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관계]
퇴근 후, 현관문을 열자 아이가 환한 얼굴로 뛰어왔다. "아빠!" 피곤했던 하루가 순간 잊히는 듯했다.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아이는 내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놀아줘!" 나는 잠시 망설였다. 오늘은 유독 힘든 날이었다. 회사에서 실수를 했고, 상사의 날 선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조용히 있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의 반짝이는 눈빛을 외면할 수 없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거실 바닥에 앉아 아이와 블록을 쌓으며 문득 생각했다. 아버지도 퇴근 후 이런 기분이었을까. 내가 어린 시절, 저녁마다 아버지에게 달려가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는 몰랐다.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온 부모의 몸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아버지는 피곤한 얼굴로도 나를 안아주었고, 짧은 시간이지만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나는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이제야 안다. 부모가 된다는 건, 자신의 컨디션과 상관없이 아이에게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지쳐도 아이에게는 좋은 아빠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다짐이 늘 지켜지는 건 아니었다. 피곤함이 누적된 어느 날, 아이가 칭얼대는 소리에 결국 짜증을 내고 말았다. "아빠, 나 이것도 못 해!" 아이가 블록을 맞추지 못해 울상을 지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게 계속 칭얼대면 아빠 힘들어." 순간, 아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날 밤, 아이가 잠든 얼굴을 보며 깊이 후회했다. 아이에게 감정을 조절하라고 하면서, 정작 나는 내 감정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 어릴 때 아버지가 내게 화를 낸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벌써 아이에게 몇 번이나 짜증을 냈다. 아버지도 나를 향해 한숨을 쉬고 싶었던 날이 있었을까. 하지만 그는 참고 넘겼고, 나는 그것을 모른 채 자랐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실천까지 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서툴렀고, 아이를 키우면서도 배워야 할 것이 많았다. 부모가 된다는 건 완벽한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부족한 채로 책임을 감당하는 일이었다.
어느 날, 부모님과 저녁을 먹다가 아버지가 문득 말했다. "요즘 네 딸이랑 잘 놀아주는 것 같더라."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그래야죠." 그러자 아버지가 덧붙였다. "나는 그걸 잘 못했거든." 나는 젓가락을 멈추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어릴 때 네가 같이 놀자고 해도 피곤하다는 이유로 자주 거절했어. 그러고 나니까 네가 크고 나서는 내가 놀아주고 싶어도 네가 관심이 없더라."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바쁜 일상 속에서 나를 충분히 챙기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정작 아버지에게 그런 서운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저 아버지는 늘 바쁜 분이었고, 나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때 알게 되었다. 부모의 후회는 자식이 기억하는 것과 다를 수 있다는 걸. 오늘 나는 아이에게 짜증을 냈고, 그 일로 후회했다. 그리고 몇십 년 전, 아버지도 나를 놀아주지 못했던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지금의 나를 후회할 날이 오겠지.
퇴근길, 가끔 부모님께 전화를 건다. 예전에는 ‘별일 없이 잘 계시겠지’ 싶어 연락을 미루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별일 없는 하루’를 지켜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부모님도 언젠가는 우리 곁에 없을 것이고, 나는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금 더 자주 전화를 걸고, 조금 더 오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아이는 매일 성장하고 있다. 블록을 맞추지 못해 울던 아이는, 어느새 혼자서 성을 쌓아 올린다. "아빠, 봐봐!" 나는 고개를 돌려 아이가 만든 블록성을 바라본다. "우와, 혼자 했어?" 아이는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천천히 말한다. "잘했어."
나는 좋은 부모일까. 가끔은 이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걸. 실수하고, 후회하고, 다시 다짐하는 과정 속에서 조금씩 배워가는 것임을.
그날 밤, 아이가 다시 내 손을 꼭 잡았다. "아빠, 손 잡고 자면 좋은 꿈 꿀 것 같아."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또 한 번, 아버지의 손길을 떠올렸다. 어릴 적, 내가 잠들기 전 아버지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순간. 그땐 몰랐다. 그 손길에 담긴 마음을.
이제야 안다. 부모가 된다는 건, 매일 자신을 다잡는 일이라는 걸. 그리고 언젠가, 내 아이도 부모가 되고 나서야 이 마음을 알게 되겠지. 그때까지, 나는 오늘도 조용히 그 손을 잡아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