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히 말하다. "네, 전공했어요."

‘라 캄파넬라'의 마지막 음을 장식하는 건반을 누르고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교수님은, 실제론 몇 초 되지 않았겠지만, 거의 몇 분 동안이나 악보만 들여다보시는 듯했다.


교수님이 물으셨다.


“슬희야, 이 곡은 몇 분의 몇 박자니?”


생각지도 못한 기초 질문에 난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8분의 6박자요.”


“8분의 6박자는 강약이 어떻게 되지?”


14년 전이긴 해도 나름 음대 졸업생인데, 이런 기초적인 질문을 계속하시니 당혹스러웠다. 이건 한국인에게 ㄱ, ㄴ, ㄷ을 읽을 줄 아냐고 묻는 거나 다름없었다.


“강약약중강약약이요”


“그렇지, 슬희야. 잘 알고 있네! 너는 모든 음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오히려 밋밋하게 들려. 이번엔 강약약중강약약, 그러니까 하나 둘 셋 둘 둘 셋을 생각하면서 다시 쳐보자.”


난 교수님의 목소리와 손짓에 맞춰 연주에 집중했다. 강약을 지키는 것만으로 내 음악은 훨씬 재미있게 들렸다. 건반 위에서 재빠르게 날아다니는 손가락에만 심취해 있느라 정작 피아노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듣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교수님은 크레센도(점점 크게), 포르테(크게)와 같은 악상기호도 짚어주셨다. 처음 종소리는 점점 사라지듯이, 클라이맥스 직전에 나오는 옥타브는 점점 커지는 왼손과 뒤이어 빠르면서 작게 울리는 오른손의 대비를 살려서. 악보에 나와 있는 악상기호를 유의하며 치니 밋밋했던 음악이 극적으로 들렸다. 난 '악보에 충실한 연주'가 무엇인지 다시 깨달았다.


뒤이어 손가락이 자꾸 꼬이던 부분도 봐주셨다. 내 손가락이 꼬인 주된 이유는 앞서 말씀하셨듯 모든 음을 정성 들여 치느라 생긴 문제였다. 교수님은 속도를 늦춰 그룹으로 묶어 치는 연습 방법을 알려주셨다. 그러자 몇 시간씩 씨름해도 해결되지 않던 부분들이 마법처럼 풀어졌다. 교수님의 마법으로 내 음악은 치기에도 편하게 다듬어졌다.



난 사실 음대 졸업 후에도 음악 공부를 이어가고 싶었다. 내 피아노가, 내 음악이 좋았으니까. 하지만 어려운 아이들이 자꾸만 눈에 밟혀서, 그 아이들이 어린 나를 보는 것만 같아서 음악을 포기하기로 결정했었다.

그래서 교수님이 레슨비를 조금만 받겠다고 하셨을 때, 다시 시작한 거 부담 없이 해보자고 하셨을 때, 난 그 손길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디에도 내놓기 부끄러운 통장 잔고와 주말에도 일하고 있는 바쁜 현실을 고려했을 때, 아이들이 아닌 날 위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집에 돌아온 나는 바로 1년치 레슨 일정을 잡았다. 직장인이니까 자주는 아니고 3주에 한 번만.




우울과 공황장애가 찾아온 뒤, 난 늘 주눅 들어 있었다. 사소한 실수에도 자책했고 밤마다 내가 한 말 남이 한 말을 곱씹었다. 이를 떨쳐내기 위해 매일 같이 술을 마셨다. 그러다 디지털 피아노를 다시 들이고, 클래식을 다시 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바뀌었다. 초등학생 때도 안 쓰던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난 연습에서 성취한 것들을 기록하며 사소한 성장들을 찾아냈다.


어려운 걸 해결하기 위해 꼼꼼하게 연습했다.

이상하게 치는 부분을 발견해 해결해 보려고 노력했다.

내 의도가 표현된 것 같다.


이 소소한 성장 기록들은 “슬희야, 넌 잘하고 있어.” 라는 위로를 안겨주었다.


연습에서 아쉬웠던 점도 기록하며 내 상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았다.


왼손이 덜덜거린다. 내일은 부분 연습을 해서 꼭 해결해 볼 거다.

테크닉에만 집중하다 보니 음악적으로 표현을 못 했다.

조급함을 다스리고 침착하게 연습해야겠다.


객관적인 시선은 피아노를 아직 못 치는 나를 비하하고 자책하기보단 현실을 정확하게 볼 수 있게 했다.


