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21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11회. 그림자의 초대

by 몽골왕자 Jan 05. 2025

윤하진은 전화를 끊은 뒤 잠시 거실에 멈춰 섰다. 휴대폰을 쥔 손이 여전히 떨렸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 'F. Ko'라고 했다.


“지금까지 찾아 헤매던 그 이름이… 직접 전화를 걸어오다니.”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온몸에 식은땀이 맺혔다. 꿈결 같은 ‘골목의 악몽’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모든 것이 이어져 있었다. 사실, 탈출은커녕 이제야 본격적으로 시작된 기분이었다. 자정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가야 해.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아.”


하진은 노트북 가방에 캠코더와 메모를 다시 챙겼다. 72시간의 끝에서도 해답은 얻지 못했지만, ‘F. Ko’라는 존재가 나타났다. 그가 어떤 인물일지, 진짜 그 과거의 열쇠를 쥔 본인인지 전혀 모르지만, 직접 만나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내 선택이 정말 중요해.’


그녀는 현관문을 나서며 스스로 다짐했다. 다시는 도망치지 않고, 진실을 끝까지 파헤치리라.


“오늘 밤 자정까지.”


머릿속에 남은 그 마감 시간은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주소를 든 하진은 택시를 잡아탔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이 아니었다. 도심 외곽, 한적한 주택가 근방으로 보였다. 가는 내내 창밖을 보며 두려움과 기대가 교차했다.


‘내가 정말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걸까? 설마 함정이라면?’


심장을 짓누르는 불안감 속에서도, 맨손으로 하염없이 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얼마 전 골목의 수리점에서 봤던 낡은 캠코더 수리 기사님이 떠올랐다. 혹시 그가 또 다른 단서를 제공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당장 시간은 부족했고, 무엇보다 ‘F. Ko’가 준 시한도 촉박했다.


“일단은 직접 만나야지. 더 늦으면 기회를 놓칠 거야.”


결국 하진은 그대로 택시를 몰아 ‘F. Ko’가 알려준 주소로 향했다.


하진이 목적지 근방에서 내렸을 때, 시계는 밤 11시 30분쯤을 가리키고 있었다. 주택가라곤 해도, 오래된 단독주택들 사이로 가로등이 듬성듬성 놓여 있어 골목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두리번대는 순간,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 주차장이 있는 흰색 건물 앞으로 오세요. 3층 옥상 계단에서 기다립니다.


“3층 옥상 계단…?”


주변을 둘러보자 옆 골목 끝에 허름한 3층 건물이 하나 보였다. 대로변에서는 조금 들어온 위치여서 밤이 되니 어둑하고 사람도 없었다. 건물 외벽엔 다소 칠이 벗겨진 부분이 보였고, 간판조차 달리지 않은 걸 보니 오래된 건물임이 분명해 보였다.


하진은 가슴이 뛰는 걸 느끼며 조심스럽게 건물 쪽으로 발을 옮겼다.


한편으론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스쳤다. 그럼에도 발걸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도망은 안 돼.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까.”


낮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실내등이 깜빡이며 하진을 맞았다. 고요한 복도엔 오래된 먼지 냄새가 배어 있었다. 전세 혹은 월세로 쓰이는 원룸들이 모여 있는 것 같았지만, 빈 집이 많은지 이 시간엔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옥상 계단이라….”


하진은 가방 끈을 조여 매고, 계단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계단 사이사이에 벌어진 금이나 깨진 타일 조각들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가 살다 떠나버린 건지, 혹은 사람 왕래가 거의 없는 곳인지, 음산하기까지 했다.


2층3층….


마침내, 옥상으로 이어지는 철문이 보였다. 철문은 잠겨 있지 않은 듯 살짝 틈이 열려 있었다. 거기서 바람이 불어오며, 빗방울인지 습기 같은 것이 간간이 느껴졌다. 옥상으로 올라오는 길목에 하나의 작은 전구만이 흔들리며 희미하게 불을 밝혔다.


“정말 여기가 맞는 건가.”


하진은 숨을 고르면서 철문을 밀었다.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옥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좁은 공간이었고, 구석에 오래된 물탱크와 산더미처럼 쌓인 잡동사니 박스들이 방치되어 있었다. 한쪽 구석으로는 계단실을 덮는 작은 지붕이 이어져 있는데, 바로 그 아래 누군가가 서 있었다.


“왔군요.”


하진은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얼굴을 모자와 마스크로 가린 남자였다. 몸집은 보통 정도, 나이는 짐작하기 힘들었다. 다만, 목소리가 의외로 부드러웠다.


“당신이… F. Ko씨입니까?”


