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함이 찾아온다는 건, 이미 많이 지나왔다는 뜻

상실의 계절을 지나는 마음에게

by TODD

토요일 오후의 공원은 해가 일찍 물러나는 계절에 더 조용해집니다. 이제 2025년도 스무날 남짓 남았습니다. 달력을 한 장 넘길 때마다 바람은 더 얇아지고, 나무는 자기 몸에서 잎을 하나씩 떼어냅니다. 겨울은 늘 이렇게, 소리 없이 정리를 시작합니다.


연말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종종 말합니다.

“올해도 수고했어.”
하지만 그 말이 닿지 않는 마음도 있습니다. 열심히 살아왔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왠지 모르게 허전해지는 시기. 무언가를 해냈다는 감각보다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이 먼저 찾아오는 때가 있습니다.


상실은 이맘때 더 또렷해집니다. 누군가의 부재, 끝난 관계, 기대만큼 도착하지 않은 결과들. 혹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 겨울은 그 모든 것을 숨기지 않습니다. 나무가 잎을 모두 떨군 뒤에야 비로소 가지의 형태가 선명해지는 것처럼.


우리는 슬픔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잃어버리기 전에도, 그 감정이 어떤 모습일지 짐작해 본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아플지, 얼마나 오래갈지, 어떻게 견뎌야 할지 말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순간에 도착하면 슬픔은 우리가 상상했던 얼굴이 아닙니다. 울음보다 먼저 찾아오는 건 공허함이고, 비탄보다 앞서는 건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이상한 고요함입니다. 마음은 분명 아픈데, 그 아픔을 설명할 말이 사라진 상태. 상실은 그렇게, 겪기 전까지는 결코 알 수 없는 풍경으로 펼쳐집니다.


연말의 허무함은 실패에서만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 버텨낸 사람들’에게 더 자주 찾아옵니다. 해야 할 일은 다 했고, 책임도 감당했고, 겉으로 보기엔 크게 무너진 것도 없는데 마음 한편이 텅 빈 느낌. 그 감정은 삶이 멈췄다는 신호가 아니라 다음 질문을 준비하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심리학적으로도 상실 이후의 허무함은 비정상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상실을 겪은 뒤 마음은 즉시 회복되지 않습니다. 애도에는 단계가 있고, 그 과정에는 무기력, 공허, 의미 상실 같은 감정이 자연스럽게 포함됩니다. 문제는 이 감정을 빨리 지워야 할 대상으로 오해할 때 생깁니다.


토요일 오후의 공원은 그런 오해를 풀어주는 장소입니다. 두꺼운 패딩 점퍼를 입고 벤치에 앉아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지는 순간이 옵니다. 겨울 햇빛은 따뜻하다고 말하기엔 부족하지만, 차갑다고 단정하기엔 여전히 빛을 품고 있습니다.

상실의 마음은 종종 우리를 과거로 데려갑니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조금만 더 붙잡았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겨울의 시간은 뒤로 흐르지 않습니다. 대신, 정지된 듯한 속도로 현재를 오래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 느린 시선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잃어버린 것과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구분하게 됩니다.


슬픔은 예고하지 않습니다.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방식으로 그 장소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감정들을 마주합니다. 분노보다는 공허함, 비탄보다는 무감각, 절망보다는 이상한 고요함.

상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방식으로 우리 안에 자리 잡습니다. 허무함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을 지나왔다는 흔적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연말의 허무함은 새해의 다짐보다 먼저 와야 하는 감정인지도 모릅니다. 무언가를 더 채우기 전에, 비워진 자리를 한 번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 말이죠.


해가 완전히 기울 즈음, 공원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지고 사람들의 발걸음도 하나둘 집으로 향합니다. 벤치에 남아 있는 온기는 금세 식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기억은 남습니다.


상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픔은 옅어지지만, 그 자리를 통과한 흔적은 다음 계절을 대하는 태도를 바꿉니다. 2025년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모두 각자의 겨울을 지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상실을, 누군가는 허무함을, 또 누군가는 이름 붙이기 어려운 공백을 품은 채 말입니다.


하지만 토요일 오후의 공원이 늘 그랬듯, 이 계절도 우리를 재촉하지 않습니다. 겨울은 묻습니다. “올해, 무엇을 놓아주었는가.” 그리고 조용히 덧붙입니다. “그 상실은 당신을 어떤 장소로 데려갔는가.”


우리는 그 질문에 서둘러 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남은 시간은 결론을 내리기보다 마음을 천천히 정리하기에 충분히 길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계속해서 잎을 떨굽니다. 그러나 그 아래 드러난 가지는 여전히 단단합니다. 그것이 겨울이, 그리고 상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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