 밀실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문득, 욕실 문턱이 눈에 띄었다. 매일 보던 곳이지만 갑자기 시선이 멈췄다.


“...평소에는 별 생각 없었는데, 문턱이 왜 이렇게 두껍지?”


오래된 원룸 구조상, 욕실 문턱이 노후되어 조금 들뜬 상태였고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하지만 특별히 이상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왠지 이게 ‘가장 가까운 곳’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하진은 조심스럽게 문턱을 손으로 만졌다. 틈새가 손가락 한 마디는 들어갈 정도로 벌어져 있었다.


“설마, 여기 열쇠 구멍이라도 숨겨져 있나?”


어처구니없지만 이미 비상식적인 일들을 겪은 그녀로선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손전등 기능을 켜서 비춰보자, 안쪽에 나무가 썩은 자리처럼 동그랗게 뚫린 구멍이 보였다. 곰팡이가 피어 있는지 색깔이 검다. 


‘열쇠를 넣을 구멍치곤 작지만, 혹시…’


하진은 호기심에 새 열쇠를 살짝 대보기만 했다. 근데 들어갈 만한 크기가 전혀 아니었다. 너무 좁았다. 헛웃음이 났다.


“너무 무리수인가….”


욕실 문턱에서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자, 하진은 다시 테이블로 돌아갔다. 노트와 사진들을 뒤적이는 중, 한 페이지 구석에 작은 메모가 눈에 띄었다.


“어디서든 ‘틈’을 찾아라. 열쇠는 꼭 문만 여는 게 아니다.”


‘틈이라면… 방금 욕실 문턱에서 느꼈던 그 ‘벌어진 공간’도 하나의 힌트가 될 수 있잖아?’


하진은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게다가 노트엔 ‘벽’이나 ‘바닥’의 틈이 종종 언급됐다. 사진 속에도 의미심장하게 골목 벽 틈새, 바닥 균열을 강조하는 붉은 선들이 있었다.


“열쇠가 꼭 문의 열쇠일 필요는 없을 수도 있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방금 포기했던 욕실 문턱이 다시금 크게 다가왔다.


‘이걸 좀 더 철저히 살펴야겠어. 바닥을 뜯어본다거나…’


하지만 그건 위험하기도 하고, 도구도 없었다. 밤중에 시끄럽게 바닥 뜯다가 이웃에게 불편 끼칠 수도 있었다.

마땅한 도구 없이 살짝만 긁어도 목재 조각이 떨어져 나왔다. 확실히 안쪽이 썩어 가는 상태인 듯했다.


하진은 밤이 늦어 피해를 줄이려 살살 고정 나사를 풀어보려 했다. 십자드라이버를 찾아서, 한 번 돌려보니 제법 뻑뻑하게 잠겨 있었다.


“아휴, 이거 꽤 손 많이 가겠네.”


순간, 문득 떠오른 얼굴이 있었다.


‘근처 전자제품 수리점 사장님…? 직접 수리점에서 캠코더 수리해 주셨던 그분은 오래된 물건들에 꽤 능통해 보였는데. 혹시 이런 소소한 집 수리에도 일가견이 있으려나?’


솔직히 관계없는 일이지만, 별다른 지인도 없는 하진에게 지금 그 수리점 사장님이 가장 의지할 만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내일 아침에 부탁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하진은 새벽까지 고민하다 겨우 잠을 청했다. 그러나 깊이 잠들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강렬한 악몽이 찾아왔다.


꿈속에서, 하진은 다시 그 ‘어둠의 골목’에 있었다. 피비린내가 코끝을 찔렀고, 바닥에 빨간 핏물이 고여 있었다.


멀리서 ‘탁탁탁’ 발소리가 다가오고, 골목 어귀에 서 있는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손에는 칼을 쥐고 있었고, 얼굴은 다름 아닌 윤하진, 자기 자신이었다.


“또 만났네. 이번엔 누구를 죽이려 온 거야?”


그 ‘또 다른 하진’이 비웃듯 말했다. 말투엔 공허한 분노가 실려 있었다.


“그만해…! 난 그런 짓을 할 생각 없다고!”


현실에선 소리치고 싶은데 목소리가 꿈속에 묻힌 듯 답답하게 나오지 않았다. 마치 입안이 마비된 느낌.