그녀가 묻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난 ‘F. Ko’와 관련된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실질적으론 대리인이죠.”


짧은 대답. 하진은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했다. 정작 본인은 아니고, 대리인이라니.


“그렇다면, F. Ko는 어디 있죠? 나… 할 말이 많아요.”


하진이 다급하게 묻자, 남자는 진중한 태도로 한 발짝 다가왔다.


“직접 뵙기엔 아직 시기상조랍니다. 그분도 준비해야 할 게 많다고 해서요. 대신 제가 일정 부분 설명해드리려 왔습니다. 그리고… 이걸 보여주려고.”


그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낡은 두꺼운 노트 같은 것이었다. 표지는 가죽으로 되어 있었고, 오래된 종잇냄새가 물씬 풍겼다. 겉면에는 희미하게 F. Ko라는 이니셜이 찍혀 있었다.


“이건…?”


하진의 눈빛이 초조하게 흔들렸다.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느낌이 쎄했다. 이 노트에서 뭔가 중요한 비밀이 튀어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게 바로 1995년 사건 관련 기록입니다. 그분이 오래전부터 직접 정리해온 것이죠. 당신에게 꼭 보여주라 해서 가져왔습니다.”


남자는 노트를 건네주면서 옆에 있는 파이프 의자 같은 곳을 가리켰다. 앉아서 보라는 신호였다. 사실 앉고 싶을 정도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하진은 숨을 고르며 노트 커버를 뒤로 젖혔다.


‘사건일지…?’


첫 장에는 ‘1995년 11월 27일 새벽 3시’라는 문장이 또렷이 쓰여 있었다. 그녀가 태어나기 1년 전, 어느 골목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흔적. 그리고 ‘창문다방’ 사진 뒤에도 적혀 있던 그 지독한 날짜이기도 하다.

  

    사건 발생 장소: ○○ 골목  


    피해자: 여성(이름 불명, 약 20대 중반 추정)  


    목격 정보: 흰색 셔츠를 입은 젊은 남성이 피 묻은 열쇠를 들고 골목을 뛰쳐나오는 것을 봄.  


    특이사항: 피해자의 얼굴이 남성과 ‘똑같았다’는 목격담…  


하진은 허리를 굽히고 노트 속 글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문체는 간결했지만 섬뜩한 내용이 많았다. 특히 ‘피해자의 얼굴이 남성과 똑같았다’는 진술은, 요즘 그녀가 겪고 있는 ‘또 다른 나’와 기묘하게 오버랩되었다.


“이게… 사실인가요? 피해자와 범인의 얼굴이 같다고요?”


하진이 당황스레 묻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에 의하면, 목격자들이 충격을 받아서 제대로 진술하지 못했다고 해요. 경찰도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치부했지만, ‘F. Ko’는 이 부분이 핵심이라고 믿고 있죠.”


노트 뒤편을 넘기자 오래된 사진들도 붙어 있었다. 흐릿한 골목 사진, 피로 얼룩진 바닥, 그리고 그 중심에 쓰러진 여자의 모습…. 그런데 하진은 왠지 이상하게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자신이 그 ‘시체’를 본 적이 있는 것처럼.


“혹시… 이 사진에 찍힌 여자의 얼굴, 제가 본 적 있어요. 저랑 아주 닮았다고 해야 하나… 아니, 거의 동일했던 것 같은데.”


그녀의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났다. 가슴이 미친 듯 뛰었다.


남자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아요. 그래서 당신을 찾았던 겁니다. 이 사건과 당신이 연결되어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죠.”


1995년 살인사건의 기록, 그리고 사진….


하진은 다시 한 장을 넘겼다. 마지막 부분에는 ‘열쇠(Key)’에 대한 정리된 노트가 있었다. 

 

    열쇠(Key)  


    제작자 혹은 주인: F. Ko  


    목적: 시간과 운명을 잇는 ‘매개체’  


    특징: 열쇠를 지닌 자는 서로 다른 자신들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음.  


    이용 시 주의사항: 반복적 ‘살인’, ‘자기 소멸’ 가능성.  


“반복적 ‘살인’, ‘자기 소멸’ 가능성이라니….”


하진은 한숨을 내쉬며 노트를 덮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결국, 이 열쇠로 인해 ‘또 다른 나’들이 나타나고, 심지어 서로를 죽이는 끔찍한 상황이 빚어졌다는 뜻일까. 마치 평행세계나 시간의 틈새 같은 초자연적 현상이 겹쳐진 느낌이었다.


“당신은 대체 뭘 바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F. Ko라는 사람은… 왜 저를 여기까지 끌어들이는 거죠?”