술 마실 시간도 아까웠다. 집에 있는 디지털 피아노로는 채울 수 없는 연습의 질을 높이기 위해 퇴근하면 회사 근처 연습실로 달려갔다. 연습실 가는 날이면 저녁도 건너뛰고 밤 10시까지 피아노를 쳤다. 그렇게 연습을 해도 잘 치고 싶단 열정은 가시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면 당근마켓에서 산 중고 디지털 피아노로 연습을 이어갔다. 가끔 만나던 친구들도 만나지 않았다. 난 지난번에 망쳤던 피아노 동호회 연주를 다시 만회하고 말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첫 번째 동호회 정기연주회 날, 아침부터 연습실에 가서 손을 풀고 모처럼 한껏 치장을 한 뒤에 집사람과 함께 서울로 향했다. 그렇게 연습했는데도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또 망치면 어떡하지?’ 이번에도 손가락이 꼬여버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연주 도중에 무대에서 내려오고 마는 아찔한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불안한 마음에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카락 한 올도 흘러내리지 않게 머리를 다듬었다. 그 어떤 것도 변수가 되어선 안됐다.


연주회가 시작했다. 취미 동호회라더니 참석자들은 전공자와 구분되지 않을 만큼 피아노를 잘 쳤다. 그걸 보는 내 손은 차가워지고 손바닥엔 땀이 차올랐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안에서 밖으로 내 가슴을 세게 쳐댔다. 난 괜히 옆에 앉은 집사람 옷에 땀을 닦으며 초조함을 달랬다. 집사람의 응원도 그 순간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 차례였다. 난 아무렇지 않은 듯 무대로 걸어 나갔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 높이와 거리를 조정하며 시간을 끌었다.


첫 번째 곡은 쇼팽 에튀드 op. 25 no. 6. 완곡 하는 데까지 2분밖에 안 걸리는 짧은 곡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오른손이 3도를 빠른 속도로 연주해야 했기에 전공자들도 혀를 내두르는 곡이었다. 난 손이 작고 재빨랐기 때문에 대학생 땐 어렵지 않게 칠 수 있었다. 쉽게 생각하고 연습 모임 때 연주 했다가 완전히 망했었지. 난 숨을 짧게 들이마신 뒤, 은밀한 표현을 살려 연주를 시작했다. 2분 안에 끝내겠단 마음을 내려놓고 속도를 조금 낮추고선 교수님께 배웠던 음악적 표현을 살리려고 애썼다. 후반부에 나오는 점점 커지다가 절정으로 치닫는 부분에선 약간 여유를 주라고 하셨던 조언을 살려 연주하니 내 마음마저 음악과 함께 절정으로 내달렸다. 난 마지막 음을 치고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다음은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 작은 종소리가 작게 울리는 듯 시작해 화려하고 웅장한 옥타브 테크닉으로 휘몰아치며 끝나는 이 곡은 내 입시곡이었다. 고3 때 얼마나 연습을 했는지 대학 다닐 때도, 피아노를 그만둔 뒤에도 손이 절로 움직이는 유일한 곡이었다. 도약과 연타, 스케일과 옥타브까지. 화려한 테크닉으로 가득 찬 이 곡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했던 내게 딱 맞는 곡이었다. 오죽하면 친구들도 홍슬희 하면 떠오르는 곡은 ‘라 캄파넬라’라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동호회 연습 모임에도 들고 갔던 곡이었다. 그러나 피아노를 오래 쉬면서 손가락이 녹슬었는지 그 어떤 테크닉도 제대로 연주할 수가 없었다. 이게 큰 함정이었다. 난 화려한 테크닉을 뽐내는 데에 빠져 음악의 기본을 완전히 놓치고 있었다. 안 되는 테크닉을 억지로 하려니 팔에 힘이 들어가다 못해 뻣뻣해져 음을 놓치고, 정신이 흔들리고, 정신이 흔들려서 또다시 틀리고, 5분도 안 되는 시간에 온갖 악순환이 반복됐다.


역시 교수님의 조언을 떠올리며 ‘라 캄파넬라’를 재빠르게 훑었다. 마음속으로 박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둘 둘 셋’. 마음속으로 세던 박자에 종소리를 덧입히며 연주를 시작했다. 테크닉을 어떻게 보여줄까가 아닌 이 음악을 어떻게 들려줄까에 집중했다. 그러자 긴장해서 손가락은 헛짚어도 정신없이 휘몰아치다가 절정에 이르러 귓가에 종을 후려치는 흐름은 끊기지 않았다.


연주가 끝나고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나자 연주 홀은 사람들의 박수로 가득 찼다. 그렇게 듣고 싶던 박수소리였다.




뒤풀이에서 간단하게 동호회 사람들과 식사를 했다. 조용히 눈알을 굴리며 처음 본 사람들을 바라보던 나에게 한 사람이 말을 걸었다.


“슬희님, 전공하셨죠?”


연습 모임에서 같은 질문을 받았던 게 떠올랐다.


그때의 난 14년 만에 피아노를 다시 치면서도 ‘취미생들 보단 잘 치겠지’ 하며 거만한 마음을 가졌다. 화려하게 뽐낼 욕심만 내다 연주를 제대로 망쳐버려 너무 수치스러웠던 탓에 내가 전공한 사실을 숨기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난 회사 다니면서도 최선을 다해 연주를 준비했고 아쉽긴 했지만 후회 남는 연주를 하진 않았다.


난 눈을 마주치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네. 전공했어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