그러자 칼을 든 ‘하진’이 피 묻은 칼날을 바닥에 탁 내려찍으며 혐오감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도 결국 똑같아. 열쇠를 쥐면 누굴 희생시키게 될지 몰라. 나처럼…”


순간, 검붉은 손에 들린 열쇠가 희미하게 나타났다. 칼자루 옆에서 번쩍이던 열쇠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그로 인해 시커먼 웅덩이가 생겨 골목 바닥이 무너져내렸다.


그 구멍 너머엔 또 다른 시체들이 흩어져 있었고, 모두 하진과 똑같은 얼굴이었다.


“안 돼—!”


하진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시야가 울렁대며 꿈이 뒤섞였다.


“허억…!”


하진은 식은땀을 흘리며 새벽녘에 벌떡 깨어났다. 가슴이 쿵쾅거렸고, 이마에 땀이 흘러내렸다. 벽시계를 보니 오전 7시가 조금 넘은 시각. 밖에는 비가 그치고 잔뜩 흐린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가슴이 여전히 꽉 막힌 느낌. 조금만 눈을 붙이려 해도 다시 그 끔찍한 ‘골목 악몽’으로 끌려갈 것 같았다.


‘잠자긴 글렀군. 차라리 빨리 움직이자.’


하진은 옷을 대충 챙겨 입고, 가방에 노트와 열쇠를 넣고 밖으로 나왔다. 그 수리점 사장님을 찾아가고 싶었다.


왜냐하면, 전자제품 수리점이라도 금손을 지닌 분들이 간혹 ‘잡다한 수리’ 전반에 재주가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이었다.


이미 수리점을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어 대략 위치는 기억했다. 걸어서 20분 남짓, 구시가지 쪽에 자리 잡은 허름한 가게였다.


구불구불한 골목을 돌아, 예전처럼 전자제품 수리점 간판을 찾았다. 낡은 간판에 큼직하게 ‘전자/오디오/카메라 수리’라고 적혀 있는 곳. 문을 열고 들어가자, 특유의 기름 냄새와 고철 냄새가 섞여 올라왔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안쪽에서는 덤덤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왔어요?”


수리점 사장님은 옛날 라디오 부품을 분해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마스크를 아래턱까지 내린 채였다. 나이를 알 수 없는 중후한 인상이지만, 근처에서 보기 힘든 ‘장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얼마 전에 캠코더 때문에 왔었는데, 기억하세요?”


“물론이죠. 그때 꽤 충격적인 영상이지 않았었나. 무슨 일로 또 왔소?”


망설여진 하진은 순간 고민했다. 


‘이분께 욕실 바닥을 뜯어달라고 부탁하기엔 너무 황당하지 않을까?’


하지만 별 선택지가 없었다. 마침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고, 담담히 웃는 표정이 은근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좀 뜬금없지만… 낡은 나무 바닥 같은 걸 뜯을 수 있는 도구가 있을까요? 안쪽이 썩은 것 같아서요.”


“오? 그건 전동 공구가 있어야 할 텐데. 대체 뭘 하려고?”


하진은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워 적당히 둘러댔다.


“집이 오래돼서요. 문턱 쪽을 살짝 들춰보고 싶어요. 관리사무소나 전문가를 부르려 했는데, 지금 급하게 확인해야 해서…. 도구만 잠깐 빌리면 고맙겠습니다.”


사장님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하, 난 전자제품 파트 전문이라 목수는 아니지만, 웬만한 도구야 많죠. 어차피 직접 해보려면 방법도 알아야 할 텐데, 어려울 텐데… 내가 시간을 좀 낼 수 있으면 가 봐줄 수도 있고.”


그 말에 하진은 아,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혹시 모를 외부인의 시선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오히려 ‘혼자 뜯다가 사고 치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오늘… 가게에 사람 많이 안 오죠? 혹시 잠깐만 제 집에 들러서 봐주시면…?”


하진의 부탁에, 사장님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주말이라 의뢰가 많진 않아. 다른 예약도 없으니 한두 시간 비울 순 있지. 대신 내가 필요한 도구 몇 개만 챙겨야 해요.”


그는 작업실 구석에서 전동드릴과 다양한 렌치, 작은 망치, 송곳 등등을 챙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사장님과 함께 도구박스를 들고 하진의 원룸으로 이동했다. 약 20분 거리였고, 가는 길 내내 사장님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하진도 그냥 조용히 걸었다. 누군가 동행한다는 것만으로도 묘하게 안심이 됐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장님이 한 바퀴 둘러봤다. 좁은 원룸에 엉켜 있는 자료들과 낡은 캠코더, 그리고 테이블 위에 펼쳐진 노트와 사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쪽 욕실 문턱인데요.”