하진이 매서운 눈빛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당장 이 ‘노트’를 넘겨받은 것도 좋지만, 정작 그 속내가 의심스럽다. 혹시 자신에게 함정을 파놓은 건 아닐까.


남자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마스크 뒤에서 그의 침묵이 짙어졌다. 야윈 어깨가 살짝 떨리는 듯 보였다. 마치, 뭔가를 감당하기 어려운 표정처럼.


“결국, F. Ko가 원하는 건… ‘열쇠’를 안전하게 관리할 주인을 찾는 겁니다.”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 열쇠는 단순히 물건이 아니라, 운명을 재구성하는 힘을 지녔죠. 그리고 잘못 사용하면 또 다른 비극이 생겨납니다. 실제로 1995년 사건 이후에도 여러 차례… 음, 비슷한 사고가 있었다고 해요.”


“그럼, 저도 그 사고들 중 일부에 휘말린 거라는 뜻인가요?”


하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머릿속은 여전히 ‘72시간 골목의 살인’이 선명했다. 그리고 그 캠코더에 녹화된 끔찍한 영상들, 모두가 이 열쇠 때문에 생긴 비극이라는 것인가.


남자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네. 당신이 그 열쇠를 받게 된 순간, 이미 깊이 연결되고 말았습니다. 과거부터 이어져 온 유령 같은 운명이 당신에게 달라붙은 거죠. 이 사실을 모르고 방치했다간… 또 어떤 살인과 비극이 일어날지 몰라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나요?”


하진은 당혹스러운 감정을 억누르며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나타나서는 위험한 노트를 넘기고, 열쇠를 관리할 ‘주인’ 운운하는 모습이 납득되지 않았다.


남자는 대답 대신, 흰색 파일을 건넸다. 그 안에는 하진이 몰랐던 최근 사건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 어느 지역의 골목에서 발견된 시체, 그리고 모두가 ‘자신과 똑같은 얼굴’이었다는 증언이 붙어 있었다. 날짜는 놀랍게도 최근이었다.


“이게…”


하진은 숨이 막혀왔다. 다시금 생각나는 ‘또 다른 나’가 골목에서 죽어나가는 광경, 그 끔찍한 장면이 머릿속에 겹쳐졌다.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거군요, 이런 일들이.”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겁니다. 누군가가 열쇠를 제대로 ‘봉인’하지 않는 이상.”


“봉인이라니… 그런 게 가능하긴 한 거예요?”


하진은 희미한 희망을 걸며 물었다. 열쇠 때문에 벌어지는 악몽이라면, 그걸 없앤다면 한 번에 해결되지 않을까?


하지만 남자의 목소리는 묘하게 떨렸다.


“완전히 없앤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죠. 그저 열쇠가 함부로 ‘시간의 경계를 넘나들지’ 못하도록 막는 정도랄까. 그리고 그 역할을 할 사람이 바로… 당신일지도 모릅니다.”


“…제가요?”


하진은 충격을 받았다. 뜬금없이 ‘봉인의 주인’이라니.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비상식적인 일들을 직접 겪은 이상, 그 또한 허황된 얘기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옥상 바람이 불며, 낡은 지붕이 삐걱 소리를 냈다. 달빛도 희미한 구름 뒤로 숨어들어, 이 공간엔 은은한 공포가 감돌았다.


하진은 두꺼운 노트와 파일을 품에 안고 한참을 고민했다. 도대체 이 남자와 F. Ko가 어떤 의도로 자신을 ‘봉인’의 주인으로 지목하는지, 진심으로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그냥 안 한다고,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 꼴사나운 살인 사건들에서 손 떼고, 일상으로 돌아갈 순 없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골목에서 자신이 겪은 ‘또 다른 나’들의 비명, 쓰러진 시체, 그리고 72시간의 메시지가 머리를 채웠다. 도망쳐봤자, 이들은 또다시 찾아올 것만 같았다.


“이건 협박인가요, 아니면 구원이 될 수도 있나요?”


하진은 차갑게 물었다. 그녀 자신도 지금껏 헷갈렸지만, 직접 입에 담아 확인하고 싶었다.


남자는 잠시 망설이더니, 솔직히 털어놓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둘 다죠. 도망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언젠간 다시 돌아오게 될 거예요. 열쇠가 당신을 선택했으니까. 차라리 이제 운명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세상에 퍼진 잔혹한 고리를 끊어주길 바라는 거죠. F. Ko는 그걸 ‘구원’이라 부르고, 어떤 이는 그걸 ‘협박’이라 부르겠지만….”


그 말은, 결국 하진이 할 수 있는 결정은 하나뿐이란 뜻처럼 들렸다.


