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쓸 만한 조과장 Dec 13. 2020

지금 월세집을 구했다고 늦은 건 아니니까


지난 금요일 첫 월세집에 가계약을 하러 갔다. 집을 다시 한번 보고 집주인과 통화한 후 주택임대차계약서 서명을 하였다. 가계약을 마치고 저녁에 친한 동네 형을 만나. 월세집에 가계약을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형은 장소, 입주일, 월세 등을 물어보다가 "그래 시원섭섭하겠네"라는 말은 건넸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던 내 속마음을 형을 통해 전달받은 기분이 들었다.


나의 첫 독립이긴 하지만 설렘보다는 "시원섭섭함"이라는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만족감은 기대와 현실의 갭 차이라고 했다. 독립한 것은 좋지만 기대 속에 바랬던 집의 모습과 지금 집의 모습이 아쉬움으로 다가왔던 거 같다. 이 형도 함께 집을 알아보고 많이 조언도 받았던 터라, 내 마음을 더 잘 알아주었던 거 같았다. 


사실 주변에서는 왜 편한 집을 놔두고 독립을 하냐고 만류하기도 했다.  내가 다니는 직장과 집 간의 출퇴근 거리는 대중교통으로 1시간 10분 정도이다. 사실 통근시간으로 보면 그리 멀지도 않고 적당한 거리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집에 있으면 엄마가 뜨신 밥상도 차려주고, 빨래도 해주고, 돈도 절약되는데 왜 독립을 하냐. 정말 가족 간의 사이가 안 좋은 게 아니면 독립을 하지 말고 얹혀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회사를 다니며 매 순간 독립을 생각했다. 대학 때 이미 경제적으로 독립했고, 취업도 다른 또래에 비해 빨리 들어갔다. 그래서인지 꼭 결혼이 아니더라도 그전에 나 혼자 나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 같다. 또한 나이를 먹다 보니 부모님과 더 시간을 많이 보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생각의 차이를 느낄수록 부모님과 조금은 거리를 두며 지내는 것도 서로를 위해 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구한 집은 10평 남짓한 원룸이다. 그래도 방이 분리되어있다고 1.5룸이라고도 한다. 부엌과 분리돼있는 건 좋은 거 같은데 베란다가 없는 건 아쉽다. 가까운 지하철역까지 도보로 10분이고, 역에서 회사까지 25분이니 통근시간은 꽤 단축된 거 같다. 주변에 편의시설도 많고 원룸들이 밀집돼있는 곳이라 안전하기도 하다. 방 크기에 욕심만 안 부리면 나름 좋은 조건에 저렴하게 구했다는 생각도 든다.


주변에 결혼을 빨리 준비하는 친구들을 보면 담보대출을 받아 몇억짜리 전셋집도 구하거나 집을 매매하기도 한다. 그에 비해 나는 이제야 부모님 품에서 나와 10평 남짓한 월세집에 들어간다니 늦은 감이 든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주변 시선에 쫓겨 무리하게 하는 것보다 조금씩 세상 물정도 배워가며 재정적으로 준비가 되고 부동산에 대한 이해가 충실히 되었을 때 해도 늦지 않다고는 생각한다.


이전에 무심코 내 집을 마련하면 부엌에 와인바를 만들어야지 생각했다. 와인바가 주는 도시적인 느낌과 주변 사람들과 파티하는 분위기가 좋았다. 그런데 이번에 집을 구하며 살 가구들을 정리하다 보니 와인바는 후보에 없었다. 파티보다는 다용도 침대에서 느긋하게 책도 읽고 차도 마시며 여가시간을 보내고 싶다. 가끔 잠이 안 올 때 먹을 수 있는 와인 한 병 정도 냉장고 한편에 둘 거 같다. 


내가 와인바를 가지고 싶은 이면에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욕구도 있었던 거 같다.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하다 보니 남들보다 빨리 가는 게 괜찮은 인생이라도 여겨왔다. 취업도, 승진도, 내 집 마련도 나는 이 경쟁에서 먼저 살아남았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훈장처럼 보여주고 싶었던 거 같다. 하지만 월세집을 구하면서 속도를 가지고 나와 사람들을 바라봤다는 것이 가치관이 협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의 시선도 신경 안 쓸 수는 없지만 나에게는 지금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공간보다는 나 자신을 아끼고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내가 원하는 것들로 꾸밀 수 있는 공간, 내가 편안하게 쉬며 다음 스텝을 고민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한편으로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주택 가격이 무섭기도 하지만, 당장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너무 쫓기듯이 불안에 시달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기업분석을 하면서 느끼는 것 중에 하나가, 기업의 가치는 노력하면 정밀하게 맞출 수 있지만, 기업의 주가는 노력해도 정밀하게 맞출 수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몇 년 안에 주택 가격이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독립함으로써 그 속에서 내가 얻고 배우는 것들로 내 가치는 더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월세집을 구했다고 늦은 것은 아니니까 그냥 일 년은 이렇게 살아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

이전 08화 나의 10번째 코멘토 강의를 마치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