하진은 LED 조명을 켜놓고, 구부정하게 서 있다가 사장님께 문턱을 보여줬다. 썩은 듯 들뜬 틈새가 제법 컸다. 사장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앉아서 살폈다.


“흠, 안쪽 나무가 젖어 썩었네요. 근데 여긴 마감이 제대로 안 돼 있네.”


그는 송곳으로 살살 안쪽을 찔러보다가, 작게 혀를 찼다.


“속이 텅 비어 있는데? 이거 나중에 보수해야 할 듯한데…. 우선 뜯어볼까요?”


“네, 부탁드려요. 제가 혼자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어서.”


하진은 뻣뻣하게 웃으며 뒤에 섰다.


수리점 사장님은 능숙하게 나사와 못을 빼냈다. 삐걱대는 소리가 났고, 긁히는 소리와 함께 작은 파편이 떨어졌다. 하진은 혹시라도 소란이 심해 이웃이 민폐를 느낄까 봐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아직은 별 소리가 없었다.


“오, 안쪽에 뭔가 있네요?”


사장님이 바닥 틈새에 손을 밀어넣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살짝 힘을 주어 꺼내 보이는데, 녹슨 쇳덩이 같은 게 나왔다.


“이건 뭐지… 대체?”


하진도 얼른 들여다봤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금고 자물쇠 파편 같은 형상이 보였다. 확실히 낡아 보였다. 겉면엔 희미하게 문양 비슷한 게 새겨져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이 원룸 욕실 문턱 아래에 이런 게 끼어 있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장님이 그걸 두드려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녹이 쓴 금속이네요. 안쪽엔 빈 공간 같기도 하고… 이건 혹시 열쇠 구멍?”


그 말에 하진은 순간 숨이 멎을 뻔했다. 열쇠 구멍.


‘그렇다면 택배로 도착한 새 열쇠와 맞물리는 물건일 수도 있겠네…. 아까 노트에 쓴 ‘틈’이라는 게 이걸 말한 거야?’


“제가 한번….”


하진은 도구박스에 있던 낡은 천으로 쇳덩이를 닦아냈다. 썩은 녹가루와 때가 좀 떨어지자, 중앙부에 작은 홈이 눈에 띄었다. 그렇게 깊진 않았지만, 네모지게 파여 있었다.


‘열쇠를 꽂아볼 수 있나?’


그녀는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무턱대고 사장님 앞에서 시도했다가, 혹시 이상한 광경이라도 펼쳐지면 어쩌지?


그러나 호기심이 더 컸다.


“사장님, 저… 혹시 잠깐만 혼자 해봐도 될까요?”


“응? 뭐 특별히 위험할 건 없어 보이는데…. 알았어요. 편히 해봐요.”


사장님이 잠시 뒤로 물러서자, 하진은 가방에서 새 열쇠를 살짝 꺼냈다. 그리고 쇳덩이의 홈 부분에 맞춰 조심스레 대봤다.


‘혹시라도 크기가 전혀 안 맞으면 어떡하지…’


그런데 예상과 달리, 열쇠가 그 홈에 딱 들어맞았다.


“어, 들어갔네?”


하진은 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돌려봤다. 그러나 이건 문이 아니라 쇳덩이다 보니 돌아가는지 제대로 감이 오지 않았다. 약간 뻑뻑했지만, 뭔가 기계 장치가 맞물리는 느낌이 전해졌다.


꽉—


작게 금속 부품이 끼익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쇳덩이 한쪽 면이 톡 하고 벌어졌다. 마치 쪽문이 열리듯.


“이게… 열리는구나.”


하진은 심장소리가 귓전에 울릴 정도로 긴장되었지만, 동시에 호기심에 떨렸다. 조심스레 벌어진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자, 그 내부엔 꼬깃하게 접힌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노랗게 변색된, 오래된 종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꺼내 펼쳐 보았다.


[“만약 이걸 발견했다면, 이미 너도 열쇠를 쥔 게겠지.

 이 금속은 ‘하나의 관문’을 봉인한 장치다.

 열쇠로 이 문을 열면, 틈새의 기억을 보게 될 거다.

 하지만 조심해. 문 뒤에는 또 다른 ‘너’가 기다릴 테니까.”]


문장은 다소 어수선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편지 하단엔 특이한 문양 도장이 찍혀 있었다. F. Ko라는 글자도 휘갈겨 있었다.