“제가… 이 노트를 보고, 열쇠를 봉인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 거네요?”


“네. 그리고 그 방법을 완성하려면, ‘F. Ko’를 직접 만나야만 할 겁니다. 그분이야말로 이 열쇠의 창시자니까요.”


“직접 만나게 해주세요. 지금 당장이라도.”


하진은 결심이 선 듯 단호하게 말했다. 언제까지 대리인만 상대할 순 없었다. 돌아가지 않는 퍼즐 조각을 맞추려면, 정면돌파밖에 답이 없다.


하지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이것까지만. 아직 당신이 모든 자료를 다 이해하지 못했으니, 더 자세한 건 조금 이따가—”


“싫어요. 이 모든 일을 겪은 뒤로 더는 미루고 싶지 않아요.”


하진의 목소리에 더 이상 흔들림은 없었다. 골목의 악몽과 시체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지금, 더 늦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녀는 노트와 파일을 꽉 움켜쥔 채 남자에게 한 발 다가섰다.


“‘나’를 죽이려 들던 ‘또 다른 나’들이 계속 나타날 수도 있잖아요. 그런 상황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자 남자는 작은 한숨을 쉬며 천천히 대답했다.


“당신이 그 의지를 확실히 했다면… 그래요. 그렇다면 연락을 취해보죠. 나도 그분께서 바라는 게 뭔지 충분히 알지만, 당신처럼 강하게 고집하는 사람은 처음이네요.”


남자는 주머니에서 낡은 휴대폰을 꺼내 무언가 메시지를 쳤다. 한참 기다렸지만 답장은 바로 오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잠시 뒤, ‘딩-’ 하고 오는 알람음에 그가 화면을 확인하더니 눈이 살짝 커졌다.


“오, 일단 알겠답니다. 지금 곧장 움직이지는 못하니, 며칠 후에 다시 시간을 잡겠다는군요. 그전까지 당신은 이 자료들을 숙지하고, 열쇠에 대해 좀 더 파악해놓으라는 전달사항입니다.”


“며칠 후라니… 전 지금 당장—”


하진이 조급해 했지만, 남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왜 그분이 그렇게 얘기하는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도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니… 오늘 밤은 여기까지입니다.”


옥상 너머로 밤비가 가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화가 종결된 기류를 감지한 하진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애써 이곳까지 찾아왔지만, F. Ko를 바로 만날 순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얻어 간 것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1995년 사건 기록, 봉인에 대한 언급, 열쇠의 실체….


다만 여전히 많은 게 미궁 속이다.


“한 가지만 더 물을게요.”


하진은 돌아서기 전, 남자를 다시 쳐다봤다. 


“이 열쇠… 정말, 제대로 봉인할 수 있을까요? 또 다른 살인을 막고, 저도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남자는 잠시 그녀의 시선을 피하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F. Ko’가 그 길을 찾아 헤맸으니까요. 당신이 서툴러 보이긴 해도, 의지만은 확실해 보이네요. 잘 해내실 겁니다.”


어쩌면 립서비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하진에게는 그 말조차 작은 희망이었다. 그녀는 노트와 파일을 품에 더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일단 돌아갈게요.”


하진이 몸을 돌리자, 그가 조용히 마지막 말을 남겼다.


“조심하세요. 그리고… 절대 열쇠를 함부로 쓰지 마세요. 어떤 유혹이 있어도, 그게 함정일 테니까.”


‘유혹?’


하진은 가슴이 철렁했다. 순간, 골목에서 봤던 ‘피의 칼’을 든 자기 모습이 떠올랐다. 열쇠는 시간과 운명을 비틀 수 있지만, 잘못 사용하면 자기 자신까지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다는 경고가 머릿속을 울렸다.


하진은 건물을 내려와 택시를 다시 잡았다. 어느덧 비가 더 굵어져 어두운 거리 위로 빗소리가 자박자박 내려앉았다. 택시 창문을 통해 번지는 빗물 너머로, 희미한 가로등 불빛들이 뭉개져 흐릿하게 번졌다.


‘F. Ko… 1995년 사건… 나와 같은 얼굴의 피해자… 그리고 열쇠를 봉인해야 한다는 얘기….’


모든 퍼즐이 뒤죽박죽 뒤섞인 느낌이었다. 그러나 하나만은 분명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또다시 괴이한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


‘어쩌면 다시 그 골목의 악몽으로 돌아가, 또 하나의 ‘나’가 죽어가는 꼴을 보게 될지도 몰라.’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혔다. 시야가 어둑해지면서, 어느새 택시는 집 근방에 도착했다. 하진은 요금을 치르고 내렸다. 갑자기 몸이 휘청일 만큼 현기증이 일었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았다.


