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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피디 Oct 14. 2019

매춘부를 사랑한 남자

반 고흐의 숭고한 사랑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들 바쁘다 시간 없다 하면서도 꽤 굵직한 취미 하나쯤은 가지고 들 사는 것 같았다. 쳇바퀴 굴러가듯 반복되는 일상에 권태로움을 느끼던 지난해 겨울이었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대학 후배 녀석은 주말마다 꽃꽂이 학원을 부지런히 다니는 것 같더니 얼마 전엔 플로리스트 자격증까지 땄다고 했다. 지금은 강의를 준비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는 것 같았다. 같은 사무실을 쓰는 송대리님은 알아주는 커피 광인데 바리스타 자격증은 물론이고 대회에도 출전해 수상까지 한 엄연한 프로 바리스타다. 물론 본인은 취미일 뿐이라고 하지만 말이다. 정신없이 바쁜 직장생활 속에서도 주변은 나만 빼고 모두 살뜰하게 삶을 챙겼다. 괜한 억울함에 휩싸인 나는 새로운 취미거리를 찾아 인터넷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빈센트 반 고흐'  

그 고상한 이름을 내 앞에 자주 꺼내어 늘어놓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였다. 고심 끝에 결정한 새로운 취미는 화가의 생애와 작품을 보고 들으며 함께 나누는 '그림 모임'이었다. 여행을 다닐 때마다 크고 작은 미술관을 꼭 둘러보는 나였지만 띄엄띄엄 들은 지식으로는 어딘지 어설퍼 영 맘에 들지 않았었다. 오랜 갈증에 대한 나름의 해답이라 여겼기에 더없이 좋은 취미였다.



 다섯 평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자그마한 공간에 수강생들이 모두 모이면 7명 남짓 되었다. 모든 수강생이 전부 참석하는 날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세 명이 모이든 일곱 명이 모이든 각자의 세계를 열렬히 주고받는 충만한 대화의 장임에는 분명 틀림이 없었다. 다른 직업, 다른 나이,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빈센트 반 고흐'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한 자리에 모여 길고 짧은 대화의 바통을 이어나가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낭만적인 일이었다. 아득하기만 했던 고흐의 생애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우린 자주 함께 웃고 종종 탄식하며 가끔 같이 울컥했다. 누군가는 자신이 가진 깊은 우울을 고흐의 그림 앞에 내려놓았다. 전혀 이상하고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깊은 사유와 깨달음의 연속으로 작은 공간을 충만하게 채워나갔다.




 고흐는 가장 보잘것없고 미천한 곳에서 그림을 그리던 화가였다. 물론 그 누구도 고흐의 그림을 예술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고흐는 들판에서 커피를 끓이기 위해 불을 피우는 농부들과 무료식당에서 밥을 먹는 빈민을 그렸다. 열차 대합실을 그릴 땐 꼭 가난한 사람들이 타는 3등석 대합실로 갔다. 세상이 외면하기 좋은 인생들을 자주 살피던 그는 실로 뜨거운 가슴을 가진 사람이었다. 노동자의 탁한 눈동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어머니의 낡은 손가락이 버리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지, 아비의 굽은 허리에 짊어진 무게가 얼마나 고된지 고뇌하고 또 고뇌했다. 우리가 감히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삶의 숭고한 가치들을 그렇게 그려냈다.


<감자 먹는 사람들, 빈센트 반 고흐, 1885>


"그래 좋다.
언젠가 내 작품을 통해
그런 보잘것없는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보여주겠다."

1882년 7월 21일 테오에게-





 내가 빈센트 반 고흐라는 화가에 열광하기 시작한 것은 하나의 작품과 만난 직후였다. 휑한 알몸으로 얼굴을 두 팔에 파묻은 한 여인의 모습.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와 늘어난 젖가슴, 그리고 불룩한 배는 그녀가 임신 중인 매춘부인 것을 암시했다. 가느다란 팔다리는 여지없이 연약해 불안해 보였고, 잔뜩 수구린 어깨는 삶의 진통이 심한 사람 같아 보였다. '크리스티나 클라시아 마리아 후르닉'. 반 고흐가 사랑한 여인이다.


<슬픔, 빈센트 반 고흐, 1882년 4월>



"지난겨울, 임신한 한 여인을 알게 되었다.

남자한테서 버림받은 여자지.

그녀도 나도 불행한 사람이지.

그래서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짐을

나눠지고 있어.

그게 바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주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만하게 해주는

힘 아니겠니?

그녀의 이름은 시엔이다."