하진은 등골이 서늘해지며, 손이 떨렸다. 지금 이 문장들… 마치 ‘미래의 나’를 향해 남긴 경고처럼 보였다.


“또 다른 나….”


그 순간, 골목의 악몽 속 장면이 겹쳐졌다. ‘또 다른 하진’들이 피 칼을 들거나 시체로 누워 있던 모습. 이미 하진은 그들과 여러 번 마주했었다.


“어허… 이거 뭔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데.”


뒤에서 지켜보던 사장님도 난감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디서 이런 걸 찾은 거예요? 여기 문턱 안에 있었다니.”


하진은 잠깐 변명할 거리를 찾았다.


“아… 원룸 계약하고 나서부터 이상한 소리가 났는데, 설마 이런 게 숨어 있을 줄 몰랐어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덕분에 찾았어요.”


사장님은 의아해하면서도 더 깊게 묻지 않았다. 워낙 오래된 물건 수리 의뢰도 많이 받았으니, 그저 ‘희귀한 골동품’쯤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일단 바닥은 응급 보수해둘 테니, 나중에 정식으로 수리 맡기는 게 좋을 거요. 새로 마감해야 깔끔하지.”


사장님이 간단히 나무판을 덧대고, 나사로 튼튼히 고정해 주었다. 그사이 하진은 쇳덩이와 편지를 자기 방 한쪽에 가져다 놓았다.


수리점 사장님이 집을 나서기 전, 하진은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정말 감사해요. 덕분에 큰 도움이 됐어요. 혹시나 또 궁금한 게 생기면 찾아갈게요.”


“허허, 별말씀을. 난 그냥 부탁받은 거 한 거지. 그래도 너무 위험한 짓은 하지 마시오. 이 집, 뭔가 묘하네.”


사장님은 마지막으로 집 안을 둘러보고는, 우산을 들고 나갔다.


문을 닫고 혼자 남은 하진은 새삼 숨을 몰아쉬었다. 


‘이 집, 뭔가 묘하다’


외부인의 입에서도 그런 말이 나올 정도니.


바닥에 앉아 있던 하진은 쇳덩이를 마주하고 있었다.


‘이 금속 장치는 일종의 미니 금고? 근데 지금은 더 이상 열릴 게 없는 것 같아. 편지 하나가 전부였고, 그 편지엔 경고와 힌트만 적혀 있네. “틈새의 기억을 보게 될 거다”… 그게 뭘 의미하는 걸까?’


하진은 머리를 싸쥐고 생각을 정리했다.


이미 지난 수일간, 수많은 ‘또 다른 나’들이 등장했으며, 전부 골목에서의 끔찍한 살인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편지 역시 “또 다른 네가 기다린다”고 쓰여 있다.


분명 이 모든 것은 열쇠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


“열쇠로 뭘 열어야 할까? 문? 아니면 어떤 ‘시간의 문’?”


문득, 노트 속 삽화가 다시 떠올랐다.


비틀린 시계와 칼, 그리고 "Don't open the door" 라는 경고….


‘문을 열면 안 된다고 해놓고, 또 한편으로는 “어딘가의 문”을 열도록 유도하는 듯한 단서가 많다. 대체 어느 쪽이 진실이야?’


복잡한 생각으로 진이 빠져갈 즈음, 휴대폰이 또 울렸다. 이번엔 번호가 제대로 뜨는 수상한 전화였다. 발신자는 낯선 번호.


“여보세요?” 


하진이 전화를 받자, 상대방이 작게 숨을 고르며 말했다.


“저, 혹시 윤하진 씨 맞죠? … 저, ‘F. Ko’ 측 대리인이라고 했던 사람입니다. 어젯밤 옥상에서 뵀던.”


바로 어젯밤 옥상에서 만났던 그 남자 목소리였다. 하진은 숨을 죽였다.


“아, 네. 무슨 일이시죠?”


상대방은 약간 초조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전달해야 할 추가 자료가 있어서요. 혹시 시간이 괜찮다면 지금 만나 뵙고 싶은데….”


“추가 자료요? 무슨 자료인데요?”


“자세히 말하기 어렵습니다. 좀 급해요. 분명 윤하진 씨가 보면 좋을 내용이라, ‘F. Ko’께서도 빨리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진은 생각했다. 


‘어젯밤 분명 며칠 후에나 만나겠다더니, 왜 이렇게 갑자기?’