“휴….”


하진은 빗속을 뚫고 겨우 집 현관에 닿았다. 낡은 아파트 복도는 습기와 비 냄새가 뒤섞여 꽤 불쾌했지만, 적어도 골목의 공포보단 나았다.


집 문을 열어 보니, 낮에 나갔을 때 그대로 어질러져 있었다. 차갑게 식은 방안. 숨 막히는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는다. 밤 12시가 훌쩍 넘은 시각, 그녀는 혼자 이 작고 쓸쓸한 원룸에 들어섰다.


“정말로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면… 최선을 다해보자.”


하진은 힘겹게 가방에서 두꺼운 노트와 파일을 꺼냈다. 그리고 거실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다. 집중해서 읽으면 분명히 뭔가를 발견할 수 있을 거다. 그것이 1995년의 힌트든, 열쇠 봉인의 구체적 방법이든 간에.


그녀는 조명을 켠 채 노트와 파일을 하나하나 훑었다. 곳곳에 수수께끼 같은 기호나, 낙서처럼 그린 문양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골목과 관련된 스케치였고, 가운데 삽화 하나가 유독 눈길을 끌었다.


- 비틀린 시계와 칼, 그리고 겹쳐진 ‘두 얼굴’이 그려진 그림-


바닥에 떨어진 열쇠가 물방울처럼 그려져 있고, 그 위에 붉은 선으로 X 표시가 쳐져 있었다. 아래쪽에선 희미하게 "Don't open the door" 라고 영어가 휘갈겨 쓰여 있었다.


‘문을 열지 말라…. 뭘 뜻하는 거지?’


하진이 의아해하며 그림을 들여다보는 순간, 문득 휴대폰이 가볍게 진동했다.


메시지가 왔다. 확인해 보니… 발신자는 불명, 번호가 뜨지 않았다.


- 택배를 확인해.

- 그곳에 '다른 열쇠'가 있다.


“또 택배라니? 설마…?”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전에도 ‘낯선 택배’가 그녀를 골치 아프게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무언가 또다시 날 찾아온 건가?


하진은 조심스럽게 현관문 너머를 확인했다. 분명 방금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런데 이번엔 분명 무언가가 문 밖에 놓여 있었다. 갈색 상자, 이전과 똑같은 모양.


‘설마 또 캠코더? 아니면… 다른 열쇠?’


피곤하고 경계심이 쌓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뒷걸음치는 대신 문을 열고 택배 상자를 안으로 들였다.


그녀는 뜯기 전에 멈칫했다.


‘남자의 경고가 떠오른다. “함부로 열쇠를 쓰지 말라”고 했지… 이 택배도 같은 맥락인가?’


그러나 호기심과 불안이 뒤섞여 한시라도 빨리 확인해야 한다는 충동이 강했다. 결국 그녀는 커터칼로 상자를 살짝 열었다.


그리고 안쪽을 들여다본 순간, 그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속에는 오래된 사진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우중충한 흑백 사진 속엔, 낡은 골목에서 ‘칼’을 든 채 절망적인 표정을 짓는 윤하진의 모습이 선명했다. 이번엔 캠코더 영상이 아니라 ‘실물’ 사진이었다.


그리고 사진 더미 밑에 조심스레 손을 넣자, 시커먼 금속 열쇠가 손에 닿았다. 흔한 열쇠보다 더 큼직하고,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열쇠….


“이건… 뭘 여는 열쇠지?”


하진은 사진과 열쇠를 쥐고 앉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번 열쇠는 언뜻 전에 쥐었던 것과 달랐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게 또 다른 살인의 시작인지, 아니면 봉인으로 향하는 두 번째 관문인지.


하지만 ‘문을 열지 말라’던 그림 속 문구가 자꾸만 뇌리를 맴돌았다.


이 택배는 누가 보낸 것일까?


또 어떤 운명의 갈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테이블 위에 펼쳐진 과거 사건 노트와, 막 도착한 낯선 열쇠….


마치 시간의 퍼즐이 겹쳐지듯, 모든 조각이 여기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녀는 이 열쇠를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지만, 피할 수 없다면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제발, 이 열쇠가 새로운 비극의 문이 아니길….’


하진은 조용히 두 손을 마주 잡고, 깊은 밤의 정적 속에 서서히 스며들어가는 빗소리를 들었다.


어둠 속 빗줄기가 긴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이 순간, 그녀의 운명은 또다시 예고 없이 방향을 틀고 있었다.




화, 목, 토 연재
이전 10화 10회. 죽음의 문턱에서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