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진언 Sep 04. 2020

나 원래 달리는 사람이었지

<걷는 사람, 하정우>를 읽고 되찾은 나의 루틴

<걷는 사람, 하정우>를 휘리릭 읽어버렸다. 연예인 책을 잘 읽지 않는 편인데 걷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나도 모르게 손이 갔다. 읽고 나니 제주 올레길을 걷고 싶어 졌고 뭔지 모를 위로를 듬뿍 받은 느낌이다.



일 년에 두 번 혹은 세 번 마라톤을 하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풀코스를 일 년에 두 번 이상 완주하는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걷는 것 말고 잘하는 운동이라고는 전혀 없던 내가 용기를 내어 도전하기 시작한 유일한 운동이 바로 마라톤이고 그 후 5년 동안 매년 10K 완주만 해본 지극히 초보자이다.


제대로 배워 본 적은 없지만 나에게 마라톤을 소개해준 지인이 운동법과 달리는 방법을 알려줬고 호흡법과 트레이닝은 유튜브를 통해 배웠다. 마라톤 카페나 회원, 크루 모집에 나갈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는 워킹맘이었던지라 배울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나름 노력했던 것 같다. 허벅지 근육을 위해 평일 새벽 헬스장을 다니고 틈틈이 스쿼트를 했고, 완주를 위해 한 달 전부터 주말에는 연습도 했었다.


내 마지막 마라톤은 2019 춘천마라톤이다. 전에 브런치에도 소개했던 대로(건강한 이별 프로젝트 https://brunch.co.kr/@charmtory/17) 먼저 하늘나라로 간 가까운 지인과 함께 신청했던 거라 그녀의 이름표를 달고 달렸던 그 마라톤이 지금 나에게 마지막 마라톤이 되었다(매년 1월 1일에 가족과 달리는 5K 새해 마라톤은 기록보다 의미에 치중하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가족행사라 그건 열외. 2020년 1월 1일에도 우리 아이들은 5K 완주했다).


그때는 심적으로 무척 힘들었던 시기라 마라톤 이후에 매일 하던 루틴이 깨져버렸다. 스트레스는 그대로 나의 몸에 독소가 되어 쌓여갔으리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기운을 내 다시 운동하고자 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무언가 의미를 찾지 못했던 것 같다. 달리는 이유 혹은 운동하는 이유 말이다. 목표가 없었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다음 마라톤에 대한 준비도 하지 않았다. 그냥 하기 싫었다는 것이 그때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러다 육아휴직에 들어가며 잠시 멈췄던 아침 운동을 다시 시작하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겨울 새벽에 혼자 낯선 동네를 뛰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고 차일피일 미루다 내가 언제 운동을 하던 사람이었는지는 다 잊어버리고 코로나 방콕이 시작되었다.

 

확찐자가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매주 다니던 산행에서도 체력 저하가 심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건강하던 나의 허벅지의 근육은 날이 갈수록 조용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래도 운동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오늘도 여전히 운동과는 거리가 먼 나날을 보내고 있다가 갑자기 읽은 책 <걷는 사람, 하정우>에서 나는 위로와 함께 희망을 보았다.

나에겐 일상의 루틴이 닻의 기능을 한다. 위기상황에서도 매일 꾸준히 지켜온 루틴을 반복하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의미하게나마 보인다. 실제로 내가 아는 정신과 의사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환자들에게 그게 무엇이든 루틴을 정해놓고 어떤 기분이 들든 무조건 지킬 것을 권한다. 루틴이란 내 신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얼마나 골치 아픈 사건이 일어났든 간에 일단 무조건 따르고 보는 것이다. 고민과 번뇌가 눈덩이처럼 커지기 전에 묶어두는 동아줄 같은 것이다. (p.165 힘들다, 걸어야 겠다)


내가 아무리 힘들고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어도 러닝머신을 30분이라도 달리고 출근을 하던 작년까지의 일상이 휘리릭 생각나며 그때 이후 여러 이유로 미루었던 나의 게으름에 스스로의 질타가 이어졌다. 그리곤 당장 내일 아침부터 달리자고 다짐해버렸다.


한때 나는 열정을 잃어버린 느낌을 받았다. 나 자신을 추스르는 시간이 필요했다. 내 갈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걷는 것, 내 보폭을 알고 무리하지 않는 것, 내 숨으로 걷는 것. 걷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묘하게도 인생과 이토록 닮았다.(p.41 왜 자꾸만 나를 잃어버리지?)


러닝머신 위로 올라가 전원 스위치를 켜고 다리를 움직여본다. 한 걸음 내디디면 다음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되고, 그 걸음이 다음 걸음을 부른다. 일단 몸을 일으키는 것. 다리를 뻗어 한 발만 내디뎌보는 것. 단순한 행동은 힘이 세다.(p.158 한 발만 떼면 걸어진다)


하필이면 오늘 이 책으로 손이 갔고 다시 운동을 시작해야겠다로 생각이 미치기까지는 아마도 이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 오전 생전 처음으로 심리상담을 받았다. 비대면이라 전화통화로 이루어져 조금 아쉬운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낯선 이에게 지난 나의 상처들을 이야기하고 나니 무언가 홀가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이야기하면서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증상은 여전했다. 하지만 잠깐의 상담을 통해 나는 아직도 직장 내 괴롭힘 사건으로 인한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고 그건 그냥 쉰다고 나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한 번의 상담으로 큰 변화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자꾸 말이나 글로 그때의 감정을 드러내어 표현해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상담사의 말에 왜인지 모를 힘이 났다. (다들 이래서 상담을 받나 보다 싶은^^;;)


나는 달리는 사람이다. 달리거나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스트레스를 털고 성취감에 행복해하는, 달리는 사람이다. 그간 스트레스와 코로나로 인해 잊고 있던 나의 루틴을 <걷는 사람, 하정우>와 상담사님을 통해 살짝 되찾았다. 코로나로 당분간 마라톤은 불가능할 테니 동네를 달리고 제주 올레길도 걸어보려 한다. 작가님의 말처럼 걸으면 만나는 그 정직성과 선물을 받아보련다. 


그래, 이제 달릴일만 남았다.


어제 이 글을 써두고 오늘 아침 비록 30분이지만 상큼하게 달리고 왔다. 태풍 때문에 바람도 선선하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나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해주는 기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누가 뭐래도 스스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