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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원 Mar 04. 2019

나만의 파자마 라이프

나날이 집순이가 되어 가는 중이다. 독립을 한 뒤로 집을 정말 오롯이 내 공간으로 만들 수 있어서 더 집안에 머물게 된 것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필 그 독립을 경기도로 했더니 서울 시민일 때 쏘다니던 곳들이 점점 더 마음속에서 멀어지는 탓도 있는 것 같고... 한 시간 내로만 걸리면 꽤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 경기도민의 거리 감각을 갖췄지만, 동시에 어디든 가려고만 하면 왕복 두 시간을 길에서 보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벌써 피곤하다는 것이 함정이다. 나가지 않아도 집에서 꾸벅꾸벅 졸기, 집에서 영화 보기, 집에서 책 보기, 집에서 음악 틀어두고 집안일하기, 뒹굴거리기 등등 집에만 있어도 할 일이 많다.


그리고 이 할 일들을 한층 더 평화롭게 만들어주는 준비물은 다름 아닌 잠옷.


원래 집에서 입는 옷을 정해둔 적은 없었다. 반티나 과티, 아니면 좀 흐물흐물해진 티셔츠를 대충 꿰어 입고 츄리닝 바지를 입으면 만국민 공통의 홈웨어인 게 아닌가. 나한테 잠옷의 개념은 혼수품목 같은 실크 잠옷이나, 지하상가에서 항상 균일가로 팔고 있는 수면바지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스파오 짱구 잠옷을 보고 충동구매할 뻔했는데, 실제 매장에서 재질을 만져보고는 뽐뿌가 사그라들어서 사지 않았더랬다. 그러곤 라인 프렌즈 잠옷 출시 때 이차 충동이 찾아왔고 이때는 왜인지 홀린 듯이 결제를 하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나 캐릭터에 홀리는 사람이었던가.

막상 받아본 브라운 잠옷은 내가 생각했던 포근한 느낌이 조금도 없었다. 분명 100% 면이라고 했는데, 내가 아는 면과 라인 프렌즈의 면은 다른 면이었던 것인지. 왜인지 움직일 때마다 사그락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나는 신비의 면이었다. 분명 겨울용으로 산 잠옷이었는데 오히려 여름에 잘 입기는 했다. 그래도 내가 생각했던 그 느낌은 아니어서 다시 굴러다니는 면티를 주워 입고 집순이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나름 야심차게 결심하고 산 첫 번째 잠옷이었는데.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두 번째로 산 잠옷은 무인양품 파자마였다. 사실 지금 이 글도 그 파자마를 입은 채로 쓰고 있다. 이런 건 사치품이라며 거들떠도 보지 않던 품목이었는데, 라인 프렌즈의 실패 이후로 왠지 억울해져서 무지 매장에 들렀을 때 한번 입어나 보자 하고 집어 들었다. 그리고 집어 들고 들어간 탈의실에서 다리 한쪽을 넣으면서 생각했다. 사야지 이건. 뭐랄까, 맨살 위에 위아래로 맞춰 입고 나면 순한 손수건에 몸이 감겨있는 기분이다.

맘에 들어 다른 패턴으로도 더 사서 파자마 라이프를 맘껏 누리는 중이다. 자꾸 더 사고 싶고, 한 벌 늘 때마다 바깥으로 나갈 의욕은 한 풀 더 죽는다는 것이 이 파자마들의 유일한 문제점이다.



출퇴근 러시를 피하려고 회사 근처로 집을 옮겼지만 그래도 아주 회사 앞에 있는 것보다는 조금 걸어 나오는 거리에 있는 집이 좋다.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일과 생활의 공간이 분리되니까. 파자마 라이프를 보내게 된 뒤로는 잠옷도 비슷한데, 집에 도착해서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면 비로소 집에 왔다! 는 기분이 난다. 이 옷으로 갈아입고 나면 이제부턴 우리집, 나만의 공간이라는 구분을 지어주는 것이다. 여행을 갈 때에도 요즘은 잠옷을 꼭 챙겨가곤 한다. 낯선 곳에 가서도 숙소에 돌아와 깨끗이 씻고 늘상 집에서 입던 잠옷을 꺼내 입고 나면 익숙한 공간에 와있는 것 같은 편함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가장 편한 것, 나를 가장 잘 충전시킬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는 마음에 드는 잠옷을 골라 입고 뒹굴거리는 시간 같은. 다른 누군가에겐 돈 낭비일 수도, 게으른 일일 수도, 쓸데없는 시간일 수도 있을 그런 것들. 내가 그런 날들을 보내는 동안에 항상 익사이팅하게 지내는 외향적인 사람들을 부러워한 적도, 더 생산적으로 보내지 못하는 하루를 탓한 적도 많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럴 시간에 나한테 맞는 무탈한 일상을 충분히 누리고 충전할 만큼 충전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훨씬 남는 일이었다.

이제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도 그때그때의 새로운 어려움, 새로운 불편함이 있을 거라는 것을 안다. 대학만 가면, 회사만 가면, 언제가 되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것은 너무나 거짓말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그저 조금 더 마음에 드는 잠옷을 찾을 수 있는 정도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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