그러나 ‘추가 자료’가 궁금하긴 했다. 아무래도 열쇠와 1995년 사건, 그리고 또 다른 살인 같은 힌트가 추가로 있을 듯했다.


“좋아요. 그럼 어디로 가면 될까요?”


“집 근처에 카페 같은 곳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진은 간단히 근처 프랜차이즈 카페 위치를 알려줬고, 곧장 나갈 준비를 했다. 도어락을 잠그고, 작은 배낭에 노트와 편지를 챙겼다. 


‘혹시 대리인에게 보여줄 수도 있으니까.’


약속한 카페는 집에서 10분 거리였다.


일요일인 탓에 손님이 적어서 분위기가 한적했다. 조용히 테이블을 잡고 앉아 있으니, 문득 낯익은 실루엣이 들어왔다. 바로 옥상에서 봤던 그 남자였다. 모자는 쓰지 않았지만, 마스크를 껴서 얼굴이 절반쯤 가려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가 가볍게 목례하며 하진 맞은편에 앉았다. 긴장한 듯, 식은땀을 닦고 있었다.


“추가 자료라니… 뭘 가져오셨나요?”


하진이 본론부터 물었다.


남자는 겉옷 속에서 작은 메모리카드를 꺼냈다.


“컴퓨터에 꽂으면 볼 수 있는 영상 파일이 담겼습니다. 제가 ‘F. Ko’로부터 받아 두었던 건데, 원래는 조금 나중에 전해주려 했어요. 근데 상황이 급박해서…. 윤하진 씨가 한시라도 빨리 보시는 게 좋겠다 싶습니다.”


“영상? 혹시 또 살인 현장 같은 건가요?”


하진은 캠코더 영상이 떠올라서 조금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자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해요. 1995년 사건의 자료 일부, 그리고 이후 발생한 비슷한 사건 영상이 짧게 편집되어 있습니다. 여러 해에 걸쳐 찍힌 영상들이라고 하더군요. 아마… ‘평행선상’의 윤하진 씨들이 얽힌 모습일 수도 있어요.”


‘평행선상에 있는 윤하진들.’


이제 익숙해진 문장, 동시에 불쾌한 잔상도 함께 떠올랐다. 설마 또 그녀와 똑같이 생긴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등장하는 잔혹한 영상일까? 속이 메스꺼워졌다.


“정말 이걸 제가 봐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하진이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사실 더 이상 끔찍한 장면은 보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괴로워 보이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F. Ko’가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영상을 보면, 윤하진 씨가 갈 길이 좀 더 선명해질 거라고. 누가 희생되어야 하고, 누가 살아남아야 하는지도….”


“희생… 살아남아야 하는 자….”


하진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골목에서 키 큰 그림자가 말했던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살아야 한다’는 문장과 닮아 있었다. 정말로 그런 식의 결말을 강요받아야 한다면 어떡하나?


하지만 하진은 돌이켜봤을 때, 도망쳐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이미 깨달은 상태였다. 결국 마주해야 한다.


“알았어요. 제가 보겠습니다. 지금 바로 볼 순 없고, 집에 돌아가서 노트북으로 확인해야 할 것 같네요.” 


“네,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조심하셔야 해요. 영상에 담긴 내용이… 충격적일지도 모릅니다.”


남자의 시선이 왠지 수심에 가득 차 있었다. 한편으로 ‘F. Ko’라는 인물이 직접 이런 영상을 찍었는지, 아니면 어디서 구해온 건지 궁금했지만, 자세한 설명을 해주리라 기대하긴 어려워 보였다.


“그럼… 내일이나 모레쯤 다시 연락하시겠어요? 영상 본 뒤에 제가 궁금한 게 있을 것 같은데.”


하진이 제안하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전 그때까지 준비해놓을 게 있으니, 편하신 시간 말씀해주세요.”


남자는 서둘러 자리를 떴고, 하진은 혼자 카페에 남았다.


커피 한 모금이 써서 목에 걸리는 느낌이었다.


곧장 집으로 돌아가 메모리카드를 확인해야겠다는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왠지 지금 당장 보기엔 무서웠다. 여유를 가지고 마음을 가다듬은 뒤 보아야 할 것 같았다.


‘집에 돌아가면 또 밤이 올 텐데, 난 또다시 골목 악몽을 꿀 수도 있어…. 그래도 볼 수밖에 없겠지.’


하진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또 다른 ‘살인 목격 영상’을 통해, 진짜 자기 운명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끔찍하지만 피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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