 1882년 5월 3~12일 테오에게-





  한 동안을 생각해야 했다. 가슴 아주 깊은 곳에서 묵직하게 일렁이는 여운에 자꾸 멀미가 나 쉽사리 팬을 들 수 없었다. 한 때 가장 사랑했던 남자에게 버림받은 여인은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기도 전에, 영혼을 나눠가진 또 하나의 생명을 그 뱃가죽 속에 품어야 했다. 생에 가장 밑바닥에서 길을 잃은 여인. 그리고 그런 여자를 사랑한 남자 빈센트 반 고흐. 그 심정이 긍휼이었는지 연민이었는지, 아니면 인간애의 어디쯤이었는지 혹은 사랑이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슬펐다. 누군가의 말처럼 정말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인연을, 불행한 사람은 불행한 인연을 부르는 걸까.


"역시 천재적인 화가답게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고 느꼈어요."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수강생 한 명이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예술적 감각은 일반인의 차원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천재적인 능력이며 정상범위 밖이라는 것이 그녀의 말이었다. 그랬기에 고흐도 '천재적인' 화가라는 수식어답게 상식적으로 이해되는 사람은 아닌 것이 확실하다고. 임신한 매춘부를 사랑하다니 가히 그럴만하다고.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예술의 본질은 그 어떤 새로운 차원에서의 시작이 아니라 '다시, 인간'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영혼의 눈이 자꾸 인간의 내면으로 굽어 들어가 사유와 감동이 뒤섞여 새로운 모습으로 재창조되는 일. 그것이 예술의 본능이자 본질이라 생각했기에 고흐는 나에게 가장 순수하고 인간적인, 상식보다 더 상식적인 예술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까닭으로 나는 오래도록 그림 앞에 머물렀다. 그리고 손가락질당하던 고흐의 사랑이 그가 갈망하던 미술적 세계관에 아주 부합한 것이라고 느끼기에 이르렀다. 고흐는 보이는 피사체의 겉모습을 그대로 캔버스에 베껴내는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사유와 인상을 담아낸 '인물화'를 그리는 사람이었다. 그의 모델이 된 사람들은 늘 붓을 든 고흐의 영혼과 마주했을 것이다. 눈을 맞추고 손을 맞잡고 농밀하고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눴으리라. 때때로 지독한 삶의 격정 앞에서 눈물을 훔치고 서로의 어깨를 다독였을지 모른다. 피사체의 형태는 고흐에게 그저 선과 면의 절묘한 조화 일 뿐, 두 눈에 담긴 인물은 언제나 재창조되어 붓을 따라 캔버스 위에서 다시 태어났다. 껍데기를 넘어 '본질'을 담아내는 숭고한 작업인 것이다. 


이런저런 유파에 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진정으로 표현하는 그림을 남기고 싶다.

1883년 8월 4~8일 테오에게-



 그는 아마도 당신이 그려내던 인물화 같은 사랑을 했으리라. 겉으로 보이는 누군가의 모습, 남들이 흔히 갖는 관념 같은 것들은 고흐에게 쓸모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보잘것없고 미천한 여인은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나뿐인 당신의 '시엔'으로, 가장 존귀한 사랑으로 말이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이 말짱한 두 눈으로도 똑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떠올렸다. 그때마다 나는 고통했다. 탁해진 영혼을 가지고 살다가 미처 품지 못한 본질이 얼마나 많았나 생각한다. 어떤 사물이나 인물을 대할 때 피상적인 것에만 집착하는 오류를 범하기란 아주 쉬운 일이었다. 타인의 외모나 하는 일, 학벌 등 쉽게 평가할 수 있는 겉모습에 집착하는 마음들이 그렇다. 누추하고 소박한 것들을 쉽게 여기는 마음들이 그렇다. 하지만 비통하게도 본질을 보는 것은 아주 어렵고 더뎠기에 자주 반 고흐 당신의 마음을 내 앞에 늘어놓아야 했다.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사람의 본질을 보는 용기, 미치광이라 손가락질하는 수많은 역정 속에서 그 마음을 지켜주어 고맙다.





아무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어도 당신의 사랑만은 진실했는데, 희망이라곤 하나도 맘에 없을 때 바로 그 별이 찬란하게 빛나던 밤에 당신은 종종 연인들이 그러하듯 그렇게 생을 마감했죠.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빈센트, 이 세상은 원래 당신처럼 아름다운 인간을 위한 곳이 아니었다고.

 -Don Mclean, <Vinsent>의 노랫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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